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40:9-11, 고린도후서 4:6-10, 누가복음 11:35-36
설교문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다릴 '대'(待), 임할 '임'(臨),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교회력으로 새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함으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입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한국인에게 기다림이란 정서는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의 <기다리는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제주 청년 하나가 바다 건너 뭍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목포였습니다. 청년은 고향에 두고 온 여인을 그리워하며 날마다 유달산의 월출봉에 올랐습니다. 떠나간 청년을 그리워하며 제주 여인도 날마다 일출봉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둘은 하염없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기다렸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습니다. 2절입니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여인은 결국 망부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슬픈 결말입니다. 한 많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기다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명희 작사, 같은 장일남 작곡의 <비목>에도 이런 슬픔이 담겨 있지요. '비목'(碑木)이란 무명용사들의 무덤을 표시한 나무 비석을 말합니다. 현충일이면 어김없이 방송에서 들을 수 있는 가곡입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 깊은 계속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오랜 세월, 비바람 몰아치는 계곡 속 홀로 선 비목은 깊은 적막감에 울다 울다 지쳐버렸습니다. 그 옛날 먼 고향 어릴 적 천진스럽게 함께 뛰놀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히고 서러움이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습니다. 그렇게 비목도 망부석이 되었습니다. 한국인에게 기다림은 그리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재(不在)가 만들어내는 가장 따뜻한 슬픔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강대국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다와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도 기다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이사야 11:10-11) 그가 기다린 것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사야 7:14)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찬송가 104장)
얼마나 가혹했겠습니까. 그 포로 생활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그런데 이사야의 노래에서 특별한 것은 그 구원자가 무서운 심판자가 따뜻한 목자로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서 멀리 벗어나 살았기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찾아오시는 분은 더 이상 심판하고 징벌하는 분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고통 받는 백성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목자입니다. 그 예언의 노래가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이사야 40:9-11)
목자는 양을 인도하고, 돌보고, 보호하고, 상처 입은 양을 고치며, 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입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 속으로 이런 목자 같은 구원자가 찾아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기다림입니다.
한인현 작사, 이홍렬 작곡의 동요 <섬집 아기>는 어릴 적 많이 불렀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불러봐야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노래입니다. 성서의 기다림이 무엇인지 한국인의 정서에서 금방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노래입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름다운 노래이지만 슬픔 내용입니다.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엄마는 굴 따러 섬의 그늘에 갔습니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봅니다. 결국 혼자 잠이 드는데 엄마 팔이 아니라 제 팔을 베고 잡니다. 지금 같으면 이 얼마는 경찰에 잡혀갑니다. 아동복지법 제17조 위반으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아기를 이렇게 방치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건 이 노래를 1절만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동요의 진수는 2절에 있습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사실 잠 든 아기는 세상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엄마 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집에 두고 온 아기 때문에 갈매기 울음소리마저 불길합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환청처럼 듣습니다. 일할까, 갈까, 일할까, 갈까... 잔인한 망설임입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엄마들은 압니다. 일을 안 하면 아기를 먹여 살릴 수 없고, 일만 하면 아기를 잘 키울 수 없습니다.
결국 엄마는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옵니다. 그것도 모랫길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제 아기를 찾아 황급히 달려옵니다. 그래서 2절을 듣다 보면 눈물이 왈칵 납니다. 엄마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그런데 그렇게 달려와 보니 아기는 곤히 자고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이나 더 할 것' 하며 후회할 엄마는 없습니다. 잘 자는 아기가 고맙고 반가울 따름입니다. 엄마는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때 아기가 깬다면 엄마는 더욱 행복할 겁니다. 그랬습니다. 귀가(歸家)를 기다리고 바란 이는 아기보다 오히려 엄마였습니다.
이사야가 노래합니다. 그런 엄마 같은 메시아가 오신다고 노래합니다.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엄마 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달려오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이사야 35:4) 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게 종교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신이 인간을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Advent"라고 합니다. 라틴어 "adventus"에서 온 말로, '도착, 오심, 방문'이라는 뜻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입니다. 희망의 도래입니다. 위대한 무언가의 오심입니다. 장엄한 존재의 방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聖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17)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 1:9)이라 했습니다. "성탄은 빛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탄생하는 것"(마이스트 에크하르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린도후서 4:6-9) 했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보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도자기처럼 고급스러운 그릇이 아닙니다. 질그릇은 평범하고 약한 그릇입니다. 쉽게 깨질 수 있는 그릇입니다. 인간은 그런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보배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의 빛입니다.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이 그 빛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것이 성탄입니다. 유한한 흙 속에 영원한 생명이 담겼습니다. 그것이 성탄입니다. 우리의 어둠 속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희망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는 게 아닙니다. 남에게서 희망을 찾고 남에게서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은 절망입니다. 슬픔의 시인 정호승은 우리에게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로 이렇게 살뜰히 권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시인은 희망을 찾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절망도 없을 만큼 절망적인 세상도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자신이 희망을 만드는 사림이 되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것이 시인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런 절망의 세상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을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만이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희망입니다. 굳이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스로 희망이 되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다 보면 타인에게 희망이 되는 존재, 축복의 통로로 성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국의 오페라 가수 폴 포츠(Paul Potts)의 인생 역전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눌한 말투에 못생긴 외모, 그는 어릴 적부터 놀림감이었습니다. 노래만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고 가수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성악 과정을 두 차례나 수료했지만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야 했고, 오토바이 사고로 쇄골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휴대폰 외판원으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가수의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2007년 영국 ITV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즈갓탤런트 Britain's Got Talent>에서 그는 우승을 차지합니다. 사실 처음 심사위원과 관객 앞에 선 그의 모습은 별 기대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외모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촌스럽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듯한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노래를, 그것도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Nessun Dorma'를 부르겠다고 하니 가관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되었습니다. 파바로티의 죽음으로 상실감을 가지고 있던 청중은 그에게 환호했습니다. 경연대회 우승 이후 그는 대형 음반 제작사와 계약을 맺은 가수가 되었고 그의 음반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폴 포츠는 세상의 편견과 장애를 꿈과 열정으로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슬픔의 세상에서 희망이 된 사람입니다.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닙니다. 같은 해 우리는 가수 인순이의 <거위의 꿈>에 감동했습니다. 그 역시 혼혈이라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노래로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노랫말 가사처럼, 누구에게나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있을 겁니다. 그래서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우리는 "그날을 위해" 참아야 하고 또 참을 수 있습니다.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고]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 수 있[다]"라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지금 힘드십니까? 낙망하고 있습니까? 가난, 환경, 외모, 장애, 편견 등으로 슬퍼하십니까? 누구나 폴 포츠가 되고 인순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졌으니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살아가면 봄눈이 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목자와 같이, 엄마와 같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오고 계십니다. 빛으로 오십니다.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분이 탄생할 내 마음의 자리가 있습니까? 집에 반가운 손님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 옷을 고치고, 자리를 내어드리고, 차를 내옵니다.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도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희망의 도래를 간절히 희망하는 자는 절망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외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이사야 40:3-5a)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목자와 같이, 엄마와 같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그분이 오시는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이 은혜의 도래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것"(디트리히 본회퍼)이라 했습니다. 어느 시인(크리스탈 시길 리스트룬드)의 <그분이 오고 계신다>입니다.
"서둘러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음식을 준비하고 포도주를 빚어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세상의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 마음 상한 이들에게 따스한 사랑을 베풀어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집 없는 이들에게 쉴 곳을 주고 / 옥에 갇힌 죄수들을 방문하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성경을 읽고, / 또 너희 자녀들에게 /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르쳐라! / 서둘러 준비하라! / 예수께서 오고 계신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 1:9)이 있었습니다. 그 빛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 빛이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주신 보배, 보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이 빛이 날마다 내 안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십시오]."(누가 11:35)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대림의 촛불을 켜십시오. "흑암에 앉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태 4:16)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있다면 그건 내 안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지, 어두워서 빛이 없는 게 아닙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어도 어둠은 빛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어둡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여러분의 얼굴 위에서 환하게 빛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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