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삼상 19:1-5, 몬 1:8-16, 요 15:12-17
설교문
[송년 주일과 성도 추모 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주일이자, 먼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교우들을 기억하는 성도 추모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2025년도 단 사흘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여러분의 삶은 어떠셨는지요? 감사의 고백이 넘치셨습니까? 아니면 아쉬움과 탄식이 더 깊으셨습니까? 우리는 해마다 이맘때면 지나온 길을 돌아봅니다. 지난 삶이 무의미하게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다가올 날들을 더 새롭게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소식들은 내일을 준비할 기회조차 앗아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는 알 수 없기에, 갑작스러운 비보(悲報)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합니다. 올해도 우리는 사랑하는 조은수 집사님과 박영숙 권사님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또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가족을 먼저 보낸 교우들도 계십니다.
육체적인 이별은 말할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을 남기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에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속살을 살피게 됩니다.
미국 남서부 나바호(Navajo) 부족의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우리가 떠나는 순간 후회 없이 기뻐하려면, 평소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잘 알려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로마의 개선 행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휘황찬란한 연주와 환호 속에 입성할 때, 한 노예가 그의 뒤에서 끊임없이 속삭였다고 합니다. "그대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뒤를 돌아보라, 지금은 여기 있지만 그대 역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Memento moriendum Esse. Memento te hominem esse. 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
이 소리는 로마의 장군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할 음성입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이라는 선물을 가장 가치 있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한다. 삶을 위하여!]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고 배제해 왔습니다. 죽음을 말하면 재수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잊고 살다 보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다 갑작스러운 종말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은 이들조차도 매우 큰 분노와 슬픔, 한(恨)과 원망이 가슴 속 깊이 사무치게 됩니다.
죽음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었다."(『생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life』에서)
이 말은 무엇보다 죽음을 생각할 때 오히려 삶을 더 진하게 살 수 있음을 말합니다. 죽음을 성찰할 때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게 됩니다. 수년간 말기 암 환자를 지켜보았던 일본인 의사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에는 임종을 앞둔 이들의 진솔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 몸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것" "꿈을 향해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마워요'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 "소중한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것" "종교를 몰랐던 것" "담배를 끊지 않은 것" 등등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죽음이라는 불청객 찾아온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요? 결국 모든 후회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배움"입니다. "좀 더 잘해 줄 껄!" "좀 더 배울 껄!" 하는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참된 삶은 진정한 사랑과 배움의 태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성서가 말하는 사랑 이야기를 본문으로 택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깊은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오늘 저는 바울 사도가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태도는 실로 경이롭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배운 모든 설득 기술을 동원합니다. 1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이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 대단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상상력을 발휘하여 1세기 중반 로마로 날아가 봅시다. 오늘 한국의 경제적 발전은 수많은 노동자의 피땀으로 가능했고, 오늘날도 전체 근로자의 50%를 왔다 갔다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사회가 지탱되고 있는데, 1세기 로마는 완벽하게 노예노동으로 자기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물론 전쟁이 그치고 노예시장이 대폭 줄어들면서 1세기 중후반이 되면 노예값이 상승하고 노예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지만,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빌레몬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사랑으로 간곡히 부탁합니다(8-9절). 심지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쳤을 손해에 대한 배상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하고(18-19절), 자기를 동지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자기를 맞이하듯 하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에는 간절함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주로 빌레몬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4절 이하), 이 편지는 그의 가정에 모이는 교회공동체 전체가 함께 낭독하게 됩니다.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교인들 전부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빌레몬은 자기 선택이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편지들과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 또한 은연 중에 빌레몬을 압박하는 수사적 장치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데 빌레몬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당시 감옥은 면회도 가능하고 심지어 함께 감옥에 함께 살면서 수인(囚人)을 돌보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빌레몬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권력을 가지고 남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권력자의 편에서 권력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편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받는 박해를 달갑게 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빌레몬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권리 없는 자들, 삶의 터전에서 뽑힌 사람들, 사회적 모든 권력관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바울을 도와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고 후원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이 자신의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로 여기는 바울의 간청을 거절하기란 무척 힘듭니다.
특히 바울은 오네시모를 부탁하기에 앞서 빌레몬의 신앙과 빌레몬이 성도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칭찬을 합니다. 이런 칭찬을 듣고 난 후에 바로 이어지는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수사학적 표현법을 동원하여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명령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이제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해주고 그 숙고의 결과에 따라 자유로운 결정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는 더 큰 사회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바울이 극진히 편지를 써야 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빌레몬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를 자유인으로, 특별히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 주는 것은 당시의 생활 양식과 사고에서 보았을 때 매우 혁명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들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빌레몬의 집에 남아 있던 노예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도 모두 도망가서 바울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빌레몬에게 우리에게도 자유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 준 사례가 노예들 사이에서 퍼졌을 때 노예들은 어땠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노예들을 신앙 안에서 동등한 교우로 대하고, 자유인으로 풀어준다면, 노예노동 덕택에 살아가는 주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사회의 불순세력으로 여론몰이를 하지 않았을까요?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일은 빌레몬에게 매우 어려운 결단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바울의 편지를 들고 빌레몬에게 가는 것도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빌레몬이 바울의 편지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오네시모는 법에 따라 도망간 노예에게 행해지는 매우 심한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 또한 바울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믿음으로 빌레몬에게 갑니다.
이번엔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이 편지를 쓰는 바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도망간 노예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로마제국의 노예법을 어긴 사람이 제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나 그와 함께 지내는 것 또한 바울에게는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이 모든 위험을 넘어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과연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로새서 4장 9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오네시모를 골로새 교회로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일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이 편지가 사실이라면 빌레몬은 바울이 바랐던 것보다 그 이상의 일(빌레몬서 21절) 즉 바울 곁에 오네시모를 머물게 하여 그와 함께 동역자로 선교의 사역을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초기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가 2세기 초에 에페소에 보낸 서신). 주인과 노예의 관계 속에서는 쓸모 없어진 오네시모가 평등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자기의 이름답게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이다.- 한 교회를 이끄는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를 되찾게 하는 이 작은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말했던 창세기 저자들의 통찰과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논했던 민주주의 이상을 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한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왔을 때, 오네시모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덕분에 이제는 산 목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쓸모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깊이 있게, 과감하게 해야 할 도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가 보여주시고, 바울이 실천하고, 빌레몬이 따랐던 바로 이런 보편적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간절함의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합니다.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직역: 사랑으로 인하여, διὰ τὴν ἀγάπην). 여기서 사랑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 사랑은 온전하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지만 온전한 것은 영원하다고. 죽음으로 인해 사람은 우리 곁을 떠나가지만 그래도 사랑은 남습니다. 우리 또한 남겨진 사랑을 더 자라게 하여 온전한 사랑을 누릴 때까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성숙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시 한 편을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십시오.
나와 너 사이에, 우리들 가운데도 예수의 사랑을 놓아둡시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의 사랑으로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