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슬픈 사월과 한(恨)의 사제"

2026년 4월 12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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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9:18-29, 벧전 3:13-19, 눅 24:17-24)

설교문

[노아의 트라우마]

2014년 3월에 개봉한 노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블랙스완>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제작을 했고, 러셀 크로우가 노아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 중에 뱀의 가죽으로 안수를 한다든지, 타락한 천사들을 미화하는 장면이 나오고, 구체적인 내용들이 성경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인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영화 자체로서는 꽤 볼만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동안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순종하는 노아' 즉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만드는 노아가 나오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인류 멸망 앞에서 '고뇌하는 노아'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노아를 불러서 무법천지로 변해 버린 세상을 멸해야겠다고 말씀하시고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확한 계시가 없는데도, 타락한 인류의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며, 최후의 인류인 자신마저 없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가 그치고 노아와 노아 가족은 살아남지만, 노아는 이 신념 때문에 괴로워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은 성서 본문에 대한 새로운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어 온 저는 당대에 의로웠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노아(창 6:9)가 왜 홍수가 끝난 이후에 이런 수치스런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모습이나, 깨어서 자기 아들에게 저주를 내린 것은 정말로 노아답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노아의 입장에서 홍수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하고 무법천지였다고 해도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을 쓸어 없애버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제 아이들에게 읽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꼭 그렇게 유황불을 내려야 하느냐라고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죄악을 없애는 방식이 이 방법뿐이었을까요? 그러나 그것보다 제가 더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과 가족만 남겨 놓고 모든 사람과 온갖 생명체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노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홍수 이야기를 단순히 옛날이야기처럼 읽지만,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실제로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가정을 하고, 만약 우리 자신이 노아였다면, 그래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몰살당하고 나만 살아남았다면, 그것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당시 영화를 보고 저는 집에 와서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눈에 전혀 띄지 않았던 구절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20절입니다. "노아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오늘 성서 본문은 노아가 밭을 경작하는 처음 인물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이미 바뀌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면서 심은 것이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곡식이 아니라 술을 만드는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노아의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노아는 지구 생명체들의 거대한 죽음을 목격하였고, 그것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 그리고 트라우마로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외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심리적 외상'을 말합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대형 사고와 같은 대규모 참사에서부터 타인에게 당한 폭력이나 강간 등 신체적, 성적, 정서적 학대는 모두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와 같은 정신장애를 유발하는데, 이런 증상이 있는 환자는 꿈이나 상상을 통해 트라우마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다시 경험합니다. 그래서 극심한 불안과 공포, 무력감, 수면장애에 시달리게 되고,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힘들어집니다. 이런 증상은 사건이 벌어지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새로운 충격을 받으면 이 같은 증상이 쉽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즉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대부분 사람은 길 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면 그냥 산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폭행 피해자들은 그가 자신을 추행하려 한다고 생각하면서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보통 평범한 아이들은 엄격한 학교 선생님을 만나면 겁을 먹는데 그치지만, 폭력적인 아버지나 계부에게 심하게 맞은 경험이 있는 아이는 엄한 선생님을 보면 자신을 고문할 사람으로 여기며 참았던 분노를 쏟아붓고 공격하거나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구석으로 숨어 몸을 웅크립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비 오는 날씨는 별일이 아니겠지만, 노아는 비만 내리면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뜰 때,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빗소리가 들리면 언제든 공포가 밀려왔고, 홍수 사건 이후 노아는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곡식보다 먼저 포도나무를 심었고, 술이 아니고서는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주 4.3 사건과 우리의 트라우마]

홍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노아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한 것은 지난 100년의 세월을 겪었던 우리 한국인들의 삶 또한 심각한 정신적 외상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고, 폐허가 된 땅에서 수많은 사람이 허탈감에 빠져있을 때, 미국계 영국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 9. 26.~1965. 1. 4.)은 '황무지'라는 장편의 시를 쓰면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에게도 이제 4월은 실제로 잔인하고 슬픈 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주 4.3 민중항쟁, 4.19 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교회력으로는 부활을 축하하는 계절이지만 우리의 아픈 역사는 잊을 수 없는 한(恨)이 되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제주 4.3 민중항쟁의 78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주 4.3 사건으로 명명되는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제가 다수의 주민이라고 했지만, 7년의 세월 동안 3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4.3 사건은 군사정권 동안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었기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 31일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이후에야 제대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4.3 제주 민중항쟁에 대해 공부를 해 보면 이 사건은 단순히 좌익 세력의 무장 봉기와 토벌대 사이의 무력 충돌, 그리고 이후 토벌대의 진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가 않습니다. 일제 식민지의 고난, 갑자기 다가온 해방 정국의 혼란, 친일파들의 경찰 등용,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 전쟁 등 매우 복잡한 요소들이 이 사건과 연결되어 있고, 이 사건과 연결되어 벌어지는 여순 사건과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주 4.3 민중항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반성하고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데 많은 기독인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1945년부터 1953년 사이 북쪽에 있던 80만에서 12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이들은 1946년 이후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 개혁과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탄압을 받았습니다. 전쟁 중 인민군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경험들이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학살의 피해자인 동시에 북한 지역에서, 그리고 남한으로 내려와서 월북자나 좌익 가족을 학살하는 가해자들이었지만, 이들이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남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45년 말에 월남한 사람들은 대체로 기독교인이거나 계층적으로 중상류층에 속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군정 산하 각 기관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다수의 청년이 영락교회로 모였고, 영락교회 청년회 중 일부는 이후 서북청년회 같은 반공단체로 발전합니다. 이들은 군과 경찰에 들어가서 남로당을 평정하는데 신명을 바쳤습니다. 이들이 제주도에 내려와서 자행한 폭행과 테러는 너무나도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만행을 다룬 시 하나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오라리"입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 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세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오라리는 제주도 마을의 이름입니다. 제주 4.3 사건은 소수의 희생자를 남기고 며칠 동안 소란했던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반대를 외치는 제주도민의 무장봉기라 하지만, 이들의 무장은 구식 일제 소총 27자루, 권총 3정 그리고 죽창이 그 무장의 전부였습니다. 봉기에 참여한 사람도 수백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은 매우 소수였고, 나머지는 미군정의 그릇된 행정과 경찰들의 만행에 분노한 제주도민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꿰뚫어 본 김익렬 중령,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던 9연대장은 무장봉기를 즉시 진압하라는 미군정을 설득하여 "인민유격대" 사령관이라는 김달삼을 만나 협상을 합니다. 그런데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릅니다. 그래서 민가 열채가 불탔는데, 경찰은 이것을 좌익의 소행이라고 우겼습니다. 한편 미군정은 김익렬 중령을 해임시키고, 9연대는 11연대에 편입시킨 뒤 그 자리에 박진경 중령을 앉혔는데, 이 사람이 취임하면서 이런 훈시를 합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이런 훈시와 함께 부임한 지 한 달 열흘 만에 10대와 부녀자들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를 무려 6,000명이나 잡아 가둡니다. 제주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통해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 참혹한 역사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 24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즉 스승 예수의 처형을 목격하고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고 기록합니다(17절).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이가 허망하게 죽임당하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21절)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는 절망의 고백입니다. 학살의 광풍이 지나간 제주에서, 혹은 세월호의 차가운 바다 앞에서 우리 국민이 내뱉었던 탄식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살아남았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이들의 무거운 발걸음, 그것이 바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의 발걸음이었고, 트라우마에 갇힌 노아의 발길이었으며, 오늘날 한(恨)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제주 4.3 이야기를 주로 말씀드렸지만 이후에도 한국 전쟁을 비롯해 한국 사회에서 계속된 엄청난 사건들로 인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恨)의 치유]

엠마오의 제자들은 곁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절망 섞인 대화 속에 끼어드시고 그들의 한(恨)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 곁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스러져간 제주의 영혼들, 세월호의 차가운 바다에서 사라진 생명들-주님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도 내려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베드로 전서를 보니,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도 선포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매우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 여기에만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는 모든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옥에 갇힌 것처럼 죽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어쩔 도리 없이 죽음으로 완전히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가망 없는 이들과도 함께 하셨고, 이들에게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대부분 사랑, 그리고 상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비극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간 욕심의 산물로 태어난 제국주의의 그늘 속에서, 전쟁 속에서, 탐욕과 경쟁 속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한편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타인의 고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계속 지켜보고 있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시작된 중동의 전쟁은 주변 국가들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휴전이 말해진 뒤에도 바다는 막히고, 도시들은 무너지고, 레바논의 수많은 주민은 여전히 죽음의 공포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은 최근 펜타곤에서 열리는 월례 기도회에서 이런 기도문을 낭독했습니다. "이 부대에게 폭력을 행사할 명확하고도 정당한 목표를 허락하소서."(Grant this task force clear and righteous targets for violence) "이 모든 탄환이 우리의 위대한 나라와 정의의 적들을 정확히 맞추게 하소서."(Let every round find its mark against the enemies of righteousness and our great nation) "그들이 하는 모든 결정에 지혜를 주시고, 앞으로의 시련을 견디게 하시며, 깨지지 않는 단결력을 주시고,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향한 압도적인 폭력을 허락하소서"(Give them wisdom in every decision, endurance for the trial ahead, unbreakable unity, and overwhelming violence of action against those who deserve no mercy.)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말 다릅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배신당하고 고통받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눈물 없이는 살기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에도 불의한 세력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맘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대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희망과 비전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불의한 이들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고, 또 그런 상황에서도 참된 복음의 소식을 전하셨듯이 우리도 이 땅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들을 걷어 내는데 애써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겪은 그런 가슴 아픈 감정들을 인정하고, 함께 경험해 주고, 참고 견딜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늘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을 지니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홍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노아가 만든 구원의 방주만을 기억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생명체가 죽음의 홍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그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경험했던 노아의 트라우마도 치유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의 부끄러움, 죄책감, 그 엄청난 고뇌와 혼돈을 알았다면, 그의 벌거벗은 존재를 배려하며 그의 아픔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어야 합니다. 오늘 막내아들 함에게 쏟아져 내린 저주는 바로 트라우마의 흔적이고, 그것을 까발리는 자에게 내려진 분노의 찌꺼기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 들어 있는 '한(恨)의 사제'라는 말은 고(故) 서남동 목사님께서 쓰신 글의 제목입니다. 안병무 선생님과 함께 한국의 신학으로 세계 신학계에 주목을 받았던 민중신학을 시작하고 연구하신 서남동 목사님은 민중의 한(恨)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길에 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해자들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이 땅에서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은 낮은 자들의 아픔을 씻어 주는 그리스도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험난한 세월을 살았던 한국 사람들, 곧 우리들에게 4월은 더 이상 잔인한 달이 아니길 빕니다. 따뜻한 햇볕이 우리를 감싸듯 좀 더 따스한 기운들, 평화의 소식들이 우리들을 감싸길 빌어 봅니다. 남북도 다시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강대국들 사이의 패권 경쟁에 휘둘리지 말고 균형 잡힌 외교를 통해 우리가 살아갈 길,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길도 찾아내길 기원해 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새봄을 재촉하듯, 지난 역사의 어두운 그늘이 도리어 우리의 밝은 미래를 약속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꽃샘추위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고, 겨울의 강추위와 폭설을 이겨내고 피는 매화꽃이 참으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듯이, 우리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더욱 희망찬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버겁고 힘들 때,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은 모두 싫다면 그냥 묻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면 밝은 미래 또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보듬어 나가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살아 있지만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인생, 즉 "유생무생(有生無生)"의 삶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을 잘 양육하는 것을 그저 한가로운 사람들의 일이라면서 제쳐 두거나, 옛 성현들의 책을 읽고, 세상의 이치를 따져 보는 일을 그저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경박한 이들이다."(治心養性邊事目之爲閑事, 讀書窮理 指爲古談, 世有一等輕薄男子.)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유생무생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밝은 눈을 가지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픔을 지니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역사 속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했던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유가족들을 기억하고, 남겨진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힘을 냅시다. 주님께서 이 세대의 죄를 용서하시길,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쌓인 한(恨)들을 봄바람에 눈 녹듯 모두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을 풀어놓고

그동안 쌓인 한(恨)들을 녹여 내십시오.

그 힘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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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