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험한 십자가"

2026년 3월 15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53:3-5, 갈라디아서 6:14, 누가복음 9:23

설교문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고귀한 일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인류 역사 곳곳에 있습니다.

1941년,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탈출하자 나치는 보복으로 수감자 열 명을 굶겨 죽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무작위로 열 명이 끌려 나왔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울부짖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아니라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저는 가족이 없습니다." 나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굶주림 감방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나누다가 그는 생을 마쳤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가 대신 살려 준 사람은 평생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저에게 생명을 두 번 주셨습니다. 한 번은 죽음에서 살려 주셨고, 또 한 번은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류 역사 곳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복음 15:1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실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고통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의 가장 깊은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순절의 길을 걸어가는 이 계절에 우리는 오늘 다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목걸이에도 십자가가 있고, 교회 첨탑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가장 익숙한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면, 십자가는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라 처형 도구였습니다. 가장 잔혹하고 부끄러운 고문 틀이었고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오직 노예와 반역자에게만 사용하던 형벌이 바로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쉽게 그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카타콤 무덤 벽화를 보면 십자가 대신에 물고기나 목자와 같은 상징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십자가는 조롱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에서 발견된 한 오래된 낙서에는 십자가에 달린 당나귀 머리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의 신을 예배하는 사람." 이렇게 십자가는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던 곳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신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사야 53:3-5). '고난받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고난은 단지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의 눈물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부끄러운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도다."(갈라디아서 6:14)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세상이 '수치'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이 '실패'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약함'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이 놀라운 고백을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랫동안 노래로 불러왔습니다. 찬송가 150장 "The Old Rugged Cross", 곧 우리가 잘 아는 "험한 십자가"입니다. 이 찬송은 미국의 전도자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부흥 집회에서 십자가를 설교하다가 사람들의 조롱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구주라고 믿다니, 우스운 종교가 아닌가." 그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묵상하며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수치라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사랑을 완성하셨음을.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On a hill far away stood an old rugged cross, the emblem of suffering and shame."(어느 먼 언덕 위에 낡고 거친 십자가 서 있으니, 고난과 수치의 상징이라."

이 찬송의 영어 원문에는 "old rugged cross"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rugged"라는 단어는 '거칠다', '투박하다'라는 뜻입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무가 아닙니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나무입니다. 가시가 돋힌 나무입니다. 끔찍한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를 그대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이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험한 십자가"라고 번역했습니다. "험하다"라는 말에는 거칠다는 의미뿐 아니라 고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험한 길, 험한 세상, 험한 인생. 한국인의 정서에 그 의미가 바로 다가옵니다.

이 찬송의 핵심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 험한 십자가를 사랑하겠습니다. 끝까지 이 험한 십자가를 붙들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왜 우리는 고통과 수치의 상징을 사랑한다고 말합니까? 왜 우리는 잔인한 고문과 처형의 도구를 신앙의 중심에 놓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이 거기서 우리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고통 속으로, 우리의 눈물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한, 참 생명과 평화를 향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하지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십자가 앞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그 죄는 "내 죄"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십자가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의 죄는 배신과 부인의 죄입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버리지 않겠다" 장담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라고 무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이 장면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내 이익이 걸려 있을 때 나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간 적이 있습니다. 신앙을 마음속에만 숨겨 두고 살아간 적이 있습니다. 불의한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으실 텐데"를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다수의 편에 서서 조용히 빠져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배신과 부인의 죄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참회와 고백입니다. "주 예수여, / 저 역시 당신을 모른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 그래서 뺨을 스치는 새벽바람은 싸늘하고 / 때를 알리는 닭 울음소리는 무척이나 크게 들렸습니다. // 학자들이 잔꾀를 부려 / 당신을 비웃고 조롱하고 저주하며 / 실컷 모욕한 뒤 죄를 뒤집어씌워 / 나중에는 십자가 형틀에 매다는 동안에 / 저 역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데이지 콘웨이 프라이스, <부활절의 기쁨>)

둘째로 무관심과 침묵의 죄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 군중 속에 침묵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역시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고 말하며 손을 씻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빌라도처럼 말합니다. "내가 나서봤자 바뀌는 것도 없는데", "괜히 나섰다가 손해나 보면 어쩌나."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웃, 전쟁과 폭력 속에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것들 뒤에 숨겨진 착취의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것들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던 사람들 속에 우리도 서 있습니다.

세 번째로 종교적 위선입니다. 당시 가장 경건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죽도록 예수님을 미워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름뿐인 경건, 형식뿐인 의로움, 인간의 관습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내세우는 것들을 낱낱이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분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종교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참 빛이 세상에 비취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배당 안에서 경건한 얼굴로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이웃의 고통에는 무덤덤한 종교적 이중생활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 자리와 이익을 더 따질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의 실패와 아픔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속삭임입니다. 종교적 위선은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숨은 죄의 얼굴입니다. 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갔고, 지금도 교회의 얼굴을 흐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탐욕과 자기중심의 죄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다릅니까.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믿음의 양심을 조금씩 양보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설득한 적은 없습니까. "이 정도는 다들 하잖아"라는 말로 부정직한 타협을 정당화한 적은 없습니까.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내 계획과 내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적은 없습니까. "주님, 이거 잘 되게 해주시면, 제가 더 열심히 섬기겠습니다"라고 종교적으로 거래를 시도한 적은 없습니까. 오늘 우리의 선택 속에 주님은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참회와 고백입니다. "나 오늘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나 위해 갈보리에서 못 박히신 그분을 / 내가 또다시 못 박을 수는 없건만! ,,.... // 오래 전 나를 위해 못 박히신 주님의 손에 / 나는 또 하나의 못을 박았습니다. / 나 위해 갈보리에서 못 박히신 그분을 / 내가 또다시 못 박을 수는 없는데 말입니다!"(에블린 타일러,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이끈 것은 그 시대 사람들만의 죄가 아니라 지금의 이 시대를 사는 나의 죄입니다. 그를 버린 제자들의 배신 속에 내가 예수님을 외면했던 순간들이 들어 있습니다. 군중의 무관심과 침묵 속에 내가 침묵으로 동조했던 불의가 들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 속에 내가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온 자기중심성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의 탐욕 속에 예수님까지도 내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두려움 속에 진실을 알면서도 피해버렸던 나의 비겁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 여러분,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역사책 앞에 서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서는 것은 거울 앞에 서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저들이 얼마나 악독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책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그들과 같은지"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런,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갈보리 산 위의 저 "old rugged cross"(험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자기를 조롱하고, 침 뱉고, 옷을 찢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발가벗겨,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하시며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셨습니다. 그분의 팔은 오늘도 배신한 제자, 침묵한 군중, 위선적인 종교인, 탐욕스러운 죄인,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작은 자를 여전히 품으시려고 따뜻하게 펼치신 팔입니다. 십자가로 그분을 내몬 것은 우리의 죄이지만, 십자가에서 우리를 맞이하시는 건 그분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고통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바로 이 십자가 아래서, 이 "험한 십자가" 아래서 여러분의 지친 영혼이 쉴 곳 찾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무너지는 세상이 평화를 찾기를 바랍니다.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은 주의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험한 십자가 붙들고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의 곁에, 눈물 흘리는 친구의 곁에 십자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안식을 찾아 / 아름다운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네. // 잔잔한 갈릴리 호수를 지나 / 새가 우짖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 불의가 가득한 빌라도의 법정을 밟고 //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 달리신 / 예수의 품에서 평화를 찾았네. // 그의 십자가 위에서 / 솟구치는 피눈물이 // 하나님과 사람 사이 / 사람과 사람 사이 // 막힌 담을 헐고 / 둘이 하나 되며 // 하늘에 있는 것이나 / 땅에 있는 것이나 // 예수의 피로 씻긴 / 피조물은 화평해 / 창조주의 기쁨이 되네."(정연홍, <십자가와 평화>) 주님, 우리가 골고다의 험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참 평화와 안식을 찾게 하소서. 나를 위해 저 십자가 지신 아름다운 당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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