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고"

2025년 12월 7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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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민 11:1-10, 고전 3:1-9, 눅 13:6-9)

설교문

[2025년 마지막 달을 맞이하며]

교회력으로는 대림절이라 이미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세상 달력으로는 2025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여러분의 2025년 한 해는 어떠하셨습니까? 계획하신 일들, 가족을 비롯하여 주변 지인들과의 관계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 모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뭔가 아쉽나요? 만약 아쉬움이 남는다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부족하다고 느낀 것들을 좀 더 보충할 수 있을까요?

혹시 여러분 중에 새해 주일인 1월 5일 설교를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사실 저도 전체를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설교의 마지막은 기억합니다. 왜냐면 제가 여러분에게 제안했던 자기 성찰 질문을 제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에게 드린 물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밝은가? 나는 맑은가? 나는 넓은가? 나는 깊은가? 나는 지금 기쁜가? 나는 얼마나 굳센가? 나는 얼마나 공정한가? 나는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얼마나 평화로우며 조화로운가? 나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나는 좁은 길을 택하는가? 나는 고통 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만을 인하여 즐거워하는가? 나는 진정 사람다운가?"

여러분! 올 한 해 주님 앞에서, 그리고 믿음의 동지들 앞에서,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그리고 자기 마음에 비추어 얼마나 밝고 맑고 넓고 깊고 굳세었는지요? 여러분의 일상은 얼마나 기쁘고 평화로우며 조화롭고 따듯하셨는지요? 올해 얼마나 사랑하고 지혜로웠는지, 좁고 험한 길인 줄 알면서 택하고,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했는지요? 진정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면서,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었는지요? 한 해를 마감하며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는 질문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1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을까요? 우리 역사는 한 해 동안 얼마나 성숙했을까요? 2024년 말 교수들이 뽑은 지난해의 사자성어는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뛴다'는 뜻의 '도량발호(跳梁跋扈)'였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자기 기득권을 지키고 누리기 위해 전쟁마저 일으키려고 했던 무리가 마구 날뛰던 세상에서 지금은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요? 비상 계엄은 막아냈고, 새로운 정부도 들어섰지만, 지난 겨울 외쳤던 사회대개혁의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교수들은 올해를 어떤 사자성어로 또 표현할까요?

한편 우리 향린교회의 2025년은 또 어떤 해였을까요? 그리고 이 남은 한 달을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까요? 올해의 경험을 발판으로 삼고, 지금 우리의 모습을 진단하여 새로운 한 해를 잘 맞이하려면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향린의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룬 것과 앞으로 더 갖추어야 할 부분들을 한번 나눠보고자 합니다. 워낙 많고 다양한 사역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지기 때문에, 세세하게 모든 것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굵직한 목회 활동과 선교 영역들을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향린의 2025년]

올해 우리 교회가 실행한 다양한 사역 중에 가장 애썼다고 자타가 평가할 만한 것은, 역시 내란 극복 과정에서 했던 역할이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우리 교회에서 발족했던 것처럼,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라는 민주시민들의 연합조직이 우리 교회를 터로 삼아 모든 회의를 하고 빛의 혁명을 이끌었고, 우리 또한 광화문 한복판에서 시민사회와 더불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 한몫했습니다. 사회부가 앞장섰고 온 교우가 함께했으며, 덕분에 전광훈, 손현보와 같은 극우 개신교인들로 인해 추락한 한국 개신교의 위상을 그나마 지켜냈습니다. 탄핵 커피와 민주 꽈배기 과자를 나눠주고, 향린 깃발을 높이 들고, 향린 쉼터 운영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탄핵 떡을 나누며, 피켓 시위와 현장 예배 및 거리 기도회에 참여하신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켜냈기에, 지난 수요일에 새날 청년회가 1년 연기한 수요 평화 거리기도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거둔 열매는 들녘교회와의 도시농촌 선교협력 30주년과 국악선교회 예향의 30주년 행사였습니다. 오늘 오후에 도농선교협력 30주년 좌담회도 있지만, 지난 30년간 향린과 들녘이 함께 걸어온 길은 우리 교단과 한국 사회에 새로운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우리가 더 집중해야 할 생태적 전환과 기후 위기 시대의 선교와 목회를 앞서서 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향의 30주년을 맞아 진행한 연속 설교와 특별 예배, 예향의 토크 콘서트는 전 세계로 뻗어가는 K-문화의 한 축으로 우리 가락 예배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사역들은 1-2년 만에 이룬 것이 아니고, 한 세대에 걸쳐 지속한 것이라 대단히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는 올해 세 분의 장로와 세 분의 목사를 안수하여 교회의 지도력을 세웠습니다. 직원의 변동도 있었고, 교육부 파트타임 교역자들도 새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58명의 새 교우가 등록하셨고, 주일 예배 출석도 지난해에 비해 50명 정도가 많은 170에서 180명이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배하시는 분들이 80에서 90명 정도가 되시고, 향린교회 유튜브 구독자도 2,300명이 넘었습니다. 미래선교위원회 사업으로 국악찬송가 개정판을 발행하였고, 생태문화학교를 성황리에 이어가며, 진보신학선교팀의 캡사이신학도 구독자 1,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우리 교회 60주년 숙원 사업이었던 사회선교센타 길목은 사회적협동조합의 모습으로 든든히 서서, 매우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고, 안병무 도서관도 각종 인문학 강좌, 한강 읽기 등 자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각종 소모임과 신도회와 부서 위원회의 활동들이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어서, 그것들을 일일이 언급하기에도 벅찹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향린교회는 마치 풍성하게 차려진 밥상처럼 교인으로 등록하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너무나 신나고 즐겁게 그리고 뜻깊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린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실 우리 교회의 창립 정신이기도 한 평신도 교회의 모토를 지키면서 스스로 나서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활동하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 해 동안 애쓰고 수고하신 모든 손길에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 개신교는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이 없어 개신교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위기다, 위기다" 말들은 많지만, '성경의 문자적 읽기', '교리에 대한 맹목적 확신', '삼박자 구원식의 맘몬이즘과 욕망에 물든 이기주의', '권력에 기웃거리며 극우정치와 야합'하는 것은 여전합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도덕적 삶은 전혀 보이지 않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가득합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다른 종교와 이웃들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혐오를 일삼는 일들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더 이상 개신교에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체가 수축 사회로 접어들어 더 이상 과거의 성장이나 번영은 꿈꾸기 어려운 이때, 개신교의 쇠락 현상이 사회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한 걸음 전진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이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흔히 일반교회에서 송년 주일에 많이 언급되는 구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 맺기를 3년이나 기다렸는데, 열매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포도원 지기를 시켜 아예 찍어 버리라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가 한 번 더 부탁을 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도 주님께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더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면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영역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를 보면 주인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 3년이나 기다립니다. 포도원에 포도가 아니라 무화과를 심었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지요. 포도 대신 심은 것이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3년이나 기다렸으니 그만큼 애타는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찍어 버리고 아예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포도원 지기가 부탁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포도원 지기의 심정이 우리 향린교회의 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을 심으셨을 때는 뜻이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한때 부흥했다고 교만하게 된 교회들이 온갖 부패와 불의의 한 패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찍어 버려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가 들려옵니다. 그럴 때 나서는 포도원 지기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파야 하는 둘레, 그리고 우리가 주어야 하는 거름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신앙인인 우리 자신의 성숙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민수기의 말씀은 광야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광야로 나선 지 3일이 되었고,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준 만나를 먹은 지 1년이 되자, 출애굽한 백성들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던 이들로부터 불평이 시작됩니다. 즉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 있어, 자유의 하나님이 낯선 이들로부터 모든 불평이 시작되고, 그것이 바로 모세에게 큰 걱정거리가 된다는 것을 오늘 성서 본문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서가 드러내는 출애굽의 과정은 양면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출애굽 역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기적을 베푸시고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적들이 백성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백성 스스로가 해방 과정과 자유에 길에 기여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외부의 원인, 곧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노력으로 그 자유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를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데,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지니는 궁극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녹아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 제국 애굽과는 정반대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곧 힘의 지배가 아니라 정의가 승리하고,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게 다뤄지며, 모든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약의 동반자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에서 실행 가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인간의 결점과 잘못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출애굽한 백성은 변덕스럽고 근시안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불평하며, 쉽게 절망합니다. 오늘 민수기 본문이 그것을 잘 드러냅니다.

계엄을 극복하고 새로 태어난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와 정반대되는 사회를 상상할 것입니다. 아마도 정치 검찰이나 권력에 눈먼 사법부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소년공 출신의 대통령이 서민과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그런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 되려면 자유를 끊임없이 쟁취하여 유지하는 시민, 노동자, 농어민의 힘이 작동해야 합니다. 광장을 잃어서는 안되고, 작은 실패들에 실망하여 멈춰서도 안 됩니다. 지난 민주 정부의 실수를 거울삼아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불법과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지닌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우리 향린교회가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존의 권력에 영합하거나, 자기 욕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내는 일,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본문에서 광야에 나온 이들은 만나가 선물이었다는 것을 새카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국의 떡고물에 마음이 갑니다. 노예로 사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본의 노예로 살고자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는 그런 유혹에 끊임없이 넘어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실패와 시련 속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신나고 즐겁고 멋진 목회와 선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책임지면서 손발로 봉사하는 행위가 먼저여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남들의 수고에 숟가락만 얹어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 밥을 지을 줄 알고, 사람을 불러 모아 먹일 능력을 우리 모두가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가장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씀도 잘 모르고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 없는 사역은 자본주의의 방식, 개인의 아집과 욕망이 끼어들기 딱 좋습니다. 말씀이 삶으로 녹아들지 않으면 사탄에게 빌미를 주고, 목회와 선교가 갈등과 반목, 분열과 다툼의 장으로 변질되게 합니다. 교회의 사역은 사람의 생각, 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거룩한 영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 때 두 번째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 보면, 서로 마음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지향점, 일하는 방식, 성격, 사역을 하면서 오가는 대화 등,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헌신하고 수고할 때의 방식은 너무나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러한 차이가 서로 보완되어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니 내가 하고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하지만, 궁극적으로 선한 길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역설적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는 그것에 실패했습니다. 공동체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주도권 갈등이 일어나, 교인들은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가 나뉘고 말았습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패거리 문화가 생기는 순간, 합리적 판단과 주의 깊은 경청, 숙고하는 사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누군가 좋은 의견을 낸다고 하여도, 그 말과 뜻을 잘 듣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교인은 누구 편이야?"라는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괜찮은 이야기가 나와도 바울파는 아볼로파가 말했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반드시 자기가 해야만 된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매우 교만한 것인데, 본인들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파에 속한 이들의 도덕적 흠집과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들춰내면서 헐뜯기 바쁩니다. 이것이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갈등을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마는 어리석은 행동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게 되는 이유도 가만 보면 하나님의 거대한 그림을 보지 않고, 자기만을 바라보는 것, 우리 모두가 그저 하나님의 붙들린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함석헌 선생이 쓴 "열두 바구니"라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골리앗을 때려 넘겼기로서 조약돌을 비단에 싸서 제단에 둘 거야 없지 않은가? 위대한 것은 다윗이지 돌이 아니다. 그것쯤은 다 알면서 다윗이 또 하나님의 손이 역사의 냇가에서 되는 대로 주워 든 한 개 조약돌임을 왜 모르나.

세상에 조약돌 섬기는 자 어찌 그리 많은고! 바울 바울, 어거스틴 어거스틴, 루터 루터, 칼빈 칼빈, 우찌무라 우찌무라, 그게 다 조약돌 비단에 싸두는 것 아닌가?

천만 년 갈 무교회던가?

곰팡이 돋은 가톨릭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골리앗 죽였거든 돌을 집어 내던져라! 다음 싸움은 그것으론 못한다."

(함석헌, <함석헌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한길사, 1988. 2. 20. 제7판 발행]. 397.)

고린도 교회는 인간적 약점들로 가득했습니다. 시시때때로 인간의 방식이 튀어나왔습니다. 우리도 다양한 사역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 정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고, 물도 주고, 가지를 친다 해도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조약돌일 뿐, 우리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휴가를 보내면서 저도 지난 1년간 어떻게 살았나를 돌아보았습니다. 향린에 왔다고 해서 특별히 변한 것은 없고, 이전에 하던 대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능한 시간을 쪼개어 많은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일의 중요도와 우선 순위를 고려하지 못한 채, 계속 밀려드는 사역들을 처리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다시 다짐한 것은 앞으로는 조금 더 차분히 점검하여 꼭 필요하고 급한 일부터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일 년은 되는대로 우리 교회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습니다만, 내년에는 올해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 각자가 신앙의 성숙을 이루도록 돕는 것, 그리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구조를 짜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2025년을 마무리하고 2026년을 맞이하면서, 저뿐만 아니라 각 부서 부장과 위원회 위원장님들, 각 신도회 임원들, 교회의 온갖 소모임과 특별활동들을 이끄시는 분들은 모두 한해를 평가하며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 함께 할 일과 홀로 감당할 일, 기초를 쌓는 일과 열매를 맺어야 할 일들을 구분하시고 정리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하나님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가를 묻고, 열정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되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다시 한번 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편을 읽어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윤영초 선생의 12월의 기도입니다. 2025년 마지막 달이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12월의 기도(윤영초)

마지막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시간

저 멀리 지나가 버린 기억

차곡차곡 쌓아 튼튼한 나이테를 만들게 하십시오.

한 해를 보내며 후회가 더 많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다가올 시간이 희망으로 있기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십시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 안부를 띄우는 기도를 하게 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 발버둥쳤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며

잘못을 아는 시간이

너무 늦어 아픔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우리 가슴마다 웃음 가득하게 하시고

허황된 꿈을 접어 겸허한 우리가 되게 하십시오.

맑은 눈을 가지고,

새해에 세운 계획을

헛되게 보내지 않게 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한 해 동안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줍시다.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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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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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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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