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예! 여기 있습니다!"

2026년 3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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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22:1-11, 롬 4:18-25, 요 3:1-12

설교문

[교회 다니는 저마다의 이유]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작년 6월 9일(현지시간) 공개한 '2010∼2020년 세계 종교 지형 변화' 보고서를 보면, 2020년 현재 전 세계 인구 중 기독교 인구는 약 23억 명입니다. 세계 여행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 세 명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일 확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을 심층적으로 조사해 보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와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갖게 된 경위는 천차만별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던 구한말에 전주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인 레이놀즈와 마펫 선교사 등에 의해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외세 감정이 고조되었던 동학혁명으로 1895년 초에 선교사들은 선교 중단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선교사들에게 '희망의 빛' 같이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년 전에 세례를 받기로 약속했던 장사꾼이었습니다. 주일이 장날과 겹치지 않는 한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예배에 참석하는 열성에 선교사들은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밝고 특별한 별"(a bright and special star)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별은 오래 빛나지 했습니다. 선교사 레이놀즈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 빛도 오래가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주간 잘 나오더니 한 번은 우리한테 와서 10달러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고 나온 대가를 계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The Christian Observer 1895년 10월 증언)

그 장사꾼은 예배에 참석한 데 대한 대가로 일당을 계산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이 장사꾼의 요구에 기가 막혔겠지만, 한국의 선교 초기에 교회를 찾아온 사람 중에는 이처럼 대가를 바라고 나오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1894년부터 1895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라는 난리 가운데 교회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치외법권'적 성역인 것이 드러나면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오는 교인들이 늘어났고, 예배나 설교보다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물질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들을 가리켜 선교사들은 "쌀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중에서)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인들은 어떤 이유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제 자신을 돌아보면 저 또한 처음 교회에 다녔을 때는 쌀교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배의 본질이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급함보다도 그저 교회 선생님이 좋고, 형 누나들이 좋아서 다녔던 것 같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되어서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유치한 신앙에서 벗어났지만(고전 13:11) 저는 오늘날 약 800만 명이나 되는 한국 개신교 교인들이 정말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를 찾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주일에 쉬거나, 놀러 가지 않고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비종교인의 눈으로 보면 모두 교인처럼 보이고, 또 스스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참된 신앙을 갖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파였고,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다스리는 자'(archon, ruler)를 가리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였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기원전 63년 로마와 유대의 전쟁 때, 당시 유대의 지배자였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보낸 사자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로마 포위군에게 항복을 교섭한 고리온이라는 사람이 니고데모의 아들이었다고 나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여기 등장한 니고데모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니고데모는 분명히 부자였고(39절),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부른 것(3:10)으로 보아 율법학자이며,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산헤드린은 신약시대까지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최고 의회인 의결기관으로, 국가의 내무행정을 담당하며 사법권과 재판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남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옵니다. 왜일까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는 이방인의 땅 갈릴리, 구약성서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시골 동네 나사렛 출신입니다. 당시 주류 사회의 시선으로는 보잘것없는 일용직 노동자 목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최고 의회의 회원이고, 부자이며, 남 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았고, 권력과 부를 모두 소유하고 있어 아쉬울 게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한 시골 청년을 만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꿈같은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율법학자인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를 랍비라고 부르고, 일개 목수 청년 예수는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에게 거듭남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한 발 더 깊은 믿음으로]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의 바로 앞부분 2장 말미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는 것을 보고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면서 이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명령할 만한 권세를 지닌 인물이라면 그 증거를 내보이라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벌인 표징들을 보고 들뜬 마음으로 곧바로 별 고민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 둘 모두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한쪽은 의심하고, 한쪽은 추종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믿음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따르는 데 이르지 못한 채 표징을 구하는 이들이나, 예수님의 겉모양만 보고 거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예수의 이름을 남발하는 이들 모두 요한복음서 저자가 보기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니고데모를 등장시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선 니고데모는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예수를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행동들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과격한 청년의 돌발행동은 자칫하면 폭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것은 로마군의 끔찍한 진압과 많은 이들의 죽음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사장들은 성전경비대를 시켜 예수를 옥에 가두려고 했을 것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이런 예수를 찾아갑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행동을 보고 꽤 깊은 고민과 성찰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한 나라와 민족 공동체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로서 신앙의 본질에 대한 훨씬 더 깊은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지금 예루살렘이 진정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있는가? 로마 지배하에서 계속 위협당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어떻게 준수할 수 있겠는가? 다가올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인가? 지금 니고데모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책임 있는 지도자로 민족과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 진정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어떻게 만들고 추구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나 해결하려고 무당을 찾듯이 예수님께 가는 사람들, 표적을 보고 흥분해서 믿는 사람들하고는 다릅니다. 더 귀한 가치와 더 깊은 깨달음,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위험도 무릅쓰고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번의 육체적 정신적 도약을 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그러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벗어나 어른의 믿음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그런 신앙의 도약은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모험과 결단, 오랜 시간 숙고하여 존재를 던지는 모험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아버지와 출생지와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큰 민족이 되게 하는 것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민족이 되려면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아들을 얻는 데에도 25년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100세가 되어서 얻은 아들입니다. 이삭을 얻을 때 사라의 나이는 90이었는데, 1년 전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사라는 피식 웃고 말았지만 정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본문에서 하나님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을 따라 사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번제에 쓸 장작을 질 만큼 성장했으니 아마 이삭의 나이는 최소한 중고등학생의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창 성장하면서 생기가 가득할 나이, 꽃으로 보자면 이제 막 봉오리가 피려고 하는 나이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지금 이런 자식을 바쳐야 합니다.

만약 이삭이 불효자였고, 하도 속을 썩여서 "차라리 없는 게 낫다."라고 생각을 했다 해도 자기 자식을 잡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현대를 열었던 신앙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이야기를 다양한 버전으로 풀어가면서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여러분!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면 과연 그 이후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아들이기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만약 칼을 거두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또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이라면서 자기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를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아들 이삭도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고, 또 이삭 또한 아브라함에게는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놓인 자리에 대해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신앙은 그저 한낱 행위로 단번에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의 휘둘림도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서 있는 자리는 단순히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곳은 인간의 모든 논리와 신앙적 기대가 완전히 파산하는 '심연의 자리'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의 유일한 통로인 이삭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약속의 근거를 제거하라는 명령은 곧 아브라함의 세계관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자기 위반'입니다. 약속을 주신 분이 그 약속을 스스로 파괴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이삭이 죽는다면,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려 얻은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 됩니까? 신실하지 않은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아들을 잃는 슬픔을 넘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지탱해 온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앞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헤아림으로는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이 '불합리함' 속에 아브라함이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입을 엽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Hineni)"

창세기 22장에서 "여기에 있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두 번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이고, 한 번은 이삭이 아브라함을 찾았을 때입니다. 22장 7절을 우리말로 "얘야, 왜 그러느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 이삭이 "아버지"라고 부르자, "얘야, 내가 여기 있다."이렇게 답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이삭 앞에서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한 이 고백은 그저 가벼운 답변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모든 논리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약속마저 이해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지만, 나는 여전히 이 고통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라는 실존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그저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는 대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확신, 하나님이 결국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여준 진짜 신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신앙은 '무너져도 하나님 앞에 머무는 능력'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 머리로 이해되는 하나님 즉 그동안 내가 만들었던 우상은 죽이고, 나의 계산 저편에 계신 진짜 하나님을 향해 내딛는 '절대적 신뢰'의 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훗날 그의 손자 야곱이 가족을 속이고 도망치다 지쳐 쓰러져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 그 처절한 실패의 자리에서 "여기가 하나님의 집(베델)이었구나"라고 깨달았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야 하는 비극의 산 모리아에서 오히려 진짜 하나님의 현존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살다 보면 '하나님의 자기 위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면 그렇게 하시면 안 될 것 같은 날들이 있습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고, 신실하다 믿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배신하는 것 같은 어둠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때가 우리들 안의 새겨놓은 하나님에 대한 우상이 파괴되고, 진짜 하나님을 만날 기회일 것입니다.

신앙은 답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답이 없는 심연 속에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며 그 자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신뢰의 자리에서만, 비로소 이삭은 '나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의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을 불렀다고 그렇게 쓰여 있는데, 하나님이 내신 마지막 시험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가 만들어 낸 우상,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몽상을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

다시 니고데모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육체적인 언어로 생각합니다. 오해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해 줍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성령은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성령의 활동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신비의 영역이다. 영적 거듭남은 세상의 것으로는 이룰 수 없다."

오늘 이야기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깨달았을까요? 혹시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으셨나요? 거듭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데 요한복음 7장 45-52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붙잡아서 곤경에 빠뜨리려고 할 때, 그를 변호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또 19장 39-40절을 보면 니고데모는 엄청난 양의 몰약에 침향 섞은 향료를 가져와서 예수의 시신을 안치하는 일에 함께 합니다. 이런 구절로 보아 분명 니고데모는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였고, 이런 행위 모두가 자기 삶에 전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위협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해 나갑니다. 자기 동료들이 전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말로 예수를 변호하고, 예수를 3년간이나 따르던 제자들마저 도망가고 아무도 없던 장례 자리에 나타난 니고데모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만큼이나 애매모호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은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적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한 가지 영적 거듭남은 자기 존재를 거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훨씬 더 깊은 차원으로 계속 파고들어 이전 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은 니고데모와 같은 지성적 탐구뿐만 아니라 도덕적 회심,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존재적 투신에서만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니고데모처럼 묻고 또 묻는다면, 아브라함의 자리에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바람 같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참 교인을 희망하며]

1885년 미 감리회 소속인 아펜젤러 목사가 시작한 인천 내리교회(당시 제물포 교회)에는 1892년 존스(G. H. Jones, 조원시)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합니다. 부임 직후부터 존스 목사는 강화 지역 선교를 시작하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외세에 민감했던 강화 지역민들의 반대로 강화 남문에서 쫓겨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내리교회 초기 전도인이었던 김기범, 이명숙의 제안으로 계(契)를 조직하고 곗날을 주일로 하여 교회로 끌어들입니다. 선교사는 곗돈과 계모임에만 관심이 있는 곗군 교인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곗군 가운데 한 명이 돈을 챙겨 도망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계가 깨지자 곗군 교인들은 교회 출입을 끊었고 교회 평판도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혹시 교회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러 온 게 아닌가 했더니만 "우리가 계속 교회에 나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곗군 교인이었지만, 말씀을 듣다 보니 그 말씀이 너무 좋아서 계속 나오고 싶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승환'이라는 분이었고 신앙인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의 신앙이 성장하자 선교사가 세례를 권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세례를 받아야지요. 그러나 세례받기 전에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술집을 하는데 이것을 정리하고 세례를 받겠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어머님이 강화도에 살아 계신데 이 좋은 복음을 나보다 어머님이 먼저 세례를 받은 다음에 제가 세례받겠습니다."

그래서 주막을 정리하고 고향인 강화로 돌아간 이승환은 농사를 지으면서 늙으신 어머니를 전도했고, 존스 목사를 초청해서 어머니에게 세례를 받게 합니다. 그러나 고향의 김초시 양반 가문에서 서양 오랑캐가 우리 땅을 밟으면 쫓아가서 그 집을 불태우겠다고 반발하자, 이승환은 어머니를 업고 선교사가 타고 왔던 배로 와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승환 씨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강화의 첫교회 교산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나라 이 땅이 어렵고 힘든 시절 그리스도교는 조선 민중들의 안식처였고, 그래서 때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또 먹고 살기 위해 교인이 되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복음으로 삶이 변하고 새 생명을 얻어 거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우리에게 신앙을 전수해 준 믿음의 선배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이며,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묻고 생각하고 실천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울 때에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듯이, 예수님과 더불어 고난의 길을 갈 때에도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으로 거듭나십시오.

언제 어디에서나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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