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은 보수(지킴)에서 진보(바꿈)로 나갈 수 있는 지점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정강길 연구실장 |
흔히 잘 알려져 있듯이 지금까지의 보수와 진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현상들을 볼 때, 대체로 보수(保守, conservativeness)는 지켜야 한다는 자세이고, 진보(進步, progress)는 기존의 것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자세를 지배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보수는 사회적으로 우파에 많이 가깝고 진보는 좌파에 많이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저마다 달리 해석하는데, 결국은 보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진보는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무엇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일까?
흔히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truth라는 것도 그렇다. 만일 그것이 진리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버려야 할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합리성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무엇을 두고 우리는 옳다고 여기는 것이며 지켜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인가? 결국 진리에 대한 경험은 결국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경험을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 아닐는지.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구분을 현실적으로 우리는 어디서 구분하고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현실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지킴>에서 <바꿈>으로 나갈 수 있게끔 하는가에 대한 바로 그 지점을 찾는 것이 작금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가치라면 당연히 바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지킴에서 바꿈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오류>error와 <비극>tragedy에 대한 발견과 성찰이다. 어찌 보면 오류는 이론적ㆍ인지적 맥락의 충돌과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고, 비극은 오류가 문명사적으로 드러난 사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우리는 오류와 비극을 경험함으로써 보다 진전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가장 의미심장하리만큼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통찰의 허약함과 언어의 한계를 지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결코 인간은 소중한 가치들은 직접적으로 곧바로 얻을 수 없다. 그런 시각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로 빠질 뿐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들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켜야 할 것들, 소중하게 가꿔나야 할 것들을 선별해 왔던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어떤 오류와 비극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그나마 보다 나은 삶의 질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로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건은 결국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이다. 진정한 진보는 오류와 비극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체제나 입장들이 바뀌어지길 희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보수라면, 오류와 비극이 발생되지 않는 한에서는 지킴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오류와 비극이 발생되지 않는 한에서는 적어도 소중한 것일테니까 말이다.
오류와 비극을 통해보는 기독교 역사
일단 현재의 기독교 진보를 따져 묻기 이전에 나는 우리의 기독교 역사를 전반적으로 오류와 비극을 통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의 기독교 역사 역시 너무도 분명한 오류와 비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천 년 전의 예수사건 자체가 그때까지의 유대교 사회의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로서 마련된 일종의 새로운 대안 유대교 형성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이것이 결국은 후대에 기독교로 이어진 것인데 그러한 전승 과정에서는 또한 아무 문제가 없이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우 꼼꼼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상 기독교 역사는 원초적인 역사적 예수사건을 오히려 비역사화시켜 해석해냄으로서 본래적인 원류와는 다른 가지를 뻗치게 된 점이 있다. 즉, 이것은 예수사건을 보편화 하는 그 과정에서 저질러진 잘못인 것이다. 교회 권력의 문제도 결국은 진리 게임에서 그 명분과 정당성을 찾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보편화 과정에 당시 헬라철학 즉, 관념적 이원론(혹은 '위계적 이원론')이 해석학적 틀로써 지배적으로 작동되었으며, 결국은 현재까지도 주류 보수 기독교 사상의 깊은 뿌리로 기능하고 있을 정도다.
그럴 만도 한 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잘못을 오히려 더욱 결정적으로 공식화해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니케아 공의회 사건인 것이다. 이후의 기독교 사상사는 대체로 니케아 신경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거의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는 초월자ㆍ전능자로서의 기독교 신관과 예수를 더욱 신격화함으로서 역으로 예수의 역사적 삶의 증발을 가져다주었으며 이것은 오늘날에도 <예수믿기>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삶을 따르지 못하는 <예수살기>와는 괴리된 신앙구조를 만들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천 년 전의 그 역동적이었던 예수사건을 다시금 재해석해내고 보편화 하는 신학적 작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학은 언제든지 <재신학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중세 때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각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신학적 작업을 했다면, 오늘날 우리도 좀더 나은 철학적 맥락을 가지고 신학적 구축을 못할 것은 또 뭐겠는가.
혹자는 그러한 공의회 사건에 성령의 개입 역사를 언급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예수님 팔듯이 성령님도 자기식으로 팔아먹는 식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성령의 개입을 무엇으로 증명한다는 말인가? 믿음으로? 그래서 기존 기독교가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라는 소릴 듣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는 파시즘적이고 강요적인 기독교 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그토록 십자군 전쟁과 마녀 사냥과 그리고 제국주의적 선교에 따른 원주민 학살과 만행의 비극들은 우리가 아는 기존 기독교의 잘못된 신학적 신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는다. 이런 데도 주류 기독교 전통에는 오류가 거의 없고 다소 미미한 정도일 뿐이라고 여기고 싶을 테지만, 사실상 알고 보면 기존 기독교에 잠복된 오류의 코드들은 이미 예수사건이 다양한 전승과정으로 분화되어 갔던 초기 기독교 때부터도 서서히 형성되어 왔던 것들이라 그것은 결코 미미한 정도의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솔직히 니케아 공의회라는 것도 기독교 사상사의 분수령 같은 결정적인 지점이긴 하나 실상은 그 역시 이미 연장선상에 놓여 왔을 따름이다. 기독교는 일찍부터 플라톤의 철학을 흡수했고 로마 제국과도 타협하는 길로 조금씩 걸어갔던 것이다. 오히려 기존 기독교의 오류와 비극을 경미하게 보는 자들이야말로 존 칼뱅이 저지른 만행과 학살까지도 잘 모르고 있거나 어물쩍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세야말로 오히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것밖에 안된다.
비록 기존의 주류 기독교가 치명적인 오류와 비극들을 지니면서 흘러왔었지만, 흥미롭게도 복음서의 예수사건 역시 스탬프처럼 붙어온 것이라 때로는 귀감이 될 만한 신앙인들을 낳은 지점들도 있긴 했다. 내가 보기엔 경미한 지점을 들라고 한다면 오히려 후자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류 보수 기독교가 그나마 맺을 수 있는 좋은 열매와 그 한계는 우리가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에게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전통에 대한 인정은 그것이 오류와 비극을 생산치 않을 때만이 그 권위가 진정으로 살려지게 되고 인정될 따름이다. 그 어떤 막강 파워의 기독교 전통이 현재의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오류와 비극에는 결코 선행할 수 없다. 오류와 비극이 없는 한에서만 우리의 기독교 전통도 의미가 있을 따름이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의 진보 진영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오늘날 현재의 진보 기독 진영은 주류 보수 기독교의 한계들을 제대로 넘어서고 있기나 한 것인가? 기이하게도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날 진보 기독교인들을 떠올릴 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니까 거의 대부분은 "사회운동을 하는 기독교인" 혹은 "좌파적 입장을 지닌 기독교인"으로 이해하는 답변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좌파에 가까운 사회적 실천운동을 하는 기독교인"을 진보기독교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상 진보 기독교인들 이미 스스로부터도 그 같은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매우 강한 걸로 여겨진다. 대체로 진보 기독교인들의 신앙관을 보면 정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들이 매우 지배적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나 자신이 이를 기이하다고 보는 이유는 적어도 진보 기독교인이라면 1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1차적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그보다는 정치 사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표방할 때가 많기에 하는 얘기인 것이다. 나는 지금 정치적ㆍ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1차적으로는 종교의 자리이기에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더 관심해야 함을 말해주고 싶어서다. 적어도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회운동적 기독교인>이라기보다 <기독교적 사회운동가>가 더 적절할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은 정치적ㆍ사회적 문제에 우리가 참여할 수만 있다면야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의 정치를 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기독운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굳이 더 구체적으로 짚어서 말한다면 90년대 다양한 시민사회 형성과정 이후의 진보 기독 운동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이를 결코 진보 운동으로 보질 않는다는 얘기다. 그것은 그저 기독교인들의 사회운동일 따름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NCC나 기존의 에큐메니칼 진영의 활동들뿐만 아니라 최근의 <예수살기> 단체가 주로 표방하는 방향 역시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현재의 진보 기독 진영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사실상 이전의 7-80년대 기독교 사회운동의 관성을 여전히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적어도 7-80년대는 그야말로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시절이었기에 당시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은 당연히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일이었으며, 그렇기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 마당에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종교인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그때 당시의 진보 기독 진영의 운동만큼은 진보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87년 6월항쟁을 거치고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점차로 우리 사회 안에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과 NGO 단체들이 형성되면서 이제는 보다 다양한 계층들과 입장들을 대변하는 적극적인 요구의 목소리들이 전개되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은 분명히 그 예전 시절과는 구분된다. 대통령을 욕한다고 해서 잡아가는 세상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이제는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 제발 좀 관심을 가져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운동도 좋다. 생태환경운동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와도 연대함으로써 얼마든지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시급한 것은 이미 기독교 자체의 문제다. 그게 더욱 1차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1차적 사업은 기존 기독교가 계속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비극들에 대해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기독교 다시 수립하기인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흥미롭게도 진보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이슈들을 들고 나올 때도 막상 부딪히고 충돌하는 이들 역시 보수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이다. 사회적 이슈들을 놓고도 <기독교 대 기독교> 세력들도 함께 맞붙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 사형제 폐지 여부, 한미FTA, 사학법 재개정 문제, 근래의 햔반도 대운하 문제 등등 여러 사회적 현안들에서도 크게 보면 두 진영의 기독교 세력들이 종종 부딪힌다.
내가 알기에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크나큰 착각 하나는 저들에게 일반 사회운동가들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의 실상, 사형제도의 병폐, 한미FTA의 허와 실, 사학법 재개정 현황, 한반도 대운하 공사의 병폐 등등 이런 것들을 소상하게 정보를 잘 인지시켜주기만 하면 저들이 진보적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도 엿보인다. 정말 그렇게 하면 우파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바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실상은 사회적 입장에서의 좌파와 우파 문제보다도 더욱 근원적으로는 기독교 신앙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저들을 설득할 수도 없으며 그러기도 매우 힘드리라 본다.
조금더 곁들여서 저들에게 한미FTA 찬성이야말로 '비성서적인 입장'이라고 일러주면 저들의 입장은 바뀔 것인가? 하지만 우파 성향의 보수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 입장이야말로 가장 '성서적인 입장'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에겐 진정한 사회변혁을 위해서라도 보다 본질적인 기독교 신앙의 복원 혹은 새로운 구성 작업들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진정한 진보 기독 운동은 기존 기독교 자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재수립 운동이다. 즉, 대안 기독교 운동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1차적인 작금의 진보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부시가 방한하면 반대 집회를 여는 진보 기독교인들도 이제는 릭 워렌 같은 외국의 대형교회 보수 기독교 목사의 방한이나 세계감리교대회의 금란교회 개최 혹은 김홍도의 목사직 유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성명도 내고 때로는 극렬하게 집회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본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어줍잖은 대중문화 정죄론과 진화론을 무시하고 창조과학을 퍼트리는 것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분노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장이야말로 사실상 더욱더 위험한 것임에도 그 심각성을 잘 못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대통령을 욕한다고 해서 잡아가질 않는다지만 혹시라도 대형교회 거물급 목사를 비판하다간 어찌될 지도 모를 형편이잖은가. 이런 현실에서 볼 때도 오늘날 새로운 대안 기독교 운동이야말로 어쩌면 7, 80년대 시절처럼 목숨까지도 내놓고 해야 할 진보 기독 운동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국교회의 90퍼센트 이상이 거의 대부분 보수 근본주의로 채색되어 있는 암담한 현실이 있기에 그러하다.
생각해보라. 오늘날 기존 기독교만이라도 제대로 건강해진다면 어찌 저들이 한반도 대운하 찬성 운운을 하겠는가. 신앙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금의 진보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운동이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 자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과업이야말로 이 시대에 주어진 현재적 진보라고 본다. 이미 기존 기독교 자체부터가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는 극심한 상태인 것을! 따라서 현재의 진정한 진보 기독 운동은 너무나 분명하게도 사회운동이라기보다 그 자체로도 이미 사회운동이 될 수 있는 분명한 종교개혁 운동인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나 자신의 이 글은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에 대한 비판적 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기독교 진영의 사회운동 자체를 반대한다거나 그분들의 활동들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인지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의 사회운동 및 생태운동, 소수자운동 등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우리 사회의 모든 진보 기독교 진영의 활동가 분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며 여전히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다.
단지 윗글은 기독교 자체를 새롭게 수립하려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과업도 이제는 보다 요원한 상황에 처해있기에 쓴 것뿐이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시는 진보 기독교 진영의 분들이 계신다면 이에 대한 일말의 오해는 결코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스도교인의 1차적 자리는 분명하게도 종교적 신앙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잖은가.
진정한 <진보>란 <진짜 보수>를 의미하며, 그것은 적어도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로서 지킬 것은 지키고 바꾸어야 할 것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진영일 게다. 진보에 대한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 자신은 내가 속한 그리스도교의 자리부터가 새롭고 건강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는 것이다.
정강길 연구실장(세계와 기독교변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