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오늘의 종교개혁: 교회와 세상에 정의와 사랑을

2026년 10월 25일 종교개혁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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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렘 29:4-9, 벧전 2:9-12, 16, 눅 24:28-32)

설교문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보통 종교개혁 기념일을 10월 31일에 지키는데, 그날이 바로 1517년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정문에 루터가 '면벌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게시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95개조 논제"의 제1조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입니다.

종교개혁은 신자들의 삶의 양식을 바꾸었기에 그것은 또한 사회 전체를 변혁한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은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되면서 다종교 상황을 맞이한 지 오래고 종교를 갖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루터가 개혁을 일으킬 당시 유럽 세계는 그리스도교 왕국이며 거의 모든 유럽인들이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곧 사회 전체의 변혁이었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그냥 The Reformation입니다. 19세기 말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져온 여러 선교문서를 번역하면서는 "대개혁"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루터의 개혁은 신학, 철학, 교육, 복지, 문학, 언어학, 역사, 음악, 미술, 정치, 법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주요 원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이것이 세계사적 변혁으로 진화될 수 있었던 것에는 외부 세계의 변화와 교회 내적 원인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외부적 변화를 보겠습니다. 중세 말 유럽 사람들은 깊은 불안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14세기 중엽 유럽 인구의 상당수를 앗아간 흑사병은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왔습니다. 상당수의 사람은 기존의 신앙에 의지하면서 교회로 모여들었지만, 전염병은 더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동쪽에서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고, 루터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헝가리를 지나 빈의 성문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죽음과 전쟁에 대한 공포가 일상이 되면서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습니다.

한편 세계를 보는 눈도 크게 바뀌고 있었습니다. 1492년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항해는 교회가 가르쳐 온 세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고 외치며, 고전의 원문을 직접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516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펴냈고, 루터는 바로 이 그리스어 성경을 바탕으로 말씀을 새롭게 읽었으며, 훗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 지내며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주로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의 것이었던 성경이 이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말로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인쇄술이었습니다. 1450년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실용화하면서, 상상할 수 없던 속도로 책과 문서가 퍼져 나갔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불과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고, 그의 설교와 소책자들은 쉬운 독일어로 쓰여 엄청나게 찍혀 나갔습니다. 새로운 매체가 교회의 지식 독점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비텐베르크라는 작은 대학 도시의 신학 논쟁으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은 어떠했을까요? 교회의 권위는 이미 오래전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4세기에는 교황청이 프랑스 왕권의 영향 아래 아비뇽으로 옮겨가 70년 가까이 머물렀고, 그 뒤에는 교황이 둘, 심지어 셋이나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대분열이 4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누가 참 교황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가 온전할 리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가 돈과 권력과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세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내세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며 면벌부를 판매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익의 상당 부분이 대주교 자리를 돈으로 산 알브레히트가 푸거 가문에 진 빚을 갚는 데 쓰였습니다. 성직이 돈으로 거래되고, 교회와 은행과 권력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불안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았고, 하나님 말씀을 앞세워 헌금을 끌어내는 데만 골몰했습니다.

성직자의 질도 형편없었습니다. 흑사병 이후 많은 사제가 죽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서둘러 사제 직분을 얻었고, 그런 형편은 이후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성서도 모르고, 신학적 훈련도 받지 못한 사제들이 성직자의 특권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질 낮은 신학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갈수록 떨어뜨렸습니다.

물론 이러한 교회를 바로잡으려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루터보다 100년 앞서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화형을 당했고, 영국의 위클리프도 개혁을 외쳤습니다. 개혁의 열망은 오랫동안 땅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일으킨 가장 깊은 힘은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참 신앙에 대한 한 사람의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젊은 수도사 루터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교회가 가르치는 길을 따랐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고행하고, 날마다 고해했습니다. 1510년 무렵 수도회 일로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께서 재판받으실 때 오르셨다는 빌라도 관저의 계단, 이른바 "성 계단"(Scala Santa, 스칼라 산타)을 찾아갔습니다. 루터는 할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올랐습니다. 계단 하나하나마다 주기도문을 바치며 마침내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정말 참된 것인가?"

이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다 했는데도 그의 영혼은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물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에 기대지도 않았고,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성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르치며, 밤을 지새워 원문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고뇌 끝에, 그는 천 년 동안 이어진 길과는 다른 길을 발견합니다. 루터는 훗날 신학자를 만드는 것은 기도와 묵상과 시련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민 없이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불안에 휩싸인 세계, 새로운 지식과 매체의 등장, 돈과 권력에 물든 교회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참된 뜻을 묻는 물음과 도전이 만나 일어난 세계 변혁의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개혁이 필요한 이유]

509년 전 종교개혁을 불러온 상황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오늘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처럼 오늘도 교회 바깥 세계의 거대한 변화와 교회 내부의 깊은 병이 함께 겹쳐 있습니다.

먼저 바깥 세계를 보겠습니다. 중세 말 사람들이 거듭되는 흑사병 앞에서 무력했듯이, 우리는 지난 2020년부터 3년 동안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감염병을 겪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과 교훈은 우리 문명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코로나는 "낯선 것에 대한 공포를 줄이며 지식을 쌓고 문명을 확장하던 인류의 오랜 도전"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련의 밑바탕에는 생태계 파괴와 기후 재앙이라는 오늘날의 근본적인 위기가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기후정의 부서를 신설하려는 논의가 있는데, 정말로 더 과감한 결단과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유럽 한복판까지 밀려오던 그때처럼,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이 한반도 역시 아직까지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중세인들이 내세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다면, 현대인들은 과연 미래가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중세 말에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교회의 지식 독점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듯이, 오늘 우리는 전기처럼 일상 곳곳에 스며든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삶의 문제에 부딪힐 때 가장 먼저 인공지능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인쇄술이 루터의 글만이 아니라 온갖 비방과 선동의 글도 함께 퍼뜨렸듯이, 새로운 매체는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방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억압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인공지능은 인쇄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규모로 우리 사회를 바꾸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은 일의 세계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노동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잘 쓰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더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해내면 그것이 곧 새로운 기준이 되고, 인공지능을 쓰지 않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갑자기 일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이 경험을 쌓던 초보적인 일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배달 노동자들은 알고리즘의 지시에 따라 일하고, 인공지능을 학습시키기 위한 일들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헐값에 떠맡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계를 위해 일하고 기계가 사람을 관리하는 사이, 그 막대한 이익은 인공지능을 소유한 극소수의 거대 기업에게로 모입니다. 인쇄술이 지식의 독점을 깨뜨렸다면, 인공지능은 오히려 새로운 독점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기후 위기와도 깊이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손에 잡히지 않는 가상의 기술로 여기지만, 그 뒤에는 밤낮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엄청난 전기를 먹고, 뜨거워진 기계를 식히기 위해 엄청난 물을 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에 전기와 물을 대기 위한 송전선과 댐 문제로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밀양의 송전탑 싸움을 기억하는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압니다. 편리함은 도시가 누리고, 그 대가는 송전선이 지나가는 시골 마을과 물이 마르는 땅, 반도체 원료를 캐내는 남반구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치릅니다. 더 크고 더 빠른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한 국가와 기업들의 경쟁 속에서 인공지능은 기후 위기를 앞당기는 강력한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작동 원리조차 온전히 알 수 없는 인공지능이 벌써 전쟁에 쓰이고 있는데, 이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인공지능이 끼치는 해악 중 하나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저작권도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고, 진짜와 가짜가 마구 뒤섞이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됩니다. 알고리즘은 그런 상황을 더욱 부추깁니다. 그러다 보니 왜곡된 정보에 과몰입된 사람들이 늘어나고 세계 곳곳에서 매우 위험한 증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극우화 현상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한신대 신학대학원 목요강좌가 마침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김진호 목사는 이러한 현상의 뿌리를 세계화가 낳은 상처에서 찾았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지구적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이, 국가는 국민의 삶을 돌보기보다 자본의 신뢰를 지키는 일에 더 힘을 쏟았고, 복지는 줄고 양극화는 깊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는 성공도 실패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겼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일터를 잃고, 빚에 시달리고, 집을 구하지 못해 떠도는데, 그 고통을 누가 만들었는지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김진호 목사는 이를 "가해자 없는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가해자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를 가해자로 지목하고 싶어집니다. 극우 정치는 바로 그 자리를 파고듭니다.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구조 대신 손에 잡히는 적을 만들어 줍니다. 이주민과 난민, 여성과 성소수자, 가난한 복지 수급자가 그 과녁이 됩니다. 억눌린 사람들의 분노가 위를 향하지 않고 옆과 아래, 곧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을 향하는 것입니다. 프란츠 파농이 식민지 민중에게서 발견하고 파울로 프레이리가 "수평 폭력"이라고 이름 붙인 현상입니다. 불안과 양극화 속에서 극우는 끊임없이 새로운 적을 찾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증오와 혐오를 부추깁니다. 중세 교회가 사람들의 불안을 면벌부 판매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오늘의 극우 정치는 사람들의 불안을 증오의 연료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공지능과 극우 정치가 만납니다. 작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세계 최대 기술기업의 수장들이 줄지어 섰던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인공지능 산업이 국가 권력과 손을 잡고, 그 국가가 극우적일 때, 21세기의 핵심 기술이 누구를 위해 쓰일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분노를 키울수록 더 많은 관심을 얻도록 짜인 알고리즘은 극우 정치의 연료를 끝없이 공급합니다. 새로운 매체가 해방이 아니라 선동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병]

그렇다면 교회 안은 어떨까요? 아비뇽 유수와 교황청의 대분열로 중세 교회의 권위가 무너졌듯이, 오늘 한국교회의 권위도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코로나19는 그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웃의 생명과 안전보다 "예배 사수"를 앞세우며 방역에 맞섰던 일부 교회의 모습은 사회로부터 깊은 불신을 샀습니다. 여기에 교회 세습, 성직자의 성범죄와 재정 비리까지 더해지면서, 이제 사람들은 교회를 구원의 공동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중세 교회가 돈과 권력과 한 몸이 되었듯이, 오늘 한국교회의 상당 부분이 권력과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아픈 대목은, 우리 사회에서 증오의 언어를 가장 앞장서서 관리하고 퍼뜨려 온 곳이 다름 아닌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차별금지법 반대, 난민 반대, 반동성애, 반페미니즘, 반이슬람, 반중 정서가 개신교라는 통로를 타고 사회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을 민족국가의 모델로 떠받드는 기독교 시온주의까지 더해지면서, 혈통과 땅과 신앙을 하나로 묶는 위험한 신앙의 문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성장한 대형 교회들은 중산층의 불안을 달래면서 세습과 능력주의를 축복의 언어로 포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과 그 이후의 혼란 속에서, 다수의 교회가 침묵하고, 일부 교회는 오히려 내란을 옹호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흑사병 이후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사제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다른 모양으로 같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가 쇠퇴하면서 신학교 지원자가 크게 줄어 여러 신학대학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생계를 걱정하며 깊은 공부와 성찰의 여유를 잃어가는데, 한편에서는 제대로 된 신학 훈련 없이 목사 안수를 남발하는 곳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목회자의 신학적 깊이와 영성이 얕아지면 교회는 세상의 질문은커녕 교인들의 실존적인 신앙의 물음조차 다루기 어렵고,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며 손쉽게 상대를 악마화하는 증오의 언어에 더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신앙 자체가 아직도 낡은 채로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와 신학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들은 좋아졌지만 실제로 그렇게 진지한 물음을 가지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탈종교화, 무종교화되어 가는 사회에 진보적 신앙인들마저 휩쓸리고, 교회는 그저 친목 단체 정도로, 신앙은 악세서리 정도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원천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말씀을 새롭게 읽자고 했지만, 오늘 많은 신자는 성경을 펼쳐 놓고도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미 정해진 교리적 답을 확인하거나, 자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을 뿐입니다. 바로 이 묻지 않는 신앙, 생각하지 않는 신앙이야말로 극우의 선동, 이단의 속임수, 자본주의적 신앙 왜곡이 가장 쉽게 뿌리내리는 토양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개혁을 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어떤 모양으로]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종교개혁을 이어가야 할까요? 오늘 주어진 세 본문은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줍니다.

첫째, 오늘의 종교개혁은 세상을 버리고 교회 안으로 숨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 29장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성전을 잃고, 고향을 잃었습니다. 낯선 땅에 살고 있지만 그 땅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장가를 들고 시집을 보내 아들딸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그 땅에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우리끼리만 구원받으면 되는 섬이 아닙니다. 기후 재앙으로 신음하는 이 땅이 평안해야, 일터를 잃고 빚에 시달리는 이웃이 평안해야, 이 땅에 와서 일하며 살아가는 이주민과 난민이 평안해야, 교회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여기에 한 가지 경고를 덧붙입니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너희 몫을 빼앗는다고, 저들을 몰아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외치는 목소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혐오를 정당화하면서 자기 집단의 존속만을 꾀하는 목소리들입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바로 이 거짓 예언에 속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향린교회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오늘 주보 공동 관심사 나눔에 보면 "이웃을 위한 헌금" 안내가 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교인들 중에도, 그리고 우리 이웃 중에도 갑작스럽게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이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당회와 목운위에서 그런 분들의 긴급 구제를 위한 헌금 계좌를 따로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복합 위기로 나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분들에게 작은 희망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뜻이 있고 마음이 있는 분들은 이 헌금을 통해 삶의 위기 한복판에 놓인 분들과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논의하고 있는 기후정의 부서가 잘 만들어져서 우리 교회의 에너지 사용을 바꾸고 기후 재난으로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실제적인 일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31년째 이어 오고 있는 들녘교회와의 도농선교협력도 바로 이 성읍의 샬롬을 구하는 일입니다. 농촌과 도시가 서로를 살리는 그 관계를 기후 위기 시대에 더 깊이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오늘의 종교개혁은 우리 자신이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고, 혈통과 자격이 아니라 자비로 하나 되는 새로운 백성을 세우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처음부터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이라고 부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옛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주셨던 부르심, 곧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그 부르심이, 이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각자의 형편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왕과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붙들었던 만인제사장을 향린교회는 평신도 교회라는 모토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만인제사장을 넘어 만인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직접 서서, 스스로 성경을 읽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인신학자가 될 수 있는 시절에도 우리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씀은 바로 12절과 16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주인이면서, 동시에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위해 이웃을 섬기는 자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요청하는 이 세상과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야 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셋째, 오늘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새롭게 읽어 마음이 뜨거워지고, 낯선 이를 식탁에 초대하여 그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서 24장의 엠마오 이야기는 절망한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모든 희망을 걸었지만,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 길에서 낯선 나그네 한 분이 그들과 함께 걸으며 성경을 풀이해 주십니다.

날이 저물어 마을에 이르렀을 때, 본문은 예수께서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이 참 마음에 남습니다. 주님은 억지로 우리 집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붙잡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두 제자가 그분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아 그분이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주실 때,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봅니다. 길에서는 알아보지 못했던 주님을, 함께 빵을 떼는 식탁에서 알아본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그 나그네를 밀어내면 우리는 주님을 놓칩니다. 그러나 그 나그네를 우리 집에, 우리 식탁에 초대할 때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이주민과 난민, 집을 잃은 청년, 일터를 잃은 노동자, 인공지능 시대에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이웃, 교회에서 상처받고 떠난 이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밀려난 사람들, 그 낯선 이들과 함께 빵을 뗄 때 우리는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나누셨던 밥상이 바로 그런 자리였습니다.

두 제자는 그 일을 겪은 뒤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인공지능이 성경 구절을 찾아 주고 설명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길을 걷고, 함께 빵을 떼며,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는 만남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뜨거운 마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몰아내는 데로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뜨거움이 아닙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낯선 이를 밀어내서가 아니라 맞아들여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열정을 식히는 것이 아니라, 그 열정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배제에서 환대로, 죽임에서 살림으로.

우리 향린교회는 열린 식탁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 공동식사 자리가 오래 다닌 교인들끼리의 친목 자리를 넘어, 처음 온 사람과 낯선 이웃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엠마오의 식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교회가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디지털 세상에서 뒤처져 소외되는 이웃들의 손을 잡아 주는 일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새로운 매체가 해방의 도구가 되느냐 억압의 도구가 되느냐는, 결국 그것을 쓰는 공동체가 누구의 곁에 서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 개개인은 이번 한 주 동안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사람, 교회에서 늘 혼자 있는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인공지능에게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 생각하고, 먼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만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질 것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을 섬기는 데 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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