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렘 1:11-19, 엡 5:15-20, 눅 12:54-56)
설교문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분별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예언자들은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하지만, 한편 하나님께 등을 돌려 불행을 자초하고 파멸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고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신앙이 식어가고 흔들릴 때, 회개하라고 외치며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모든 사람이 "괜찮다"고 말할 때, "평안하다"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숨어 있는 위기를 알아채며 닥쳐올 재난을 예상하면서 끙끙 앓아눕고, 어떨 때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예민하게 굴기도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칠 재앙을 예언해야 했기에 혼인하여 자녀를 두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인간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예언자적 삶을 살도록 요청했는데,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들리는 예레미야의 지적과 경고에 거칠게 반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무쳤으나, 거역하는 백성들의 저항과 박해로 인해 예레미야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망가져 갔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지 않을 수 없었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은 이런 이유로 붙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구약성서의 본문은 예레미야가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묻습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합니다.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 있다." 알쏭달쏭한 이 대화는 히브리어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샤케드"(שקד)입니다. 우리말로 살구나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아몬드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아몬드나무를 뜻하는 샤케드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지켜본다는 의미의 "쇼케드"(שקד)와 같은 자음을 가지고 있고 모음만 달라서 발음이 매우 흡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소명을 내리시면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해질 말씀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해주시면서 아몬드 나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몬드 나무는 겨울철의 우기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덥고 건조한 날씨에 앙상하게 가지만 남았다가, 우기가 시작되면 다른 나무들은 겨울잠에 빠져들지만, 유독 아몬드 나무만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면서 깨어납니다. 그래서 겨울에도 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는 나무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샤케드'와 '쇼케드'라는 말놀이를 통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힘주어 선언합니다.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기까지 깨어 지켜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번째로 보여주신 환상은 물이 끓어 넘치는 솥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재앙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시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습니다. 다섯 명의 왕이 유다를 차례로 다스리던 시절을 모두 겪었는데, 이때는 여러 가지로 엄청난 정치 변혁의 폭풍이 몰아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조심하라고 그렇게 간절히 경고했던 나라,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아시리아 제국의 세력이 이제는 무너져 내렸지만, 잔인하고 가혹하기로는 아시리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새 강대국 바벨론이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활동 말기에 결국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유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자답게 이런 모든 정치적 상황을 신앙의 눈을 가지고 읽어 냅니다. 이런 재앙이 내린 이유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숭배하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허위의 평안을 붙들고는 새로워질 수 없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무너질 것은 무너져야 하고, 드러날 것은 드러나야 하며, 죄와 거짓 위에 세워진 질서는 해체되어야 다시 하나님의 정의 위에 설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예언은 수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힙니다. 그 누구도 망한다는 이야기를 좋아할 리가 없고, 망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난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두 번의 질문이 계속 마음에 꽂혔습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여러분은 요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뉴스만 틀면 들려오는 전쟁과 온갖 소식들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시대를 어떻게 읽으며, 또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약의 말씀도 맥을 같이 합니다. 주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과연 우리는 이때를 어떻게 분간해야 할까요?
2026년도 벌써 넉 달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희망의 징조를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너짐의 징후만 느껴집니까? 우리의 미래는 낙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미 비관의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일까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전 세계는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 세계적 변화의 주된 현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기후재앙, 둘째는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의 삶 전체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심각한 기후 비상사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기상기구(WMO)가 2026년 3월에 발표한 『2025년 세계기후 현황』 보고서는 충격적입니다.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1년이 모두 관측 역사상 가장 더운 11년으로 확인되었고, 2025년은 산업화 이전(1850-1900년)보다 약 1.43℃ 높은 기온을 기록하며 역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더운 해였습니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겠다는 목표는 이제 매우 위태로워졌으며, 앞으로 몇 년 안에 그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https://wmo.int/publication-series/state-of-global-climate/state-of-global-climate-2025?utm_source=chatgpt.com)
통계 수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미 전 세계 노동자의 약 70%, 24억명이 이상이 과도한 열에 노출되어 있으며(https://www.ilo.org/sites/default/files/2024-07/ILO_OSH_Heatstress-R16.pdf?utm_source=chatgpt.com), 특히 농업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가장 취약합니다. 기후재앙의 피해는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가장 깊이 떨어집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화 이전의 152%에 달하는 423.9ppm을 기록했으며, 이는 적어도 80만 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깊은 당혹감 앞에 세우는 것은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입니다. 저는 그동안 세상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발 빠르게 대처하면서 목회해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공지능의 탄생과 변화를 보면서는 전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단계에 다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기술적 능력이 너무 앞서 나가서, 인간이 대처할 시간 자체를 확보할 수 없고, 이 상황에서 목회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오픈 AI에서 앞으로 인공지능이 어떤 단계로 발전할지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 5단계인데, 첫 번째는 인간과 대화하는 단계 즉 챗봇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추론의 단계이고, 셋째는 협력자 즉 에이전트로서 실행하는 단계, 네 번째는 인간의 창의성마저 넘어서는 혁신의 단계,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조직의 단계입니다. 거대 언어 모델을 학습하여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챗봇의 형태로 등장한 것이 2022년 11월 30일인데, 올해 초에 벌써 세 번째 단계인 협력자 모델이 등장했고, 추론 능력에서는 이미 특정 영역에서 최고 수준의 인간 능력에 근접하거나, 때로는 능가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앤트로픽이 개발한 'Claude Mythos Preview'는 소프트웨어 취약점을 찾아내고 악용하는 능력이 매우 높아, 방어적 사이버보안 목적의 제한된 환경에서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례는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 사회의 안전장치와 제도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드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기존에 나온 다양한 인공지능들은 인간이 산출해 낸 언어 자료에서 학습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앞으로 피지컬 AI가 발달하고, 인간이 산출해 낸 고급 지식에도 학습이 일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배운 인공지능이 자연과 문명 세계와도 직접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지능을 훨씬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인공지능(AI)의 병렬 처리와 인간 뇌의 병렬 처리는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정보를 처리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인공지능은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정확도 면에서 뇌보다 뛰어날 수 있지만, 뇌는 적은 에너지로 복잡하고 유연한 인지 능력을 발휘하는 초고도 비정형 병렬 시스템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지능과 달리 한 모델의 인공지능이 습득한 것을 복제와 배포를 통해 동시에 전 세계 모든 인공지능이 공유하는 '동시 확산성'이라는 면에서 평범한 인간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전체 인공지능의 발달로 이어지는 이 현상은 영화에나 나오는 스카이넷과 같은 슈퍼컴퓨터가 다스리는 세상을 예측하게 만듭니다. 또한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이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기존의 모든 도구를 뛰어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제 지구 위 인류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태, 곧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지능과 공존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느냐에 따라 이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입니다. 즉 그동안 인간 문명을 움직여 온 언어·정보·제도·권력 구조 전체가 인공지능이 제안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재편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지능보다 더 고도화된 인공지능이 인간과 지구 생명체들의 안전을 자동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과제는 인공지능을 어떤 방식으로 인간지능 아래 두어서 인공지능의 특별한 능력의 도움을 받아 더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연 세계와 문명 세계가 동시에 거대한 전환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하는가?
[코로나 이후 사회와 목회 환경의 변화]
지난 2020년부터 3년 동안 전 세계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전염병을 겪었습니다. 그 시기에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우리 삶 깊숙이 밀려들었고, 그것은 목회의 방향과 방식에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면으로 이루어지던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상 공간의 현실화는 기존 교인들의 신앙 형태를 바꾸게 했는데, 저는 이것을 '신앙의 유연화 및 다변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선 한국 사회는 매우 빠르게 세속화를 겪고 있습니다. 비종교인이 60%가 넘습니다. 2024년에는 종교인구가 다시 살짝 반등했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종교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종교적 인간이 기존의 종교 제도에서 누리던 많은 것들은 이미 문화와 예술, 스포츠,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굳이 성당이나 교회를 찾지 않아도 삶의 의미와 위로와 공동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교"가 생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 온라인의 활성화는 종교의 상품화 과정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제는 교인들이 예전과 같은 내 교회라는 소속감과 정체성이 유지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TV 프로그램을 돌려가며 자신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시청하듯, 이제 온라인 동영상으로 나오는 수많은 신앙 관련 영상들을 보면서 자신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예배와 설교를 찾아가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교인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한 교인이 여러 교회 아니 여러 종교에 소속될 수 있는 다중 소속의 시대가 되었고, 자기 마음에 드는 종교 프로그램들을 찾아 부유하는 떠돌이 신자 및 가나안 성도가 200만도 훨씬 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온라인 환경이라는 것은 먼저 선점한 소수가 독식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정보가 일정한 공간에 한정되어 있을 때는 각자의 영역에서 생존할 수 있었지만, 정보가 온라인을 타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흘러 다니는 순간, 그 정보를 잘 사용하는 가장 뛰어난 몇 사람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매우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가 일어나듯, 교회에도 이제는 그런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수의 대형 교회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교회를 제외하고는 다수의 교회가 점점 시들어지는 현상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캐나다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의 허원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하여 캐나다 교회들이 겪는 현실을 들려주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1992년 76만 명이 넘었던 교인들의 숫자가 2035년에는 11만 정도로 줄 것으로 예측한 보고서를 내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더 이상 서구 사회의 현상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적 뿌리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더 급격한 쇠퇴를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세가 이러하니 한 개인이 뭘 할 수 있냐면서 그냥 두 손 두 발 놓아두고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저는 뭐라도 해보려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선후배 목사들과 함께 지난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제3차 기장미래포럼"이라는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30대부터 50대까지 상대적으로 젊은 약 100여명의 목사들이 모여서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그에 따라 어떻게 개 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개신교단과 마찬가지로, 우리 교단도 총회 구조상 30-40대 젊은 목회자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잘 바뀌지 않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빠른 사회적 변화에 대처할 수 없기에 다른 방식을 도모해 본 것이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향린교회도 이런 변화에 따라 기존의 구조와 관행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미래선교위원회 활동이 올해로 마감됩니다. 이후에 2기 미래선교위원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작년에 들녘교회와의 도시농촌선교협력 30주년 행사를 했고, 국악선교회 예향도 마찬가지로 3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를 했습니다. 지방과 농어촌이 겪을 어려움을 예상하면서 우리의 도농선교협력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또 전 세계에 내어놓을 만큼 중요한 우리 가락 예배의 도전이 어떻게 또 교계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지 다각도로 생각해 볼 시점입니다.
당회는 워크샵을 통해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장기적인 과제들을 차례대로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후에 아마 전교인 공청회 등을 통해 지금 벌어지는 변화와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들 전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고,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망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폭삭 망하리라는 것을! 그것을 알리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어떤 고통과 고난을 겪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관적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보호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 주의 말이다."
당면한 과제를 잘 풀어가려면 그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거나 거짓말로 대충 때우려고 하면 상처는 더 깊어지고 얽힌 매듭은 점점더 심각하게 꼬이게 됩니다. 완전히 얽혀버린 이후에는 정말로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문제가 어디로부터 어떻게 시작되고, 그래서 지금의 상태가 어느 정도로 나쁜지를 안다면 바로 거기로부터 그 문제를 풀어가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것을 시키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략과 유다 왕국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재앙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해야 했던 예레미야 또한 비관적 전망만을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서 31장 2절에 보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역경과 고난을 뚫고 남은 자들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소구를 들고 흥에 겨워 춤을 추며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국으로 돌아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는 이들을 평탄한 길과 물이 많은 시냇가로 인도하실 것이라 말합니다. 유다는 다시 정의의 보금자리가 되고, 거룩한 산 예루살렘은 주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지친 이들은 새 힘을 얻고, 굶주려 허약해진 이들은 배부르게 먹을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을 것이며, 이제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심어 주고 새로운 언약을 세워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매우 혼란하고 어지럽다는 것, 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혼돈의 터널 끝에는 밝은 빛이 비친다는 것도 압니다. 문제는 이 혼돈의 터널을 뚫고 갈 굳센 신앙의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을 믿고 한 걸음 내딛는 자에게는 하늘의 지혜가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지혜로 문제를 해결한 이는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며, 세상의 어떤 강요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라는 말만이 아닙니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술 취하듯 시대의 공포와 유행에 휩쓸리지 말며,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지니고 분별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시대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듯이, 오늘의 교회도 시대를 보되 절망에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우리는 위기의 숫자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신음하는 생명들, 아파하는 이들을 봅니다.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제도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무너짐을 통해서 새롭게 일으키시려는 주님의 손길을 봅니다.
주님께서 물으실 때, 우리 모두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울에도 깨어 있는 아몬드 나무처럼 우리는 깨어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봅니다. 두 눈 부릅뜨고 주님께서 펼쳐가시는 놀라운 일들을 봅니다. 여기저기 주님께서 남겨 놓으신 이들이 활약하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건에서, 모든 것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한눈팔지 마십시오.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주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올곧게 걸어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