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설교] "아아! 나는 정말 하나님을 보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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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단 6:19-28, 벧후 3:13-18, 막 15:16-21

설교문

[5.18 광주민주화항쟁 45주년]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존중받았을 때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밝히기 위해 나서서 헌신하고 희생했을 때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때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4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는 우리 교단은 매년 5.18 민주화운동기념주일을 지켜왔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잘 아시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 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 세력 척결' 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인류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국가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여럿이 함께 모여 살아갑니다.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태풍이나 홍수,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를 극복해 왔고, 집단 지성의 힘으로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둘 이상이 모이면 사람들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둘이 협력할 수도 있지만, 경쟁하기도 합니다. 갈등도 있고, 다툼도 발생합니다. 서로 힘이 다르기에 한쪽은 지배하고 다른 한쪽은 지배당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적은데 우리가 가진 욕망이 증폭되면,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투쟁과 아귀다툼이 벌어집니다. 거짓과 속임수,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면 생존의 위협은 가중되고, 불안과 두려움, 온갖 스트레스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하도록,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다툼이 원만하고 정의롭게 해결되도록 인류는 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좋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런데 때로 국가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소수 기득권의 입맛에 맞춰 불의한 일을 행하기도 하고, 소수의 사람이 국가가 지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국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도 생깁니다. 그래서 언제나 국가와 민중들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됩니다. 국민의 뜻을 잘 따르는 정부와 국가 권력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민중의 생명력을 억누르고 국민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 국가와 정부도 있는 것입니다.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무력으로 대한민국 국가 권력을 장악합니다. 군부의 중심엔 일제 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소위로 임관한 경력을 지닌 박정희가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과 농어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출 중심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을 내세워 개발독재를 하였고, 삼선개헌과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영구집권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산 마산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치고, 열흘 뒤인 10월 26일,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많은 국민은 이 땅에 민주주의가 도래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졌습니다. 서울의 봄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군인들의 총칼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 바로 40년 전 오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국가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국민에게 총칼을 겨누었을 때, 자기 친구, 가족, 동료, 이웃이 바로 옆에서 죽어갈 때, 광주 시민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이로 인해 유가족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여전히 상실의 고통으로 아파합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며 외롭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쳤던 수많은 젊은이가 있었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다가 숱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이들이 있고, 자기 가족과 친구,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지 못해 밀려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5.18 민주화항쟁을 왜곡시키고 폄하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남북한의 분단 체제를 이용하면서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등의 거짓 뉴스를 마구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좌익에 물든 폭도들의 난동이었다는 등의 유튜브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저질문화 속에서 광주에 대한 조롱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5·18민주화항쟁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으로부터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 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졌고,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습니다.

동학 혁명으로부터 3.1 독립만세운동, 4.19 혁명을 지나 87년 6월 항쟁, 2017년 촛불혁명과 오늘날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의 열망과 염원을 가지고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그 한 가운데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언제든지 인권은 유린되고 민주주의는 후퇴합니다. 우리가 2,000년 전 일어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듯이, 5.18 민주화 항쟁도 늘 새롭게 마음에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우리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그렇게 많은 총기가 아무런 통제 없이 평범한 일반 사람들과 젊은 학생들의 손에 쥐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총기에 의한 범죄가 단 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나라 군대가 자기들을 죽이는 그런 터무니없고 경악스러운 상황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그토록 놀라운 질서와 도덕성을 증명한 것은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광주 시민들은 자기감정을 절제하고, 적절하게 행동했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헌신적이었고, 남에게 친절했으며, 목숨을 유린하는 자들에 대해 용감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국가기구의 공권력이 완벽하게 정지되고, 고립된 상황에서 거대 폭력이 자행되던 그곳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곳은 5.18 광주 이외에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날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봉쇄 작전 속에서도 주먹밥을 만들어 서로 나눠 먹고, 앞을 다투어 자기 피를 바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목격했던 김준태 시인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1980년 7월 31일

저물어가는 오후 5시

동녘 하늘 뭉게구름 위에

그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앉아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몸이 아파 술을 먹지 못하고

대신 콜라로나 목을 축이면서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정말 하느님을 느꼈다

1980년 7월 31일 오후 5시

뭉게구름 위에 앉아 계시는

내게 충만되어 오신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그런 뒤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고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좋아졌다

내 몸뚱이가 능금처럼 붉어지고

사람들이 이쁘고 환장하게 좋았다

이 숨길 수 없는 환희의 순간

세상 사람들 누구나를 보듬고

첫날밤처럼 씩씩거려 주고 싶어졌다

아아 나는 절망하지 않으련다

아아 나는 미워하거나 울어버리거나

넋마저 놓고 헤매이지 않으련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라면 피라미

한 마리라도 소중히 여기련다

아아 나는 숨을 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하찮은 물건이라도

입맞추고 입맞추고 또 입맞추고 살아가리라

사랑에 천번 만번 미치고 열두번 둔갑하여서

이 세상의 똥구멍까지 입맞추리라

사랑에 어질병이 들도록 입맞추리라

아아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다산 정약용의 판결문과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

18세기 조선, 개혁 군주라고 불리는 정조는 중앙 요직에 있던 다산 정약용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자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잠시 황해도 곡산 부사직의 벼슬을 내립니다. 다산이 부임하기 전, 이 지역에는 농민 이계심이라는 이가 주동한 민란이 있었습니다. 군포(軍布)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 관에서 군포 대금을 200냥에서 900냥으로 대폭 올려 징수하자, 이계심은 농민 천여명을 이끌고 곡산 관아로 가서 항의시위를 벌입니다. 이 시위는 폭력적으로 해산되었고, 이계심은 수배자 신세가 됩니다. 부임을 앞둔 다산에게 좌의정 김이소는 주모자는 물론 적극 가담한 자들을 잡아 사형에 처해 엄히 다스리고 국가질서를 잡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산이 부임하는 길목에 이계심이 갑자기 나타나 백성을 괴롭히는 열 가지 항목을 적은 문서를 전달하려고 했고, 관졸들에 의해 체포됩니다. 다산 정약용은 관아로 끌려온 이계심을 심문하고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리고, 석방합니다. 그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치자가 밝은 정치를 펴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제 몸의 편안함만 꾀하느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통치자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천금을 주고 사야 할 사람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謀身, 不以犯官也. 如汝者, 官當以千金買之也.)

이계심은 훌륭한 지도자 덕분에 목숨도 살리고 존중받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은 시골에서 오는 길에 로마 병사들에 의해 예수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은 도시나 마을 밖에서 사형을 집행했는데, 원래는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걸어갑니다. 예수께서는 채찍질을 너무 당하여 끝까지 지고 가실 수 없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한 사람을 징발하여 대신 지고 가게 했는데, 그때 바로 시몬이 지목된 것입니다. 시몬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로마 군대의 위력 때문에 겉으로 말은 못했겠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이고, 그날의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서는 시몬을 소개하면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서 저자가 이들을 알고 있다는 얘기이고,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식 이름이고, 루포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자신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사실을 초대 교회에 알려주었고, 그래서 이렇게 복음서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 쓰는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루포와 그의 어머니를 언급(로마 16:13)하는데 만일 이들이 동일 인물이라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초대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서 일찍이 자기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모두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명시적으로 지는 사람은 유일하게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열둘이 아니라, 예수에게 고침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길을 지나가다가 걸려들었던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충격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 모두가 실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점에서 충격이고,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 누구든지 선택하셔서 역사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다는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시몬 베드로는 도망갔지만,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를 달게 받았고,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5.18 광주 시민과 전라도 도민들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십자가를 졌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광주가 진 그 십자가를 함께 져야 합니다. 그저 내 한 목숨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도망가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모두는 우리가 만들어 갈 역사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밤을 낮으로 바꾸고, 낮을 밤으로 뒤바꾸며,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며,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고자 하는 그런 결단의 일입니다. 역사의 십자가를 이어가는 일은 몸은 죽어 땅에 묻혀도 우리의 혼과 넋은 살아서 자유와 해방, 사랑과 정의, 생명과 평화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며, 벽이라도 밀면서 문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한강 작가가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진압군에게 체포되어 고문받던 한 대학생의 이런 고백이 등장합니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서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소년이 온다』 114.)

또 다른 장면에서는 한 출판사가 군중을 주제로 펴내는 신간 인문서의 서문이 소개되는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소년이 온다』 95.)

오늘 우리는 인간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군중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집단이어야 할까요? 야만성을 누르고 숭고함을 일으키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있는 깨끗한 그 무엇,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함께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다니엘의 담대한 신앙을 지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져졌고, 굶주린 사자의 우리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만났습니다.

[프로테스탄트]

박정희 시대가 지나고 이어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의 맛을 보고 계속해서 정권에 아부하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권력에 빌붙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교회 성장에만 힘쓰며, 복 받기를 바라던 이들입니다. 다른 한편에는 민족의 원죄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통일 운동에 나서고, 독재 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위해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들과 여성들,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위해 나선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지형도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와 주장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생명과 평화,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이 사회의 약자들, 억울한 이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은혜와 축복, 평안과 성장을 추구하면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기득권에 편입하는 길로 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길을 가야 할까요? 아니면 신앙의 이름으로 동포를 적으로 만들고, 이웃 종교들을 무시하고, 남들을 배제하고, 혐오 발언을 쏟아내며 차별하는 길을 가야 할까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 참된 진리와 올바른 신앙의 길은 분명합니다.

개신교를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에 저항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할까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게을러지는 자신의 안이함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익숙한 것에 머무르며 안주하려는 나태함과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넉넉하게 품어내지 못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마는 우리의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한 좁은 마음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분열하는 잘못된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맞서 싸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분노에 가득 차 있고, 그 분노가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여 삶의 태도가 너무나 공격적인 것은 아닌지도 성찰해야 합니다.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을 무시하고 사적 이익을 위해 제멋대로 하는 인간들, 법 위에 서서 법을 주무르면서 국민 대다수에게 해를 입히는 인간들과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스스로 찾아보고 점검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도 모르면서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세력은 제한 없는 권력과 폭력의 남용, 남을 업신여김, 돈이 주는 환상, 온갖 속임수를 통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기득권 세력들은 단단히 뭉쳐 있고, 이들은 언론과 법을 손에 쥐고 서민들을 농락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선포해야 합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이 짙었을 때도 계명성은 동쪽으로부터 밝아오듯이, 우리 주변에 소망하나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보일 때에 바로 우리가 밝아오는 한줄기 빛이어야 합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권력을 쥔 자는 스스로 도취 되어 자신의 영화가 계속될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손안에 들어 있을 뿐입니다.

불교 경전에 <유마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경전의 주인공은 유마 거사라는 분으로 출가한 승려가 아니라 재가 신자입니다. 한번은 이 유마 거사가 병석에 눕게 되는데, 부처님이 제자 문수보살을 시켜 병문안을 다녀오라고 합니다. 병문안을 온 문수보살에게 유마 거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무지(無明)와 삶에 대한 탐욕이 생긴 지 오래 되었듯이 나의 이 병도 생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득히 먼 과거부터 생사를 거치면서 모든 이들이 병들었기에 나도 따라서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치유된다면 나도 따라서 치유될 것입니다. ~ 중략 ~ 세상이 병들면 저도 병들고, 세상의 병이 나으면 저도 낫습니다."

세상이 아프기에 우리 모두도 아픕니다. 우리의 고통을 없애려면 먼저 세상의 고통을 치료해야 합니다. 온 세상을 치유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꿈이었고, 오늘 우리가 그 꿈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를 만들고, 십자가를 지는 일에 저와 여러분이 주역이 되면 좋겠습니다.

베드로후서가 말하듯, 우리는 오늘날도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 그런 나라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의 피땀을 통해서 옵니다. 가정의 달, 온 가족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더 큰 가족, 우리나라와 우리의 사회, 온 세계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돌보시는 하나님 마음을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나 개인의 안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넓고 큰 세상을 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아무리 부패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부푼 맘으로 기다리며 또 일구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모두 역사의 십자가를 집시다.

광주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 합시다.

울지만 말고 슬픔과 괴로움을 희망의 날개로 바꾸어 나갑시다.

우리 모두, 죽어서도 살리는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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