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Yet, if you say so)
- 이사야 55:6-9, 히브리서 11:1-6, 누가복음 5:1-5 -
오늘의 성서 본문인 누가복음 5장에는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와 안드레를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전문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어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누가 5: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경험과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누가 5:5a)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한마디는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위대한 믿음의 고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리 말씀하시니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ἐπὶ δὲ τῷ ῥήματί σου χαλάσω τὰ δίκτυα)."(누가 5:5b)
저는 오늘 이 말에서 아주 작은 한 단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러나"(Yet)입니다. 성서에는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작은 말들이 있습니다. "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일어나라!" 이 말들은 짧지만 얼마나 강력한 말들입니까. 하지만 오늘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베드로의 말에 들어 있는 아주 평범한 접속사 하나입니다. "그러나"입니다. "그렇지만" 혹은 "그럼에도"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한국어에서 "그렇지만" 혹은 "그럼에도"는 어떤 뜻입니까? 앞의 말이나 사실이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말과 사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다음 걸음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바다를 모르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는 어부입니다. 아마추어 낚시꾼이 아닙니다.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입니다. 물때를 알고, 바람을 알고, 그물의 상태를 알고, 어느 시간에 어느 곳에서 물고기가 움직이는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말은 사실 이런 말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도 해볼 만큼 해봤습니다." "제가 이 바다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밤이 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의 언어가 아닙니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저도 해볼 만큼 다 해봤습니다." "이 방법도, 저 방법도 써봤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봤습니다." "전문가에게도 물어봤습니다." "기도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말합니다. "이제는 안 되겠습니다." "이쯤이면 포기해야 하나 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 말씀하시니."(Yet, if you say so)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과 판단이 최종 기준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공동번역) 이것이 믿음입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끝까지 생각합니다. 경험을 존중합니다. 상식도 존중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합리성이 말을 다 한 다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남겨 두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여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 경험과 판단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다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그러나"는 그냥 접속사 하나가 아닙니다. 이 작은 단어 하나는 베드로의 믿음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베드로의 "그러나"는 단순한 접속사가 아니라 믿음의 문턱입니다. 그리고 그의 "그러나" 한마디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상식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그러나"가 있습니까? 믿음은 우리를 내 상식과 경험, 그리고 나에게 익숙한 지식의 틀 안에만 머물지 않게 하는 초월의 힘입니다.
교우 여러분,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과연 새로운 비전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우리가 상식적인 길만 선택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늘 안전하고 예측이 가능한 길만을 걸으려고 한다면, 누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큰 꿈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과 능력을 넘어서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다가 더 큰 손해를 봅니다. 위험을 피하려다가 더 큰 위험을 만듭니다. 효율을 추구하다가 인간을 잃어버립니다. 안전을 지키려고 문을 모두 닫았다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돈을 아끼려고 사람에게 투자하지 않았다가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릅니다. 오늘만 생각하다가 내일을 잃어버립니다. 참 이상하지요.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 가장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때로 사람은 너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8-9, 새번역) 이 말씀은 "인간은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네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네가 경험한 것이 미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너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그러나"가 믿음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그러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상식 밖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너무 작아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열두세 살의 소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다니의 여인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아주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이 흥분해 비난했습니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았는가?" 얼핏 제자들의 말이 더 합리적입니다. 계산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함이 많음"(누가 7:47)이기 때문이라고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사랑에는 계산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때때로 '거룩한 낭비'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합니다. 자존심을 낭비하고, 자기의 편안함을 낭비하면서까지 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사랑 아닙니까? 왜 처음 듣는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이런 사랑을 다들 해보셨고, 지금도 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세상은 그것을 낭비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도 그렇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인도 지나갑니다. 그들에게는 아마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위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멈춥니다. 시간을 씁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씁니다. 자기 나귀를 내어줍니다. 여관으로 데려갑니다.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중에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누가 10:36, 공동번역)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느냐?"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에는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해 때문에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후 재난 때문에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수와 가뭄과 산불과 폭력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국경을 넘은 난민도 있고, 국경 안에서 떠돌고 있는 국내 실향민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합리적으로 계산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은 얼마인지,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지는 않는지, 우리의 삶이 불편해지지는 않는지를 따집니다. 누가 도와야 하는지, 얼마나 도와야 하는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어떤 이익이 있는지, 어떤 손해가 생기는지, 이 일을 지금 해야 하는지를 저울질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계산이 다 끝난 다음에도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질문을 더 해야 합니다. "그러나/그럼에도 이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도 가장 합리적인가?"
여기에서 저는 김옥길 총장님이 떠오릅니다. 김옥길 선생님(1921-1990)은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자 여성운동가입니다. 이화여대 총장으로 18년간 재임하며 학교 발전을 이끌었고, 뒤에는 문교부장관도 역임했습니다. 마침, 모레가 김옥길 선생님의 26주기입니다. 김옥길 선생의 삶을 기억하게 하는 아주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습니다. "열린 대문과 냉면 한 그릇"입니다. 선생님은 대신동 자택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화와 관계가 있든 없든 사람들을 초대하여 냉면과 빈대떡을 대접했습니다. 문교부 장관 시절에는 공무원뿐 아니라 경비원과 청소하는 사람까지 불러 같은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김옥길 선생님의 "열린 대문"은 베드로의 "그러나"와 잘 맞습니다. 사람이 문을 닫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전해야 합니다.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 들어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도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김옥길 선생님은 그 앞에 "그러나" 하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을 열자." 우리는 세상을 나눕니다. 우리 사람과 남의 사람, 안쪽 사람과 바깥사람,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시민과 비시민 등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열린 대문은 말합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말합니다. "여기 앉으십시오." 그리고 음식을 내어놓고 말합니다. "같이 먹읍시다." 이것이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환대(hospitality)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김옥길 선생님의 일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입가 있습니다. 이화가 국제하계대학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하계대학을 1971년에 이화가 처음 시작했습니다. 정성으로 준비하고 지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원자가 겨우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풀이 죽은 담당 교수는 다음 해에 다시 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김옥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화가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것을 잊으셨나요? 다섯 사람이면 그때보다 다섯 배나 되는데 왜 망설이십니까?" 보통의 합리적 판단은 이렇습니다. "다섯 명밖에 안 왔습니다." "효율이 떨어집니다." "다시 검토합시다." 그러나 김옥길은 같은 숫자를 보고 다른 미래를 보았습니다. "다섯 명이면 한 명의 다섯 배나 된다."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직 안 된다"라고 말할 때 김옥길은 "그러나 시작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러나"의 사람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주님의 이 부르심은 때로 벅차게 느껴집니다. 때로 비상식적으로 보입니다. 비합리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우리의 상식과 판단과 능력을 넘어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더 큰 바다보다 깊[습니다]."(찬송가 302장) 언제까지 우리는 얕은 물가에서 머뭇거리고 있겠습니까. 다시 묻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과연 새로운 비전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언제나 상식적인 길만을 선택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언제나 안전하고 예측이 가능한 길만을 고집한다면, 누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꿈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그리 말씀하시니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서 본문은 베드로가 그렇게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얻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를 깊은 물가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그 길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뛰어넘는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용감히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은 우리의 그물이 찢어질 만큼 풍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도 이렇게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다 해봤습니다. 밤새 애썼습니다. 내 경험과 지식과 판단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기꺼이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언약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위험이 다 사라진 다음에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길을 찾아 문을 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가 보인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된 미래를 준비하신다는 것을 믿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내 생각의 끝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끝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가능성'(heavenly possibility) 앞에 나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말을 다 했을 때, 우리의 상식이 말을 끝냈을 때, 우리의 계산이 일을 마쳤을 때, 우리의 익숙한 생각이 자기 의견을 다 펼친 이후, 그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귀가 열려 있을 때, 우리의 생각 끝에는 하나의 작은 접속사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러나"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문을 닫지 마십시오. 사람의 미래를 닫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를 내 셈법으로 닫지 마십시오. 대문을 여십시오. 식탁을 차리십시오. 냉면 한 그릇을 내어놓으십시오. 저 깊은 은혜의 바다로 힘차게 노 저어가십시오. 거기에 그물을 다시 내리십시오. 빈 그물이 풍성한 그물이 되고, 닫힌 문은 열린 대문이 되며, 낯선 사람이 내 이웃이 되고, 마침내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우리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의 마음이 계산으로만 굳어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하옵소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지 않게 하시고, 사랑 때문에 기꺼이 문을 열게 하시며, 지쳐 있는 우리의 손에도 새 은혜를 담아 주옵소서. 우리가 보이는 것만 붙들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예비하신 더 큰 길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게 하시고, 김옥길 선생의 열린 대문처럼 우리의 삶도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따뜻한 자리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