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설교] "덕을 세우는 사랑으로"

2025년 8월 24일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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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 16:9-17, 고전 8:1-13, 눅 5:27-32

설교문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2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강단에서 많은 목사와 신부님들이 외친 구호 중에 하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였습니다. 이런 구호를 강조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사도행전 2장 44절부터 47절에서 묘사하는 교회에 대한 증언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만약에 오늘날도 처음 교회처럼 믿는 사람들끼리 유무상통(有無相通)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그리로 몰려들 것입니다.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서 25명의 교인으로 시작해 20년 만에 40만 명으로 성장한 교회가 있습니다. 인도 중남부의 하이데라바드 지역에 있는 갈보리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교인이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보여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이고, 이 교회 담임목사인 쿠마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모든 순간을 예수가 사신 것처럼 살아갈 때 교회가 부흥한다."고 말합니다.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28334324)

갈보리 교회의 사역을 보니, 일요일마다 50,000명에게 아침, 점심, 저녁을 무료로 제공하고, 교회에 오면 무료 진료를 받고, 싼값에 약도 처방받을 수 있고, 교인들은 교회를 통해 모든 장례 절차와 장례 식사 비용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28334324)

인류에 대한 봉사가 하나님에 대한 봉사라는 신념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베풀어지는 사역들이 그렇게 교회를 부흥시켰던 것이지요. 사도행전에서 증언하는 당시 교회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처럼 처음 교회에서도 사도들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으로 예물을 바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구제할 때 소홀히 여겨지는 이들이 있었고, 이밖에 숱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쓴 편지들은 모두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서신서인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가 그러합니다.

바울 사도는 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 1년 반 동안 체류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이 교회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전에 보낸 첫 편지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답장을 하면서 알게 된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답변을 한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교회에 엄청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 교회 안에는 경쟁적인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1:10-4:21). 창립자인 바울편에 선 사람과 이후 목회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아볼로 편에 선 사람들이 있고, 이 두 파 사이에서 갈등이 있자, 가장 먼저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의 첫 수장인 베드로를 모셔다가 이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또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교회 안의 어떤 남성 교인은 자기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동거를 했으며(5장), 교인들끼리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고(6:1-11), 몸을 파는 여인과 동침하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고 선전하는 일(6:12-20)마저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일상생활, 성령의 은사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일일이 답을 합니다.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쓴 다양한 교회들의 상황을 보면 초대교회에도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갈등이 있고, 다양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고린도는 항구도시로 편리한 해상교통을 기반으로 하여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이 도시가 경제적으로 풍성해지자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이 몰려들었고, 또 여러 종교도 이곳에 정착하게 됩니다.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는 고린도의 개방적 분위기는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새롭게 생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에 어려움을 겪게도 하였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갖가지 신들을 숭배하던 고린도 사람들은 가축을 도살하거나 하면 으레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바쳤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고, 고기를 사서 먹으려면 이런 의식을 거치지 않은 고기를 사기는 어려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 문제를 놓고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부류는 고기를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부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기 때문에 그밖에 다른 신들은 진짜 신들이 아니므로, 이방인들이 고기를 다른 신들에게 바쳤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엄격한 의미에서 진정한 신이 아니므로 그 신에게 바친 고기라는 것도 일반 고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쪽에는 여전히 이방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을 거리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 신에게 바친 고기를 먹으면 마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배반하는 것과 같은 느낌과 인식을 가지고 양심에 가책이 되었던 교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교인들에게는 술 문제가 위와 매우 비슷합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당시 많은 선교사가 자신들의 청교도적인 배경에 따라 금욕적인 생각을 가지고 한국의 교인들이 술을 먹지 말 것을 강조했고, 그래서 교인은 술을 먹지 않는다는 생각이 초기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그런 것이지,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술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존하고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국가로 오늘날 세계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의 경우, 그리스도인들도 누구나 맥주를 마시며 즐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가톨릭은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마느냐에 술을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커피를 많이 마시고, 우리 교인들도 식사하고 나서 모두 자연스럽게 커피 한잔을 하는데, 술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기호식품으로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알콜 중독으로 몸과 정신건강을 해치거나, 취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이것과 별개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술을 먹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신의 믿음에 큰 탈이 나는 것처럼 느끼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기준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부목사님이 하셨던 설교 중에 아주 인상 깊은 예화가 있어서 여러분에게 들려 드릴까 합니다.

19세기 미국의 대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무디(D.L Moody)가 영국에 집회를 갔다 생긴 일입니다. 무디는 부흥집회를 위해 영국에 방문했다가 자신이 평소에 깊이 존경하던 찰스 스펄전 목사를(C. H. Spurgeon)을 뵙고 싶어 그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자 그토록 존경하던 스펄전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스펄전의 첫 모습을 본 무디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존경하던 목사의 입에 파이프 담배가 물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디는 깜짝 놀라 "아니,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담배를 피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뚱뚱한 무디의 뱃살을 쿡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배가 나와서 되겠습니까?"

이 예화를 들려준 부목사님은 이런 말로 예화의 의미를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리처드 백스터, 개혁된 목사> 보여주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는 음식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놓고, 또 무엇은 먹으면 안 되고, 무엇은 먹어야 되고 하는 문제가 신앙의 문제로 다뤄지는 것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 14:17)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보다는 올바르게 살아가는가, 모든 사람과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가, 기쁨이 있는가, 형제자매를 사랑으로 대하는가,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가,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알며, 늘 기도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지식보다는 사랑]

오늘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원칙적인 대답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유롭게 사는 교인들이 여전히 고기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다른 교인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지식은 불필요한 여러 가지 종교적 제도나 관습에서 온 굴레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참된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성숙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한참 모자란 지식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빠진 지식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향린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우리는 성서 공부를 비롯해서 2000년이 넘도록 가르쳐 온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공부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겪어보아서, 몸소 체험하여 안다는 것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앎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안다면서 사랑할 줄 모르면 그것은 절반의 앎이고 사실은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은 자를 찾아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오십니다. 일부러 그를 찾아가 제자로 불러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듯이, 진정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은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평소에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온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노와 서러움,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입에서는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관심을 받기 위해 과도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술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우상에게 바쳤던 제사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사람도 사랑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에 목마른 사람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참 쉽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혹시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 있나요? 아니면 낚시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 있나요? 낚시하러 가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일까요? 엄청난 크기의 고기를 낚았을 때, 즉 월척을 낚았을 때 가장 기쁠까요? 물론 그때도 기쁘죠. 그런데 낚시하는 사람들이 가장 기쁠 때는 이럴 때랍니다. 나는 한 마리도 못 잡는데 옆 사람은 계속 잡는 거예요. 한참 속상해서 있는데 옆 사람이 아주 큰 월척을 낚아서 물고기 담는 망에 집어넣다가 잘못해서 그 고기를 놓쳤을 때 그때가 가장 기쁘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야릇한 마음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심도 있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권력욕도 있습니다. 남이 실수하고 잘못하면 그게 그렇게 재밌고 신나기도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고것 참 잘 되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남들이 기댈 수 있도록 내 어깨를 내 주기보다는 내가 기댈 곳은 어딘가를 먼저 찾는 것이 우리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이 만약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들 또한 레위가 베푼 잔치에서 상당히 기쁘고 신나는 시간을 보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으로 상대를 비난하는데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시 한 구절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조선후기의 이양연이라는 사람의 <백로(白鷺)>라는 시입니다.

도롱이옷 풀빛과 뒤섞여 있어 蓑衣混草色

백로가 시냇가로 내려앉았네. 白鷺下溪止

놀라서 날아갈까 염려가 되어 或恐驚飛去

일어날까 다시금 가만있었지. 欲起還不起

비가 올 때 비를 피하려고 몸에 걸치는 도롱이를 쓴 농부가 있었습니다. 도롱이를 입은 농부가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호미를 씻고 손발에 묻은 흙을 닦아내려고 냇가에서 고개를 숙이는데, 해오라기 한 마리가 도롱이를 풀 더미로 알고 그 곁에 내려앉습니다. 농부는 난처해집니다. 일어서자니 백로가 놀라겠고, 그대로 있자니 저 녀석은 아예 마음을 턱 놓고 몇 시간이고 버틸 기세였거든요. 일어설까? 농부는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농부는 살포시 앉습니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도롱이도 빗물에 젖어 갑니다. 마침내 자옥한 안개 속에 백로도 도롱이도 흐릿하게 지워져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우리는 이 시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이 농부와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백로가 놀랄까봐 일어서지 못하는 마음! 아픈 사람을 보면 치유해 주고 싶은 마음, 부족한 사람을 보면 채워주고 싶은 마음,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싶은 마음들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육에 속한 것들을 없애고, 하나님 주신 바로 이런 사랑스러운 마음들을 키우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단점을 보면서 힐난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상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바울 사도께서 제안한 대로 우리의 자유가 조금 제한되더라도 사랑을 위해 서로를 돌본다면 우리는 훨씬 더 아름답고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자유가 우리에게 허락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본문은 보리를 거두기 시작한 지 7주 뒤에 지키는 칠칠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명절의 기쁨은 모두가 나눠야 합니다. 추수를 하는 주인과 주인의 아들딸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 떠돌이, 고아와 과부에 이르기까지 추수의 기쁨과 곡식은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을 연습하는 곳이고, 서로 돌보는 훈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키우는 곳입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어 내 한 몸 먹고 살면서 내 삶을 추스르기에도 바쁘다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읽으셨는지 모르겠는데 "만일 세상이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이고 그러나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 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있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소유한 자는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1명은 대학 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해 다치거나 죽고 무장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은 20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자, 지금 여러분의 지갑에 돈이 있나요?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100명 중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부유한 삶을 살면서 늘 불평불만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말도 못하고 이유 없이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세상에서 살지 않게 된 것은 바로 누군가의 희생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여러분은 은혜도 모르고 교만하며 남보다 훨씬 부유하면서도 불평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1992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행사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에콰도르의 한 원주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1492년부너 정복과 500년의 식민과정 속에서, 성경, 종교, 복음화, 그리스도교 문명은 우리 문화 정체성을 파괴하고 지배하려는 목적에 이용당해 정치적, 이념적 도구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스페인 사람, 포르투칼 사람, 네널란드 사람 사이에 협의도 없었고, 토착민의 동의도 없었다. 따라서 500년간의 문화적 침략 과정은 대학살, 종족 말살, 영토의 약탈, 부의 침탈, 착취, 굴종을 의미했다."

지금 세상은 무한 경쟁 시대라고 하면서 여러분에게 경쟁 상대가 누구인지 찾게 하고 그 상대를 이기기 위해 스펙을 쌓고 실력을 갖추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능력에 달려 있다고,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우리를 세뇌합니다. 한편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정치적 이념적 도구로 사용하면서 폭력과 혐오를 발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종교가 덕을 세우는 사랑으로 작동하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탓하고 불평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지는 않는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떠맡기고 자기는 다른 욕망에 충실한 것은 아닌가? 나만을 생각하기에 너랑 싸우면서, 우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자유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믿음의 식구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진실로 지식보다는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안다고 할 때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분명하고 확실한 것 같을 때 한 번 더 의심하십시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들었는가를 살피십시오.

무엇보다 사랑의 능력을 키우고, 공동체에 덕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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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