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시편 139:13-16, 고린도전서 6:19-20, 요한복음 1:14
설교문
오늘부터 우리는 창조절(Season of Creation)을 시작합니다. 창조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기억하고, 우리가 창조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창조절 첫 주일에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바로 우리의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요즘 건강에 관심이 많으시지요?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서점에는 건강 관련 책들이 넘쳐나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에는 운동과 식단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습니다. 매일 만 보를 걷고, 근력 운동을 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좋은 일입니다. 몸을 잘 돌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조금 다른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몸을 돌보아야 할까요? 아마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건강해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건강해야 하니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이유를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생각할 때 몸과 영혼을 서로 다른 두 부분처럼 생각합니다. 몸은 껍데기이고, 영혼이 진짜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인간 이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딱 나누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영혼'으로 번역되는 중요한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바로 '네페쉬'(nephesh)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네페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몸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작은 영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 '살아 있는 존재', '한 사람의 온 존재'를 뜻합니다. 우리는 '몸을 가진 영혼'이 아니라, '몸을 지닌 생명'입니다. 그것이 성서의 인간 이해입니다.
성서에서 몸은 영혼을 담는 일시적인 껍데기가 아닙니다.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리실 우리의 귀한 생명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리의 몸도 그 아름다운 창조 안에 있습니다. 몸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몸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몸은 언젠가 버리고 갈 껍데기도 아닙니다. 몸은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입니다.
어느 시인의 짧은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나태주 시인의 「몸」이라는 시입니다. "사람에게 몸이란 것이 있었구나! / 예전엔 몸이 나를 데리고 다녔는데 / 요즘은 내가 몸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 / 참 성가시고 귀찮다 / 예전엔 몸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시가 참 재미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몸이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몸을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 몸이 무겁고, 아프고, 성가시고,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의 마지막 문장이 정곡을 찌릅니다. "예전엔 몸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몸이 늙고 병들고 약해집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몸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지으신 '나 자신'입니다. 몸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창조의 선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몸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오래된 습관을 넘어, 몸 자체를 하나님의 온전한 생명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자기 몸을 바라보며 이렇게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 더 키가 컸으면 좋겠고, 조금 더 날씬했으면 좋겠고, 조금 더 젊었으면 좋겠고, 조금만 덜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몸과 비교하면서 내 몸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다시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감사할 대상입니다.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정성껏 돌볼 대상입니다.
신약성서에 오면 몸의 의미는 더욱 놀라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우리는 흔히 마음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는 교회 안에서 드리는 한 시간의 의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손, 따뜻하게 안아 주는 팔, 아픈 이를 찾아가는 발걸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입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떤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바울은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입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을 소중하게 관리합니다. 깨끗하게 청소하고, 고장이 나면 고치며, 함부로 훼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을 하나님께서 예배받으시는 거룩한 곳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몸이 [바로 그] 성전이다."
예수께서도 몸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은 몸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굶주리셨고, 피곤하셨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병든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몸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영혼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라고 말합니다. 몸 역시 구원의 대상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놓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는 것도, 적당히 운동하는 것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병이 생기면 치료받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몸을 잘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건강이 신앙의 척도는 아닙니다. 병든 사람의 믿음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아픈 사람이 하나님께 덜 사랑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몸을 어루만지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돌본다는 것은 단순히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몸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늙어가는 몸도 존중하는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몸도 끝까지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을 돌보는 신앙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몸을 돌보는 신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몸을 돌보는 신앙은 내 몸만 돌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하는 몸은 결코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아침 우리가 마신 물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내가 먹은 밥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내가 마신 공기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모두 이 세계에서 왔습니다. 물과 공기와 흙과 햇빛이 있습니다. 강과 바다가 있습니다. 숲이 있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있습니다. 벌과 나비가 꽃을 찾아다닙니다.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내놓습니다. 우리는 그 산소를 마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쉰 숨은 다시 나무에게 돌아갑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놀랍습니다. 내 몸 안에 세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몸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내 몸과 창조세계는 결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공동체가 함께 아픕니다. 한 사람이 기뻐하면 공동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의 신학은 넓고 큽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탄식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생명이 함께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교우 여러분, 피조세계가 함께 신음하고 있습니다. 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숲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빙하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음은 결국 우리의 몸으로 돌아옵니다. 숲이 병들면 사람도 병듭니다. 강이 오염되면 사람도 병듭니다. 바다가 뜨거워지고 기후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아이들, 노인들,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고통받습니다. 지구의 건강과 나의 건강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최근 이 말씀을 생각하게 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8월 26일, 네팔과 티베트의 히말라야에서 대규모 빙하와 기반암 붕괴가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양의 얼음과 흙이 강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뉴스 화면을 보면 도저히 믿기 어려울 참혹한 모습입니다.
이 소식을 들으며 우리는 모두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잠시 더 생각해 봅시다. 히말라야의 빙하와 서울에 사는 나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저곳의 빙하와 내가 오늘 켠 에어컨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저곳에서 집을 잃은 사람의 삶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물론 어느 한 사람의 자동차 한 대 때문에 그 홍수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이 에어컨을 켰기 때문에 빙하가 무너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더 큰 사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전체가 대기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와 소비, 이동과 생산이 오랜 시간 동안 온실가스를 축적시켜 지구의 온도를 높여 왔습니다. 그로 인해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고, 빙하호 붕괴 홍수의 위험도 커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편리함이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재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소비하는 것, 내가 버리는 것, 내가 배출하는 것은 나에게만 남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대기로 올라갑니다. 바다로 갑니다. 빙하로 갑니다. 다른 나라로 갑니다. 다른 사람의 삶으로 갑니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도 갑니다. 내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내 자녀의 자녀의 자녀들에게도 갑니다. 그러므로 기후위기는 단순히 환경 문제가 아닙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입니다.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결국 신앙의 문제입니다.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이 경우 0.1%밖에 되지 않는 네팔 사람들이 참화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몸을 돌보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더 큰 몸, 곧 창조세계 전체를 돌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낭비하지 않는 일, 물과 에너지를 아껴 쓰는 일,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숲을 지키는 일, 생명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일은 단순한 환경 보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창조세계를 함께 돌보는 신앙의 실천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세상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계를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이웃이 살아갈 땅과 물과 공기를 파괴할 수 있습니까? 내 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지구의 몸을 계속 아프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모순입니다.
결국 문제는 '사랑의 범위'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디까지입니까? 몸을 돌보는 신앙은 사랑의 범위를 넓혀 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생명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작게 시작하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아픈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으로 이웃을 안으십시오. 여러분의 발로 사랑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입술로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십시오.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힘쓰십시오. 이것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창조절 기간엔 우리의 몸을 새롭게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 몸을 살게 하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새롭게 바라봅시다. 하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나무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숨결을 기억하고, 물을 마실 때 생명의 선물을 기억하고, 음식을 먹을 때 수많은 생명의 수고를 기억합시다. 아픈 지구의 소식을 들을 때에는 그것을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에게 보내는 신음의 소리로 들어봅시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우리의 삶을 바꾸어 갑시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조금 느려도 좋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한 모금의 물 앞에서 감사하고, 우리가 내쉬는 한 번의 숨결 속에서 모든 생명과의 연결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손길이 상처 입은 이웃과 신음하는 땅을 살리는 손길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눈이 아픈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되고, 우리의 발이 생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발이 되고, 우리의 몸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몸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선택과 걸음걸음이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는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모든 피조물이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생명과 평화의 거룩한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