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왕상 18:17-21, 계 3:1-6, 눅 18:15-17)
설교문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어린이 청소년 주일입니다. 교회가 성인들의 공간만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의미 있고, 신나고, 즐겁고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날이 갈수록 어린이 청소년 교인들이 줄고 있습니다. 한 기독교 신문은 2030년이 되었을 때, 한국교회의 어린이/청소년부서가 90% 이상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https://gpnews.org/archives/81103). 물론 우리 사회가 수축 사회로 전환되면서 낮은 출생률을 보이는 것이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교회의 교육부가 소멸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서울노회에는 46개의 교회가 있는데, 어린이 청소년들이 몇 명이라도 출석하는 교회는 25개입니다. 그런데 이 중 13개 교회는 유아유치부부터 청소년부까지 다 합쳐서 10명도 되지 않기에 실제로 교육부 전담 교역자를 두고 교육 부서를 운영할 수 있는 규모의 교회가 12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져 주시기를 바라서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곁에 오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왜 막았을까요? 당시 어린아이는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아직 덜된 인간, 그래서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어린아이들에게 쓸 수는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행동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떠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제가 5년 전에 보았던 하나의 다큐멘터리 작품 제목입니다. 교회를 떠난 경험이 있거나, 떠나고 싶었던 15세에서 23세의 청소년, 청년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비판과 말들이 많지만 그래도 저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친다 해도, 그것은 몇몇 교회의 왜곡된 행태가 언론보도를 통해 과잉 대표되어서 그런 것이고, 다수의 교회는 그래도 저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 정말 한국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큐에 등장하는 어떤 청년의 한 발언이 제 마음을 깊이 흔들었는데,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납니다."
이 한마디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종종 농담 비슷하게 2023년 6월 29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셨던 강론의 일부를 인용해서 "교회에도 복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는데, 정말로 그러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곰곰이 따져 보니, 저조차도 그나마 좋은 교회들을 만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준 고향교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서 향린교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 교회를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만나러 교회 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이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기에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례가 등장합니다. 대개는 교회 안에서 같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에게 받았던 상처들입니다. 오늘 계시록의 말씀처럼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지 못한 채 신앙의 이름으로, 때로는 자기 편견과 왜곡된 열정으로 툭툭 던진 말들 - 바로 그 말들에 상처받아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어린이 청소년과 청년들을 대하는 무례한 태도부터 시작해서 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중에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뭐라고 해야지, 교회 내에서는~~ 서열, 싸움, 계급 뭐 이런 게 없어야 하는데 그게 있는 게 너무 싫었어요. 왜냐하면 보통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근데 뭔가 이 교회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더 가기 싫었어요."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잘 챙겨주고, 이렇게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회도 똑같구나."
첫 번째 사례들은 교회나 세상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입니다. 교회는 오래도록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쳐 왔건만 그 어느 곳보다도 자기 욕망 추구에 충실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비판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가족 중심성이 만들어내는 외로움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교회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특히 혼자 교회를 다니는 입장이다 보니까, 성탄 예배 같은 가족 행사나 예배가 있을 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혼자 복도나 빈 예배당에 들어가 있었던 거로 기억해요. 저의 존재를 모두가 아는데, 그렇다고 제가 낄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보통 다 5년 이상 함께한 사람들이었고, 누구의 딸, 누구의 집사님이시고. 뭐 이런 식으로 뭔가 계속 얽혀 있는 혈연관계이다 보니까 제가 감히 그 사이에 낄 수가 없더라고요. 함께 있는데도 외로운 곳이라면 더 이상 거기 있고 싶지 않았어요"
이와는 정반대로, 가족·혈연 중심성이 강한 교회에서는 또 다른 부담이 생깁니다. 부모의 신앙적 위치 때문에 자녀들이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일입니다. 다른 청소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뭐 그냥 집에 있으면, 거의 모든 장로님들 아들분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거든요. 정말 안부를 안 물어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알게 되고, 그러면서 좀 비교를 당할 때가 많았죠. 너희 아버지가 장로님인데 그렇게 살아도 되냐? 엄마가 열심히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데 네가 이렇게 행동하면 되냐? 그런 말이 좀 제일 듣기 싫고, 교회가 확 싫어진 순간인 것 같고,"
마지막 사례는 청년들의 사역 과부하입니다.
"교회가 아니고 이벤트 회사에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춤추고 워십하고 뮤지컬도 하고 이런 게 되게 많았었어요. 그때마다 이제 이벤트. 진짜 이벤트 회사처럼 뭔가 준비를 하게 되고, 9시 예배에 찬양단, 방송부하고, 11시 예배엔 주일학교 들어가서 교사하고, 저녁 예배 땐 찬양단의 워십팀 하고, 당시에 저 스스로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없었어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거고, 다 나중에 하나님이 갚아 주실 거고, 다 네가 하늘의 상급 쌓는 거고, 그런 게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었어요. 더 이상은 교회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돌들이 보면 자기 의지대로 맡는 스케줄이 거의 없잖아요. 저희도 거의 똑같았어요. 저희 의지대로 하는 사역이 없었고, 아이돌을 휘두르는 소속사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언가 많이 하고 있으면 신앙이 좋은 레벨처럼 그려져 있고, 아니면 낮은 레벨로 되어 있는. 사실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이 되는 거잖아요. 잠시 비끗하면 나는 그냥 레벨 낮아지는 거구나."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유와 평등, 상호 배려와 존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교회가 마치 세상의 회사처럼 되어 버렸고, 어떤 경우에는 세상보다도 더 무례하고 상처 주는 말이 무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런 일들이 자행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이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들이 떠난 교회의 모습 - 서열과 계급이 작동하는 교회, 가족이 아니면 끼어들 수 없는 교회, 청년들을 아이돌 소속사처럼 굴려 무언가 많이 해야만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는 교회 -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바알 신앙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만, 바알 신앙은 본질적으로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의 편에 서고, 약자를 보지 않는 신앙입니다. 화려한 무대 위의 아합왕이 한 줌 밀가루로 연명해야 하는 사르밧 과부에게는 무관심했던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출석 통계와 헌금 액수에는 민감하면서도, 정작 조용히 떠나간 한 청소년의 마음, 한 청년의 상처에는 둔감해진 것이 아닐까요? 어린이를 안으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들의 것이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도 멀어진 것이 아닐까요?
[한국교회 흐름과 어린이 청소년 목회]
그렇다면 우리 향린교회는 과연 어떨까요? 이런 이야기들은 다른 교회 이야기이고 우리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의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은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고 있을까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과도한 요구나 번영 신학이나 기복 신앙 같은 신앙의 왜곡은 덜 할지 모르지만, 탈종교화가 일어나는 오늘날 과연 우리 향린교회가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교회, 예수의 복음으로 가슴 설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교회 흐름을 분석한 연구들을 보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마주한 과제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 사람들이 제도권 교회를 떠나 개인적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 둘째, 1인 가구가 40%에 육박하는 시대에 정서적 돌봄 목회가 절실하다는 것. 셋째, 복잡한 프로그램을 줄이고 예배·말씀·공동체라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넷째, 교회의 공적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참된 제자 양육과 수평적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은 어떻습니까? 성인 목회에서는 모범적인 교회였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진짜 과제는 우리가 지켜온 신앙의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이어줄 것인가입니다.
오늘날 많은 어린이 청소년이 교회에 오지 않는 이유의 1순위는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정말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신앙 교육입니다. 지난 코로나 3년을 겪으면서 전 세계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는 더욱더 신앙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그저 주일예배만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많은 교인에게 주일예배 출석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은 여러 면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한 3년을 보내면서 코로나 이후 30%의 교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어린이 청소년들과 그들의 부모인 30-40대 교우들은 더 낮은 출석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급격한 세속화의 풍랑을 우리 교회도 피해 갈 수 없는데,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 또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 위에 세워지는 올바르고 단단한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의 시대를 그리스도교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로 거듭나는가, 아니면 그저 별 볼 일 없는 제도 종교로 추락하는가의 결정적 전환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 갈림길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사람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의 본문에는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인가를 놓고 아합왕과 엘리야가 논쟁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합왕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망친다고 말하고 있고, 엘리야는 아합 왕과 아합왕의 아버지인 오므리왕의 가문이 이스라엘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지금 아합왕이 주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긴다고 대놓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산으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는 연설을 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야훼가 하나님이면 야훼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오늘 성경은 전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합왕일까요? 아니면 엘리야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누구를 더 지지할까요?
이스라엘은 왕정을 택한 이후로 열두 지파 공동체가 꿈꾸었던 평등의 이상과 절대 왕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은 왕권을 둘러싼 쿠데타가 그치지 않았고, 그 혼란의 끝에 오므리 왕조가 등장하면서 평등 정신은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평등의 이상이란 왕을 세우는 군주제와는 계속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잘 조율해서 국가를 이끄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진 이후에 양 나라는 저마다 왕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절대 왕권에 기초한 자국의 번영과 발전을 꾀하였습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도 점점 강력한 군주의 힘이 작용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왕의 권력을 얻기 위한 계속되는 쿠데타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디브니 세력과 4년에 걸쳐 내전을 벌인 뒤에 왕에 오른 사람은 오므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므리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군사령관으로 왕 위에 오르자마자 야훼 하나님의 평등 정신을 단호하게 포기합니다. 그는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기면서 사마리아 땅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사유지로 삼고 거기에서 나오는 생산력과 노동력으로 강력한 개인 부대를 양성합니다(왕상 16:21-24). 오므리 왕조는 페니키아와의 상업동맹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남유다까지 예속국으로 삼았습니다(왕상 22:4). 그러나 그 대가로, 평등주의 야훼 신앙을 억누르고 왕권에 친화적인 바알 신앙을 백성들에게 주입했습니다. 부와 신앙을 맞바꾼 것입니다.
오늘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인물인 아합이 바로 이 오므리의 아들이었고, 그의 아내는 페니키아 연합 왕국의 공주인 이세벨입니다. 아합은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후 겉으로는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 전통인 평등을 존중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제로는 바알 신앙과의 혼합주의를 택하였습니다. 자기 아들 이름을 "야훼는 높으시다"라는 뜻의 '여호람'이라고 짓고, 야훼의 예언자들을 왕궁에서 지원하여 국사에도 참여하게 하여(왕상 22:5-12),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꾸몄지만, 아내 이세벨의 조언에 따라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귀족적이고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바알주의 정책을 폅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회정치, 경제적 상황 속에서 오늘 엘리야는 아합왕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바알 종교는 가진 자와 더 많이 가진 자를 대변하는 체제를 지원하였기에, 이스라엘 사회는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이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가뭄이 들자 사르밧의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남은 것이 전부가 되었다는 보도(왕상 17:8-12)는 겉으로 화려한 아합왕의 통치가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딱한 사정을 목도한 엘리야는 아합 정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합에게 엘리야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야훼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전통 때문에 예언자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오늘 엘리야를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자답게 오히려 아합왕과 오므리 왕조 가문이 이스라엘을 망치고 있다고, 야훼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신앙을 섬긴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합왕의 정책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야훼 하나님을 택할 것인지, 바알을 택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라고 질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야훼 하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바알인가?]
지금 전 세계는 미·중 패권 경쟁, 우크라이나·가자·수단을 비롯한 여러 전쟁과 분쟁,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격변, 극우 정치의 부상, 기후 재앙까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입니다. 한국은 그 한복판에서 중견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동시에 분단 체제와 사회적 양극화라는 오래된 짐을 여전히 안고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사회는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적·정서적 양극화로 점점 번지고 있어 사람들이 "노력하면 나아진다"는 믿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적 해결보다 혐오·음모론·극우 포퓰리즘·반이민·반페미니즘·반동성애 같은 쉬운 적대의 언어에 끌리면서 세계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양극화는 단순히 소득 격차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현실을 살고, 서로 다른 뉴스를 믿고, 서로를 국민이 아니라 적으로 보는 상태로 우리 사회를 바꾸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시대에 교회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가 불안과 혼란 속에 있지만 교회가 권력과 자본을 가지고 약자를 무시하는 바알 신앙에 손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의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들은 교회의 성장과 대형화에만 몰두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야훼 하나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 신앙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야 하고, 평등 정신을 확고하게 지켜야 하고, 부의 편중을 막고, 모두가 상생하는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교회가 야훼 하나님 신앙을 지켜내지 못하고 바알 신앙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기초로 하여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를 막아내고, 제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지난 세월 우리 향린교회는 이런 선교활동을 내내 해왔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현명하게 그리고 다음 세대들과도 함께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향린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먼저 예수님을 닮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이 성서적인가, 교회 전통에 부합하는가, 우리 전 교우가 신앙 안에서 한마음으로 동의한 일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함께 분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계시록의 말씀처럼, 살아 있는 듯하나 실은 잠들어 있는 믿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기준 삼아,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누가복음의 그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이들은 여자들과 함께 무력함과 가난함의 대명사였습니다. 무력하기에 가난했고, 가난했기에 무력했습니다. 한 사람 몫의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온전히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눈팔지 않고, 셈하지 않고, 자기 능력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것 - 그것이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변의 온갖 유혹에 솔깃하고,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나도 모르게 흔들리고 헷갈려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교회도 그러했기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안녕을 고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어떤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향린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저는 우리 향린이 어린이가 오는 것을 막지 않는 교회, 더 나아가 어린이에게서 배우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셈해지지 않고도 환대받는 교회, 청년들이 무언가 많이 해야만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는 교회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귀하게 여겨지는 교회,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께 안녕을 고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 이런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안아 주셨습니다. 야단치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평가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안아 주셨습니다. 우리 향린이 그런 품을 가진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린이에게도, 청소년에게도, 청년에게도, 그리고 서로에게도 그런 품이 되어 줍시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에게 따뜻한 품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 어린이들의 재잘거림,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교회를 꿈꾸어 봅시다.
그리하여 밝고 희망찬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