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삶의 끝에 서면"

2025년 11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전도서 3:10-13, 데살로니가전서 5:1-2, 16-18, 요한복음 5:24

설교문

오늘은 창조절의 마지막 주일이자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날을 '영원주일'로 지킵니다. 영원주일이란 우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에게도 찾아올 죽음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그려보는 날입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 자기의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는 /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숨어 있었습니다. // 아름다움의 발견에 차츰 무디어가는 / 내 마음을 위해서도 / 오늘은 맑게 울어야겠습니다."(이해인, <재의 수요일 아침에 - 사순절>)

오늘은 우는 날입니다. 맑게 우는 날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고마움을 모른다고 하지요. 보석도, 친구도, 사랑도, 심지어 생명도 길들어지면 고맙다는 느낌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삶의 끝에 서면"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죽음 앞에 서야 생명이 보입니다. 영원 앞에 서야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의 성가가 있습니다. 잔잔히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하늘을 볼 겨를도 없이 / 정신없이 세상을 살다가 / 마음의 먹먹함이 내 삶을 짓누를 때 /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 행복을 느낄 겨를도 없이 / 분주하게 세상을 살다가 / 인생의 허무함이 내 삶을 짓누를 때 /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서 /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는데 / 부족한 내 영혼은 아직도 갈길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영원 안에 계시며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는데, 시간 안에서 찰나의 행복을 탐닉하며 사는 우리들은 내 행복이 영원하지 않음을 느낄 때, 내 인생의 허무함이 어깨를 짓누를 때, 그때가 되어서야,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잊으며 살아갑니다.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끝내 아무 준비 없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반드시 시들고 말라버리고야 맙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 평등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떠날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건 슬픈 일입니다. 내가 결국 잊혀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떠나야 할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도 마음 아픈 일입니다.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앞에서 존재가 무너지는 존재, 그가 인간입니다. "너 내게서 떠나는 날 / 꽃이 피는 날이었으면 좋겠네 / 꽃 가운데서도 목련꽃 / 하늘과 땅 위에 새하얀 꽃등 / 밝히듯 피어오른 그런 / 봄날이었으면 좋겠네 // 너 내게서 떠나는 날 / 나 울지 않았으면 좋겠네 / 잘 갔다 오라고 다녀오라고 / 하루치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 / 가볍게 손 흔들 듯 그렇게 / 떠나보냈으면 좋겠네 // 그렇다 해도 정말 / 마음속에서는 너도 모르게 / 꽃이 지고 있겠지 / 새하얀 목련꽃 흐득흐득 / 울음 삼키듯 땅바닥으로 / 떨어져 내려앉겠지."(나태주, <목련꽃 낙화>) 시인의 노래처럼, 인간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그냥 우는 존재입니다.

언젠가 어떤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제목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중에 한마디 대사는 기억에 남았습니다.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살림도 어려운 한 미혼모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천재였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일곱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하고 먼 곳에 있는 영재 학교로 보냅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들과 작별하며 엄마는 이렇게 인사합니다. "그래, 내일 보자."(See you tomorrow.) 평상시 하룻밤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아들을 배웅하듯이 엄마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이와 헤어지는 쓰라림을 위로하기 위해서였겠지요. 하지만 영화 속 그 대사가 저에게 그렇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See you tomorrow) 정말로 '내일'과 같이 짧은 시간 후에 사랑하는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헤어지는 마음은 덜 아플 것 같습니다. 우리도 서로 이렇게 인사하며 헤어질 수 있을까요.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벗을 위한 레퀴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연습할 것은 하나뿐, 서로를 놓아주는 것이다. 서로를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라, 굳이 배울 필요가 없으니." 이별연습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별 앞에서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사랑하는 이를 온전히 놓아주는 법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을 간직한 채 그이를 놓아주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비록 생살을 찢는 것만 같은 아픔이지만, 그 아픈 사랑을 간직한 채 사랑했던 사람을 놓아주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서로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지 우리는 이런 이별을 연습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 사랑했기에, 온 힘을 다해 놓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별마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떠나가는 제 이름을 / 부르지 마십시오 / 이별은 / 그냥 이별인 게 좋습니다 // 남은 정 때문에 / 주저앉지 않고 / 갈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 그리움도 / 너무 깊으면 병이 되듯이 / 너무 많은 눈물은 /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됩니다 // 차고 맑은 호수처럼 / 미련 없이 잎을 버린 / 깨끗한 겨울나무처럼 / 그렇게 이별하는 연습이 / 우리에겐 필요합니다"(이해인, <이별노래>) 어느 시인의 '이별노래'입니다.

"우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죽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로마서 14:8-9)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신다 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산 자만의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이렇듯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사망(死亡), 곧 '죽어서 망함'이 아니라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입니다. 스콧 니어링의 말입니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죽음은 '존재의 다른 형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 안에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한 공간 안에 있어야만 관계가 성립하는 건 아닙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8)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눈으로 볼 수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형태로 옮겨가 나와 더욱 깊은 관계 안에 있게 합니다. 영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과 허무가 아니라 존재가 서로 다른 형태로 영원한 관계를 시작하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공원묘지 입구의 커다란 바윗돌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나 그대 믿고 떠나리." 누가 한 말인지,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밑도 끝도 없이 커다란 검정색 붓글씨체로 쓴 그 말이 처음에는 촌스럽고 투박하다가 문득 그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나 그대 믿고 떠나리."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치고 떠날 때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는 건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자기들이 이 땅에서 못 다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 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 남은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 바로 그 믿음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나태주)의 <쪽지글>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나 죽으면 울어줄 사람 위하여 / 이 쪽지를 남긴다 // 나 죽어도 오래 잊지 않을 사람 위하여 / 마음을 담는다 // 너를 만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일 / 널 사랑해서 고마웠고 행복했다 // 나 없는 세상에서라도 너무 / 힘들어 하지는 말아야 // 예쁘게 잘 살아라 / 하늘에서 내려다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이제는 보내드리십시오. 사랑의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고, 문을 닫으십시오. 그분은 지금 천국에서 행복하십니다. 천국에서 예수님 손잡고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잊으라는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육체의 존재에 연연하지 말고, 미약한 인간의 시간 개념을 넘어, 영원이신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신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그를 기억하고 더욱 깊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할 때 우리에게 그 아픔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잠시 동안의 이별이라는 성서의 소망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3-18) 이것이 신약성서 전체에서 가장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 곧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위로와 소망의 서신입니다. 우리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내던 그 엄마처럼 "그래, 내일 보자"(See you tomorrow)라고 인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로 서로를 위로해야 합니다.

"형제[자매]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데살로니가전서 5:1-2) 바울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주의 날'은 종말의 날입니다. '주의 날'은 내 생의 마지막 날입니다. 바울은 그날이 밤에 도둑 같이 온다고 일러줍니다. 그것을 우리 자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권면합니다. 우리 귀에 너무도 익숙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매우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주의 날'을 앞둔 모든 이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더 많이 돈을 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인생의 끝에 서면 가장 후회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생은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다는 것을 삶의 끝에 서서야 뒤늦게 깨닫는 것이 너무 후회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지금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돌보며 용서하며 하십시오. "삶의 끝에 서면 /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 너희는 행복했는가? / 다정했는가? / 자상했는가? // 남들을 보살피고 이해했는가? /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쇠렌 키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그렇습니다. "목숨까지 떨어지기 전 /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 그것만이 중요[합니다]."(이해인, <송년엽서>) 성서가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7-8)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브리서 9:27)이나,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죽음 앞에서 영원을 바라봅니다. '시간 안'에서 '시간 밖'을 바라봅니다. 유한이 무한을 바라봅니다. 필멸인 존재가 영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삶의 끝에서 영생을 바라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편 62:1)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과, 나의 기쁨과, 나의 구원과, 나의 평화가 오직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간 이들을 영원한 안식과 평화 속에 고이 품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간 분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따뜻하게 품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사랑했기에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놓아주며, 오늘 하루도 선물로 주신 귀한 삶을 내 삶의 자리에서 다시 힘을 내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서로 돌보며 살기로 다짐하는 모든 교우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참 위로와 평화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이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이"(시편 92:1)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글/기사가 도움이 되셨다면 베리타스 정기구독 회원이 되어 주세요. 회원가입 방법은 하단 배너를 참조하세요. 감사합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