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분별하는 지혜

2026년 1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열왕기상 3:9-12, 로마서 12:1-2, 마태복음 16:1-3

요즘 우리는 참 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뉴스가 말을 걸고, 휴대폰을 켜는 순간 영상과 댓글과 광고가 쉼 없이 쏟아집니다. 문제는 말이 많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구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너무 많아서 헷갈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한일서 4:1)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조차 "다 믿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조건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각을 멈추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시험하라, 살펴보라, 분별하라. 믿음이란 아무 말이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가려내는 태도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저는 2025년 '올해의 단어(Word of the Year)'를 살펴보았습니다. 올해의 단어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에 지쳐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드러내는 문화적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메리엄-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 Dictionary)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slop"(슬롭)을 선정했습니다. 이 단어는 인공지능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질 낮은 디지털 콘텐츠를 가리킵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콘텐츠가 넘쳐나지만, 깊이는 없고 허술하며, 때로는 왜곡된 정보까지 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집단적 피로가 이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Slop"을 한국어로 풀면 "AI발 저급 콘텐츠",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디지털 찌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사전(Cambridge Dictionary)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parasocial"(파라소셜)을 선정했습니다. 유명인, 인플루언서, 가상 캐릭터, 혹은 AI와 맺는 일방적인 관계를 뜻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잘 아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모릅니다. 실제 상호작용은 없지만, 마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상태입니다. 관계처럼 보이지만 관계가 아닌 것, 쉽게 말해 "가짜 친밀성"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rage bait"(레이지 베이트), 곧 분노를 유도하는 콘텐츠를 선정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클릭 수와 참여도를 높이려고 의도적으로 분노와 혐오와 갈등을 자극하는 말들을 올립니다. 쉽게 "분노 낚시"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분노에 낚여 하루를 시작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이 세 단어를 함께 놓고 보면 2025년을 살아간 우리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넘쳐나지만 속이 비어 있는 말들,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계는 아닌 연결들, 정의의 언어를 빌린 분노와 혐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끊임없이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026년 새해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 시대의 거짓은 노골적인 거짓이 아닙니다. 오늘의 거짓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거짓입니다. 감동적인 언어로, 정의로운 분노의 언어로,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친밀한 목소리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말은 많아졌지만, 누가 말하는지, 무엇이 진짜인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신앙은 묻습니다. 아니, 신앙의 맑은 지성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이 말들은 다 어디에서 왔는가? 이 관계는 생명을 살리는 관계인가? 이 감정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가, 아니면 분노와 두려움 속에 가두는가? 이러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분별입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 2025년의 올해의 단어는 바로 "분별"(分別, discernment)이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바울은 먼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먼저 너희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기억하라"라고 말합니다. 분별은 많이 배워서 생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무감에서 만들어지는 태도도 아닙니다. 분별은 하나님의 자비, 이미 주어진 사랑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바울은 "너희의 생각을 드리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 마음만 드리라"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몸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분별은 머리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분별은 삶의 방향과 태도 속에서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지지 않는 삶은 시대의 소음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Do not be conformed) 여기서 '본받다'(συσχηματίζω)라는 말은 '겉모양을 따라 맞추다'입니다. 외형적 동일화를 뜻합니다. '세대'(αἰών)는 시대의 가치나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 시대의 패턴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 말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뉴스를 보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시대의 속도와 분노와 기준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별이란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이 변화는 겉모습을 고치는 변화가 아닙니다. 본질을 새롭게 하는 변화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동사가 수동태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너 스스로 바꾸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받으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바꾸시도록 너 자신을 내어드리라"라는 뜻입니다. 변화는 자기 계발이 아닙니다. 변화는 하나님의 재창조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분별하다'(δοκιμάζω)라는 말은 '시험하여 진짜임을 확인하다'라는 뜻입니다. 금속을 정련하는 용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분별은 책상 앞에서 정답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분별은 무엇을 더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머릿속으로 미리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 온몸으로 애쓸 때 얻어지는 은사가 분별의 지혜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는 하나님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은 두려웠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어떻게 감히 수많은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감동하신 듯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죽도록 미운 원수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하기 마련인데, 성서를 보니 솔로몬은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다]"(열왕기상 3:11)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간청대로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솔로몬의 기도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혼탁한 세상에서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과 순간적인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는 기도라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인공지능(AI)의 시대를 삽니다. AI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맑은 신앙의 지성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말은 누가 한 말인가? 이 말은 과연 생명을 살리는 말인가, 아니면 사람을 소모시키는 말인가? 이 말은 우리를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이끄는가, 아니면 분노와 두려움 속에 가두는가?

모든 감동이 성령은 아닙니다. 모든 눈물이 회개는 아닙니다. 모든 확신이 곧 믿음도 아닙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 크게 외치는 신앙이 아니라, ej 깊이 질문하며 더 조용히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말로 주장하기보다 침묵으로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언젠가 미국 CBS 방송국의 유명 앵커인 댄 리더가 테레사 수녀에게 질문했습니다. "수녀님은 기도할 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테레사 수녀가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습니다." 예상 밖의 답변을 들은 댄 래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테레사 수녀가 답했습니다. "그분께서도 가만히 듣고 계시지요."

오늘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떤 기도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께 쏟아놓는 것이 기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고요히 귀 기울여 듣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맑은 바람 소리로, 거친 천둥 소리로, 반짝이는 별빛으로 끊임없이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그것을 기도라 여겨온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먼저 하나님 앞에 앉아 보십시오. 그저 하나님을 향해 앉아 있기만 하십시오. 그렇게 앉아 있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되어 가는 우리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요즘 온라인 공간에서 가장 빠르게 퍼지는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아닌 분노입니다. 자극적인 제목 하나, 맥락이 지워진 문장 하나가 순식간에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키웁니다. 분노는 클릭을 부르고, 클릭은 다시 더 큰 분노를 불러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온라인 분노 문화입니다.

이러한 온라인 분노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상대의 표정도, 숨결도, 삶의 맥락도 지워집니다. 그리고 속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충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반응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게다가 책임이 희미합니다. 분노는 마음껏 쏟아내지만, 그 말이 남긴 상처에 대해서는 좀처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분노는 종종 정의의 언어를 빌린 채, 아주 쉽게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시 이러한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분노와 혐오,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공격, 그리고 서로를 향한 빠른 판단과 낙인이 교회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어떤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표지는 정확한 논리나 날카로운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 표지는 사랑의 방식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반드시 '느린 공간'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속도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대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는 곳이어야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분노가 곧 정체성이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사랑의 관계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고발이 아니라 기도로, 공격이 아니라 탄식으로, 배제가 아니라 책임 있는 말로 서로를 변화시키는 자리여야 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더 빨리 분노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오래 사랑하라고 부르십니다. 교회는 분노가 가장 늦게 도착하는 곳, 그러나 사랑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외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한일서 4:1) 경애하는 여러분, 내가 받은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아니면 적(敵) 그리스도의 영인지 시험(text)하십시오. 가려내십시오. 모든 것을 다 믿지 말고 의심하십시오. 분별하십시오.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2026년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2, 새번역) 예수님의 말씀처럼, 날씨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마태복음 16:3, 새번역)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말(word)이 넘치는 시대에 말씀(Word)으로 돌아가서, 분노가 더 쉬운 시대에 사랑으로 멈추어 서서,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밝게 만드는 담대한 신앙인으로, 맑은 지성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대학교회 주일설교 (2026.1.18.) 장윤재 목사

분별하는 지혜

열왕기상 3:9-12, 로마서 12:1-2, 마태복음 16:1-3 -

요즘 우리는 참 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뉴스가 말을 걸고, 휴대폰을 켜는 순간 영상과 댓글과 광고가 쉼 없이 쏟아집니다. 문제는 말이 많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구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너무 많아서 헷갈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한일서 4:1)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조차 "다 믿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조건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각을 멈추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시험하라, 살펴보라, 분별하라. 믿음이란 아무 말이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가려내는 태도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저는 2025년 '올해의 단어(Word of the Year)'를 살펴보았습니다. 올해의 단어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에 지쳐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드러내는 문화적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메리엄-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 Dictionary)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slop"(슬롭)을 선정했습니다. 이 단어는 인공지능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질 낮은 디지털 콘텐츠를 가리킵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콘텐츠가 넘쳐나지만, 깊이는 없고 허술하며, 때로는 왜곡된 정보까지 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집단적 피로가 이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Slop"을 한국어로 풀면 "AI발 저급 콘텐츠",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디지털 찌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사전(Cambridge Dictionary)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parasocial"(파라소셜)을 선정했습니다. 유명인, 인플루언서, 가상 캐릭터, 혹은 AI와 맺는 일방적인 관계를 뜻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잘 아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모릅니다. 실제 상호작용은 없지만, 마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상태입니다. 관계처럼 보이지만 관계가 아닌 것, 쉽게 말해 "가짜 친밀성"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rage bait"(레이지 베이트), 곧 분노를 유도하는 콘텐츠를 선정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클릭 수와 참여도를 높이려고 의도적으로 분노와 혐오와 갈등을 자극하는 말들을 올립니다. 쉽게 "분노 낚시"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분노에 낚여 하루를 시작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이 세 단어를 함께 놓고 보면 2025년을 살아간 우리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넘쳐나지만 속이 비어 있는 말들,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계는 아닌 연결들, 정의의 언어를 빌린 분노와 혐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끊임없이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026년 새해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 시대의 거짓은 노골적인 거짓이 아닙니다. 오늘의 거짓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거짓입니다. 감동적인 언어로, 정의로운 분노의 언어로,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친밀한 목소리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말은 많아졌지만, 누가 말하는지, 무엇이 진짜인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신앙은 묻습니다. 아니, 신앙의 맑은 지성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이 말들은 다 어디에서 왔는가? 이 관계는 생명을 살리는 관계인가? 이 감정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가, 아니면 분노와 두려움 속에 가두는가? 이러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분별입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 2025년의 올해의 단어는 바로 "분별"(分別, discernment)이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바울은 먼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먼저 너희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기억하라"라고 말합니다. 분별은 많이 배워서 생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무감에서 만들어지는 태도도 아닙니다. 분별은 하나님의 자비, 이미 주어진 사랑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바울은 "너희의 생각을 드리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 마음만 드리라"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몸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분별은 머리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분별은 삶의 방향과 태도 속에서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지지 않는 삶은 시대의 소음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Do not be conformed) 여기서 '본받다'(συσχηματίζω)라는 말은 '겉모양을 따라 맞추다'입니다. 외형적 동일화를 뜻합니다. '세대'(αἰών)는 시대의 가치나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 시대의 패턴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 말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뉴스를 보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시대의 속도와 분노와 기준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별이란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이 변화는 겉모습을 고치는 변화가 아닙니다. 본질을 새롭게 하는 변화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동사가 수동태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너 스스로 바꾸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받으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바꾸시도록 너 자신을 내어드리라"라는 뜻입니다. 변화는 자기 계발이 아닙니다. 변화는 하나님의 재창조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분별하다'(δοκιμάζω)라는 말은 '시험하여 진짜임을 확인하다'라는 뜻입니다. 금속을 정련하는 용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분별은 책상 앞에서 정답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분별은 무엇을 더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머릿속으로 미리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 온몸으로 애쓸 때 얻어지는 은사가 분별의 지혜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는 하나님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은 두려웠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어떻게 감히 수많은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감동하신 듯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죽도록 미운 원수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하기 마련인데, 성서를 보니 솔로몬은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다]"(열왕기상 3:11)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간청대로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솔로몬의 기도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혼탁한 세상에서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과 순간적인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는 기도라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인공지능(AI)의 시대를 삽니다. AI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맑은 신앙의 지성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말은 누가 한 말인가? 이 말은 과연 생명을 살리는 말인가, 아니면 사람을 소모시키는 말인가? 이 말은 우리를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이끄는가, 아니면 분노와 두려움 속에 가두는가?

모든 감동이 성령은 아닙니다. 모든 눈물이 회개는 아닙니다. 모든 확신이 곧 믿음도 아닙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 크게 외치는 신앙이 아니라, ej 깊이 질문하며 더 조용히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말로 주장하기보다 침묵으로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언젠가 미국 CBS 방송국의 유명 앵커인 댄 리더가 테레사 수녀에게 질문했습니다. "수녀님은 기도할 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테레사 수녀가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습니다." 예상 밖의 답변을 들은 댄 래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테레사 수녀가 답했습니다. "그분께서도 가만히 듣고 계시지요."

오늘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떤 기도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께 쏟아놓는 것이 기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고요히 귀 기울여 듣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맑은 바람 소리로, 거친 천둥 소리로, 반짝이는 별빛으로 끊임없이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그것을 기도라 여겨온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먼저 하나님 앞에 앉아 보십시오. 그저 하나님을 향해 앉아 있기만 하십시오. 그렇게 앉아 있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되어 가는 우리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요즘 온라인 공간에서 가장 빠르게 퍼지는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아닌 분노입니다. 자극적인 제목 하나, 맥락이 지워진 문장 하나가 순식간에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키웁니다. 분노는 클릭을 부르고, 클릭은 다시 더 큰 분노를 불러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온라인 분노 문화입니다.

이러한 온라인 분노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상대의 표정도, 숨결도, 삶의 맥락도 지워집니다. 그리고 속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충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반응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게다가 책임이 희미합니다. 분노는 마음껏 쏟아내지만, 그 말이 남긴 상처에 대해서는 좀처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분노는 종종 정의의 언어를 빌린 채, 아주 쉽게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시 이러한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분노와 혐오,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공격, 그리고 서로를 향한 빠른 판단과 낙인이 교회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어떤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표지는 정확한 논리나 날카로운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 표지는 사랑의 방식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반드시 '느린 공간'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속도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대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는 곳이어야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분노가 곧 정체성이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사랑의 관계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고발이 아니라 기도로, 공격이 아니라 탄식으로, 배제가 아니라 책임 있는 말로 서로를 변화시키는 자리여야 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더 빨리 분노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오래 사랑하라고 부르십니다. 교회는 분노가 가장 늦게 도착하는 곳, 그러나 사랑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외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한일서 4:1) 경애하는 여러분, 내가 받은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아니면 적(敵) 그리스도의 영인지 시험(text)하십시오. 가려내십시오. 모든 것을 다 믿지 말고 의심하십시오. 분별하십시오.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2026년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2, 새번역) 예수님의 말씀처럼, 날씨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마태복음 16:3, 새번역)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말(word)이 넘치는 시대에 말씀(Word)으로 돌아가서, 분노가 더 쉬운 시대에 사랑으로 멈추어 서서,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밝게 만드는 담대한 신앙인으로, 맑은 지성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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