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슥 4:1-6, 빌 1:3-11, 요 12:20-29)
설교문
[고난 주간의 시작과 예수님의 수난 예고]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자신이 많은 고난을 겪고,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한 제자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기적과 놀라운 능력을 떠올리면서 예루살렘에서도 그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제각기 흥분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으로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로마도 물리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에게 권력의 자리를 나누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하고, 또 다른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놓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시자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그래선 안된다"며 예수님을 붙들고 거칠게 항의하면서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심한 말까지 하시지요. 그러자 제자들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두려움과 비극적 죽음의 예고로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무지한 제자들의 욕망과 어리석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이런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저는 오늘 이 말씀 때문에 요한복음서 저자가 분명히 공관복음서의 존재를 알았고, 그것을 깊이 묵상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공관복음서를 만들어 낸 이들의 신앙고백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한층 더 깊게 하고 끌어올리는 자신만의 복음서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장면을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매우 괴로워하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 조금 나아가셔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마가 14:32-35).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다릅니다. 죽음이 오히려 영광이고, 바로 이 때에 이 일을 하기 위해 왔다고 하시며, 하나님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했으니, 분명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실패처럼 보이고,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처럼 여긴다면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패가 아니요, 패배도 아니고, 오히려 영광을 받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떨어져 자기를 드리는 씨알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단순히 로마제국의 형벌이 아니라,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고 섭리라는 것을 요한복음서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약한 신앙과 강한 신앙]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똑같은 예수님을 보았는데, 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다르게 예수님을 묘사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괴로우셨을까요? 담대하셨을까요? 아니면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한 것일까요? 둘 중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일까요? 그리고 제자들과 우리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비극일까요? 영광일까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른 예수님, 어떤 경우는 정반대의 예수님 모습을 그리는 것은 바로 복음서를 쓴 이들의 상황과 자기 신앙의 색깔과 고백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향린교회에서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한 마음이지만 저마다 신앙의 분위기와 강조점과 따르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첫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처음 신앙에 입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신앙공동체에 투신한 이들이 있고, 신앙이 강한 이들이 있고, 아직까지 믿음이 약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구성원들은 개별적 사항들에서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비슷했는데, 어떤 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은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나, 어떤 교인은 고기를 먹을 때마다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편하게 여기면서 꺼렸습니다(고전 8:1-13). 어떤 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교인은 결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전 7장).
초대교회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교인은 잘 믿다가 시험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변절하기도 하고, 어떤 교인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고, 교인끼리 싸워서 세상 법정에 서로 고소 고발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늘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딴 소리를 하고,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새롭게 변화 받고 평생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을 향하여]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각양각색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바울 사도께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밝힙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바울의 이 기도는 바로 저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교인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우선 우리들의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사랑과 지식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이 지식을 통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종교적 지식, 성경 지식, 교리를 많이 알고 있는 교인이 때때로 교만해져서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숙한 신앙, 건강하고 좋은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르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향린교회가 마가복음서 강의라든가, 신앙특강, 각종 소모임들의 공부 모임을 통해 한창 배움에 애쓰고 있는데, 바로 이런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니기에(로마 10:2) 문제라고 한 바울 사도의 말씀이나,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세아 4:1, 6)는 호세아 예언자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꾸 추락하는 한국 개신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하여 올바로 알고 믿어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향린교회로 부르신 이유 또한 여기에 있고,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복음의 진수를 제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신앙특강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올바른 앎이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묻지마 믿음'은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많은 교인이 이단에 넘어가고, 거짓 예언자나 삯군 목사들에게 속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배우는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질문하고, 여러분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좋은 책들도 찾아 읽으십시오.
오늘 바울 사도는 여러분의 사랑이 모든 통찰력으로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또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통찰력이란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과 연결하여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간접적으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 책이나 영상, 누군가의 조언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력과 분별력은 제 스스로 도전해보고 경험해 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과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지식을 줄 수는 있지만, 통찰력과 분별력은 여러분 스스로가 깨우쳐 나가야 합니다.
통찰력과 분별력을 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뛰어들어 도전해 보는 것입니다. 때로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면 낯설고 미숙해서 쉽지 않고 실수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해 보아야만, 몸으로 겪어야만 성장하는 법입니다. 준비를 잘하여 실수를 줄이되,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과감하게 나가 보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통찰력과 분별력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둘째로 그 씨앗에 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자꾸 하나님께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떠올리는데,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침묵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뭐라 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자신이 했던 활동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자기 행동과 말과 생각을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그런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기본입니다. 자기 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해낼 때 통찰력과 분별력이 자라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기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하라"(살전 5:22)는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악에 물들지 않도록,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한 더 좋은 방법은 악한 것을 피하는 데 집중하는 것보다, 오히려 의로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악하고 더러운 것에 물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극적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 선을 펼쳐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한계가 아니라 중심에서, 약점이 아니라 강한 곳에서, 인간의 죽음과 죄책이 아니라, 삶과 선(善) 안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싶다네. ~~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실패한 곳, 한계에 있지 않고, 마을 한가운데 있지. ~~그리스도는 인간을 삶의 한 가운데서 붙잡지." 그렇습니다. 향린 식구들의 믿음은 삶의 한복판에서, 이 세상 가운데 선을 만들고 더 좋은 것을 이뤄내는 곳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모습]
그렇다면 성숙한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어떤 열매가 맺힐까요? 세계 성공회의 수장이었던 로완 윌리엄스 신부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교>, 59-71p 참조)
먼저 성숙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자신을 놓아 둡니다. 오늘 읽은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의 이야기인데, 그들 앞에는 넘어야 할 산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슥 4:6)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성숙한 신앙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하나님 앞에 놓아두고, 하나님의 영에 자신을 먼저 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고, 또 내 능력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기댈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긴 시간 속에서,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은 올바른 의미에서 자기 객관화를 가능케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습니다. 초조해하지 않고, 스스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언제든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신뢰하게 합니다.
둘째로,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가치 있게 여기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온 우주를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사실 선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이 선물을 거부하고 우리 마음속에, 주변에, 사회에 장벽을 세워나간다면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영원에서 온 선물로 여기고, 이를 나누며 산다면 우리는 사랑의 세계에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이유는 거룩한 사랑 안에서, 이 사랑을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소중한 선물이 됩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 또한 신성한 선물입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물질적 환경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여기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 모든 이들, 모든 순간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활동가였던 시몬 베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신에게 침묵으로 순종한다는 것을 깨닫고 "덧없이 출렁거리는 파도나 거의 영원한 산주름에 깃든 중력"에서 참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선물임을 알고 깨달아 감사가 절로 나오는 삶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참이라면 우리는 신앙을 통해 인간은 본래 서로 친밀하게 관계 속에서, 주고, 또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본래 인간의 길입니다. 하나님, 사람, 만물과 사랑의 관계에 헌신할 때, 우리는 관계를 통해 더욱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이 사랑의 관계를 거부하고 공격하는 태도와 행위들에 저항합니다. 먼저, 신앙은 감정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인 태도와 시선에 저항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태도와 시선이란 세계와 인간을 긴 안목으로 보지 못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즉각적인 필요와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에 함몰됩니다. 이러한 미숙함은 때때로 탐욕, 정욕, 무책임함으로 드러나며 다른 이들을 정죄하거나 미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신앙은 타인을 착취하는 이기심에 저항합니다. 이러한 이기심은 작게는 개인적 차원에서, 넓게는 집단적 차원에서 자신의 결핍에만 골몰하게 만들며 이를 채우는 데만 신경을 쏟게 만듭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 모든 환경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끌어다 쓰려하지요. 이러한 태도는 우리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고 망가뜨립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관계를 맺을 때마다 자기 유익을 계산하는 태도에 저항합니다. 이러한 태도 밑바탕에는 다른 사람, 다른 집단, 다른 국가, '나'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것이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 '나'를 위해 그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결국 자신처럼 이해타산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지레 단정 짓습니다. 이처럼 냉소적인 태도는 우리의 삶을 갉아먹을 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제대로 보도록 해 줍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내면을 풍성하게 해주며, 그 어떤 외부적 곤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외부의 곤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고통의 상황과 죽임의 문화를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고난을 만들어 내는 죄악의 구조에 우리가 물들어 거기에 한몫할 수도 있고, 고난 가운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내면의 힘을 키운 사람은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익힙니다.
마지막으로 도종환 시인의 "아홉 가지 기도"라는 시를 읽어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아홉 가지 기도 / 도종환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풍성한 삶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흔들리는 풍랑을 보지 말고
꿋꿋하게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