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70,8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란 과제 앞에 시대적 고뇌와 아픔 속에 심원(心園) 안병무 선생은 故서남동·현영학 등과 함께 우리나라 사회 현실에 맞춘 고유한 신학, 즉 한국적 상황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을 탄생시켰다.
당시 민중신학은 ‘민주화’에 있어서 투쟁의 대상이었던 정부에 저항하는 기독인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 등 민중들의 정신적 힘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한국사회가 점차 민주화 되어가자 투쟁의 대상을 잃어버린 민중신학은 결국 그 힘을 발휘할만한 시대적 과제를 찾지 못하고, 한국사회 민주화와 함께 잊혀져갔다.
그런 민중신학이 동시대 심원과 꼭 같은 시대적 아픔과 고통을 겪은 한 민주화 운동가에 의해 재조명됐다. 19일 향린교회(담임 조헌정 목사)에서 심원 안병무 선생의 소천 12주년을 기념해 대한적십자 전 총재 한완상 박사가 ‘민중신학의 현대사적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추모강연회를 한 것이다.
심원 선생과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던 한 박사는 심원처럼 사회학을 전공했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교수직을 빼앗기고, 옥고를 경험한 바 있다.
한 박사는 먼저 크게 약화된 민중신학에 대해 우려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심원과 함께 여러 동지들이 일으켰던 민중신학의 사건도 그간 많이 퇴색된 것 같다”며 “신학운동으로서 그 동력도 크게 약화된 것 같다. 그래서 지난 십·이십년 동안의 변화, 그 역사적 변화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면서, 민중신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오늘의 한국의 컨텍스트 속에서 되씹어 보고 싶다”고 운을 뗐다.
이어 20세기 극우와 극좌의 전체주의 아래 민중들의 인권과 권리가 유린당한 현실을 지적, 민중들이 당대 시대 속에서 주체적 존재로 설 자리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공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무력한 객체였다면, 자본주의 시장체제하에서는 소비자 역시 행태론적 심리학이 강조하는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대중 사회적 흐름이 21세기 정보화란 격변기를 거쳐 180도 달라지게 됐다고 한 박사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쌍방향 통신매체의 발달이 현대사회 속에서 대중의 역할을 강화시켜 대중이 사회 속에서 주체적 존재로 우뚝서게 한 것.
한 박사는 이어 사회 내 주체적 존재인 대중을 ‘줄씨알’(netroots)로 불렀으며 “제2세대 민중신학은 오늘의 줄씨알과 창발적 소통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줄씨알’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줄 안에서(on-line) 서로 자유롭게 만나 소통하고, 그 줄 안에서 소통을 거쳐 뜨거운 공감대를 형성해 그 줄 밖에서(off-line)에서 만나 새로운 정열을 서로 복돋우면서 때론 역사적 변혁적 사건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들은(줄씨알) 공간의 제약도 시간의 제약도 20세기 인간처럼 받지 않는다”며 “정보혁명이 불러일으키는 이 같은 줄씨알들의 저력을 주목하지 않고서 21세기 민중신학 그리고 민중사회학을 거론하기 어렵다”고 지적, 줄씨알을 기초로 한 민중신학의 새 담론 형성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끝으로 21세기 민중신학의 과제로 △ 역사의 예수를 한국교회 안으로 정중히 모시는 일 △ 역사의 예수가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실종된 배경을 탐구하는 일 △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간격을 설득력 있게 좁히는 일 △ 바울의 속죄론의 민중 운동적 잠재력을 캐어 보는 일 △ 역사적 예수를 모시는 작고 알찬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일 등을 꼽았다.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한 이날 추모강연회엔 들꽃강남향린교회 김경호 목사가 사회를, 이태환 장로(향린교회 운영위원회 위원장)가 기도를, 류장현 교수(한신대)가 성서 읽기를 하고,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의 특송이 이어졌다.
한편 한 박사가 추모강연을 한 향린교회는 1953년 5월 17일. 폐허로 변해 버린 서울 한복판에서 안병무, 홍창의 등 12명의 젊은 신앙인들이 창립한 교회로 △ 생활공동체 △ 입체적 선교공동체 △ 평신도교회 △ 독립교회 등의 네 가지 창립정신을 갖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