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선한 싸움"

2025년 11월 9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49:11-13, 디모데전서 6:11-12, 마태복음 5:4

설교문

얼마 전 가수 조용필 씨가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단독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2만 명 가까운 관객이 모였고, 올해 75세가 된 조용필 씨는 게스트 하나 없이 150분 동안 30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해당 방송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저도 그 방송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막 울더군요. 2030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5060 저와 비슷한 세대도 울었습니다. 보고 있던 저도 눈물 났습니다. 오랜만에 모두 하나 된 느낌이었습니다. 어릴 적 교회에서 착실하게 자란 저는 대중가요와는 담 쌓고 살았는데, 조용필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인생의 이야기와 위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 노래에서 큰 위로를 얻고 있었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예레미야 8:18) 오래전 예레미야 선지자의 노래이지요. 이 노래가 지금 마음이 힘들고 아픈 이 나라 백성의 노래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용필 씨의 많은 노래 가운데서 저는 김순곤 작사, 김정옥 작곡의 <바람의 노래>를 가장 좋아합니다.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돕니다. 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들 이 노래가 나오면 모두 자기 이야기 같다고 눈물부터 훔칩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람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 꽃이 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꽃은 왜 질까요? 세월이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요? 살아보니 인생이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더군요. 잠시 스쳐가는 인연도 있지만 지금도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인연과 그리움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는 것은 있습니다. 내 앞에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이제까지도 내 인생은 수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을 걸어왔지만, 내 앞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우리는 그것들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인생의 진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진실을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이 보입니다. 그것이 이 노래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노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들려줍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기쁨을 사랑합니다. 슬픔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만남을 사랑합니다. 이별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사랑합니다. 실패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평안의 시간을 사랑합니다. 고뇌의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라고 노래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라면, 거기에는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도, 만남만이 아니라 이별도,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도, 평화로운 시간만이 아니라 고뇌의 시간도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랑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집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사랑합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니까 사랑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니까, 또 평화롭게 하니까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약합니다. 슬픔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 이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 실패와 고뇌의 시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슬픔과 이별과 실패와 고뇌를 이겨낼 수 없는 약한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7)라고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요즘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슬픔'에 대해서 무지한가를 깨닫습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평온한 일상을 산산조각으로 만드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주위에 숨이 멎을 것 같은 깊은 상실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거야!'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거야, 얼른 받아들이고 훌훌 털고 일어나야지!' 위로랍시고 건넨 만들이지만 사실은 슬픔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들이었습니다. 정신력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슬픔을 거부하는 우리의 문화가 사실 너무 슬픕니다. 슬픔은 극복하는 게 아닙니다. 슬픔은 보듬는 것입니다. 슬픔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닙니다. 안고 가야 하는 인생의 경험입니다. 슬픔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슬픔은 없애려 하기 보다는 보듬어야 합니다. 비켜가기보다는 두 팔로 안아야 합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세상에는 고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인생은 그것들을 안고 가야 합니다.

이별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이별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제 인생도 돌아보니 큰 이별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어떤 아픈 이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가올 이별이 아프지 않으려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 이별 후의 가장 큰 슬픔은 그리움이지요. 잊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의 큰 아픔입니다. 그래도 살면서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건 나름 풍요로운 삶일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면 그리 견디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살면 살아지는 게 인생 아닙니까. 공석진 시인의 <슬픔은 슬픔으로>를 읽어봅니다.

"열은 열로 다스리듯 / 가슴 아픈 사랑은 / 사랑으로 이겨내야 한다 // 수족관의 물을 / 물로 씻어내듯 / 갇힌 물고기의 상심은 / 상심으로 위로해야 한다 // 슬픔은 / 슬픔으로 씻어낼 때 / 상처는 회복되는 법 // 눈물을 흘릴 때에 / 같이 울어야 할 슬픔을 / 무심히라도 / 외면하지 마라."

슬픔은 톡톡 잘려 나가는 손톱처럼 딱 부러지게 잘라낼 수 없습니다. 슬픔은 미지근한 물에 맨밥 말아 후루룩 먹듯 쉽게 삼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까? "슬픔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 절망의 늪으로 / 더욱 깊이 빠뜨리는 법 // 극한의 슬픔에 녹아들어 / 그 슬픔과 어우러져 / 더 큰 슬픔이 되어라 // 오는 슬픔이 작게 느껴지도록 / 슬픔이 산재한 세상에 / 가장 슬픈 슬픔이 되어라."(공석진, <슬픔을 이기는 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오셔서 '가장 슬픈 슬픔'이 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에 녹아들어 그 슬픔과 어우러져 '더 큰 슬픔'이 되신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成肉食, incarnation)의 신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이사야 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이사야 53:5)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우리의 슬픔도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이별도, 우리의 실패도, 그리고 우리의 고뇌의 시간도 사랑하신 분입니다. 아니 슬픔과 이별과 실패와 고뇌 속에 무너진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는 그렇게 우리의 '더 큰 슬픔'이 되어 우리의 슬픔을 보듬어주셨습니다. 슬픔이 산재한 세상에서 그는 우리의 '가장 슬픈 슬픔'이 되어 모든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 5:4) '애통'(哀痛)이 무엇입니까? 팔복(八福) 가운데 두 번째 복인 애통하는 자의 복은 어떤 복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헬라어 pentheo)은 단순히 '슬퍼하다'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가장 깊은 비통(悲痛), 내면을 찢는 슬픔을 뜻합니다. 성서 전체에서 이 단어는 주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의 절절한 애도(哀悼)에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애통은 단순한 우울이나 한숨이 아닙니다.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슬픔입니다.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통곡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위로(헬라어 parakaleo)는 '곁에서 부드럽게 불러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 곁으로 다가오셔서 그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위로하신다는 뜻입니다. '괜찮다, 내가 안다, 네가 흘린 그 눈물을 내가 본다!' 여러분, 이 위로는 상황이 바뀌는 위로는 아닙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위로입니다. 눈물은 멈추지 않지만, 지금 내 곁에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심으로 받는 위로입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자가 받은 복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통곡하셨고(누가복음 19:41), 친구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요한복음 11:35) 그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연약함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이별과 실패와 고뇌를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하루 종일 바보같이 웃고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임하라는 말씀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좋은 일이 생길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곧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사업이나 일이 성공적일 때만 감사하지 말고 실패와 좌절의 겪을 때에도, 곧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성서의 신앙은 적극적인 신앙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슬픔을 더 큰 슬픔으로, 이별을 더 아픈 이별로, 실패를 더 모진 실패로, 그리고 고뇌를 더 깊은 고뇌로 보듬어 이기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되십시오. 이별보다 더 아픈 이별이 되십시오. 실패보다 더 모진 실패가 되십시오. 생의 가장 깊은 고뇌로 모든 고뇌를 품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는 이런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기쁨만 아니라 / 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 / 희망만 아니라 / 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 / 가진 것만 아니라 / 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 / 승리만 아니라 / 패배도 감사하겠습니다. / 건강만 아니라 / 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 / 불붙고 맞아서 제구실하는 / 대장간 쇠붙이를 저는 압니다."(차옥혜, <기도 2>)

혹 요즘 슬프고 외롭고 아파서 잠 못 이루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 때에 /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 나보다 더 슬픈 /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 마음의 상처가 짓누를 때에 /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 나보다 더 아픈 /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 사는 것이 문득 외로워질 때에 / 꿈꾸는 일조차 힘겨울 때에 /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하여 / 기도하세요 //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 눈물로 지새는 이를 위하여 /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 한 사람을 위하여 // 기도는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 신비로운 끈, 누군가의 / 온기가 느껴지네요 // 마음에 한없이 찬비 내릴 때 / 두 손을 모아 기도하세요 / 내 영혼 슬픔은 희미해지고 / 기쁨이 나를 채울 거예요."(홍수희, <기도하세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력을 보니 11월입니다. 11월은 특별한 기념일, 그러니까 놀 수 있는 공휴일도 없는 달입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기 전이어서 난방도 잘 안 해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입니다. 10월과 12월 사이에 엉거주춤 낀 심란하고 어수선한 달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11월은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 버리기에는 차마 가까운 시간"(나태주 시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십일월은 사랑하겠다고 덤빈 시인이 있습니다. "십일월을 사랑하리 / 곡물이 떠난 전답과 배추가 떠난 텃밭과 / 과일이 떠난 과수원은 불쑥 불쑥 늙어가리 / 산은 쇄골을 드러내고 강물은 여위어 가리 / 마당가 지푸라기가 얼고 새벽 들판 살얼음에 / 별이 반짝이고 문득 추억처럼 / 첫눈이 찾아와 눈시울을 적시리 / 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월을 나는 사랑하리"(이재무, <십일월> - 오늘의 공동 기도문)

추수를 마친 전답과 텃밭과 과수원은 황량할 겁니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니 산은 앙상한 쇄골을 드러내고 수량이 줄어드니 강물이 여위어 보입니다. 이렇게 쓸쓸하고 적막한 11월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계절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시간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산과 들을 덮고 있던 푸른 것들을 다 걷어내니 그 안에 감추어 있던 우리의 슬픔과 눈물과 좌절과 고뇌가 하늘 아래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숨길 수도 없는 그 절명의 시간에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해질 수 있기에 그런 11월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원을 나는 사랑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좋아요'(like)가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그런 좋아함을 넘어서 이 상태를 품겠다는 깊고 푸른 의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디모데전서 6:11-12) 바울은 신앙을 '여정'이라 '수양'이 아니라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Fight the good fight of faith)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은 수동적인 평안이 아니라 능동적인 저항과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한 싸움'(ἀγωνᾶ τοῦ καλοῦ, agon tou kalou)입니까? '선한'은 단지 '착한'이 '아름답고, 고결하고, 가치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싸움은 가치 있는 싸움입니다. 인생이라는 싸움은 아름답고 고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의 무기는 칼이나 힘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닙니다. 내 안의 슬픔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려는 싸움입니다. 세상과 등지는 싸움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싸움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싸워볼만한 가치가 있는 고결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그 끝에 영생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제까지 보다 더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음을 압니다. 누구도 그것들을 비켜갈 수 없음을 압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십시오. 가슴 아픈 사랑은 사랑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상심은 더 깊은 상심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씻어낼 때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애통하십시오.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되십시오. 슬픔에 녹아들어 그것과 어우러져 더 깊은 슬픔이 되십시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슬픔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합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이사야 49:13) 기뻐하십시오.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곁에서 부드럽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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