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성한]조선에 온 바울과 실라들

공동체를 위한 한국교회사 읽기(2)

처음 선교사 공동체 이야기


가야 할 곳을 찾은 바울과 실라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사도행전 16장 9~10절)
 

우리는 이제 한국인 중심의 ‘자생적 신앙공동체’에 이어 서양인 중심의 ‘선교사 공동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보아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한국인들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잔과 같았던 시기에 물설고 낯선 땅에 복음과 문명을 들고 찾아온 그들의 고마움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복음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천주교는 1784년부터, 개신교는 1879년부터 이 땅에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바울과 실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셈인 것이지요. 그렇지만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터 잡고 우리나라 사람들과 삶을 나누며 살게 된 것은 세계교회의 역사에 견주어 볼 때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1800년대 초부터 끊임없이 이 땅에 터 잡고 살려 했지만 정부에서 허락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1882년에 미국과 조약을 맺고(한미수호통상조약),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면서(한불수호통상조약), 이제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박해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여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합법적으로 정착하게 된 개신교 선교사는 미국사람 알렌(H. N. Allen) 의사입니다. 그는 먼저 중국에서 선교하다 선교지를 바꾸어 부인과 아직 갓난아기와 함께 1884년 9월 20일 우리나라 제물포 항에 도착했습니다. 알렌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살기 위해 왔더라도 드러내 놓고 선교사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알렌은 한국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온 의사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정부에서 서양인들에게 우리나라에 살도록 해주었지만 선교까지 허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즈음 우리나라 정부 안에는 개화세력이 등장하여 알렌 같은 선교사가 서울에 머무는데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렌이 의료선교사로서 자신의 본래 일을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계기는 오래가지 않아 전혀 뜻밖에 일로 찾아왔습니다.


1884년 12월 4일 목요일, 알렌이 우리나라에 의료선교사로 온지 2달 반 정도 지난 어느 날 저녁, 그는 평상시처럼 외국인 환자를 진료하고 밤 9시 경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날 저녁 따라 날씨가 맑고 달빛은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인적이 드문 거리가 너무 조용하고 달빛에 비친 거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알렌은 아내와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가 1시간 30분 정도 서울거리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밖이 소라한더니 이내 심하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급히 알렌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내와 함께 모처럼 서울 겨울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서울의 한 중심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혁명이 바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갑신정변’(甲申政變)입니다. 이 혁명에서 민영익이라는 사람이 정치적인 적(敵)이 보낸 자객에게 온 몸에 칼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알렌은 이제 이 사람을 살려내야 했습니다. 한 밤중에 사람이 그를 찾아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민영익은 왕비의 조카이면서 정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밤중에 갑자기 불려간 알렌은 밤을 꼬박 새우며 응급처치를 했고, 이후로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 의사와 영국인 의사에게도 도움을 청하여 민영익을 살려 내는 성공했습니다.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정치인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시작되었지만, 서울에 들어 와 있던 외국 군대인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사이의 싸움으로까지 번져,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 군인들까지 합해 2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일은 왕궁을 비롯하여 온 도시와 외국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제물포로 피난을 갔습니다. 알렌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환자들을 죽게 내버려 두고 덩달아 피난을 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알렌은 여러 가지로 인간적인 고민을 한 끝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정”하고 서울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환자가 한국 사람이든,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든, 외국 군인이든 상관없이...
 

복음을 위해 천막을 만드는 사람들!

“아굴라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사도행전 18장 2~3절)
 

알렌의 치료를 받은 민영익이 완쾌되자, 왕실과 정부는 알렌과 서양 의술에 대해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알렌은 자신의 본래 신분인 의료 선교사의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렌은 더 나아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국 공사관을 통해 한국정부에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의합니다. 조건은, 한국정부가 시설과 운영비를 부담하고, 미국의 ‘자선단체’가 의사와 거기에 따른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이었지요. 알렌은 여기에서 자신을 한국 선교사로 보낸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부를 ‘자선단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미국의 선교본부가 의사와 의료비용을 부담하지만, ‘선교본부’라고 직접 말하면 외교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자선단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지요.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자는 알렌의 제의는 고종 임금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양쪽에서 다 좋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1885년 4월 3일 국립병원의 형태로 설립되어 일주일 후인 10일부터 진료를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설립당시 제중원의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우리나라 전통 의술에서는 할 수 없는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중원은 서양 의술이 한국 의술을 돕는, 즉 서양 문명과 한국 문명이 만나 서로 돕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둘째, 제중원은 우리나라 정부와 외국 선교부에서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지요, 그러므로 제중원은 한국 관리와 서양 선교사가 만나 서로 도와주어야만 하는 장소였습니다. 셋째, 이제 의료선교사 알렌은 제중원에서 병든 한국 사람이라면 그 신분이 무엇이든 누구나 만나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중원은 선교사와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이 만나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넷째, 제중원은 한국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므로 그 안에서는 당시 나라 법에 금지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중원은 이제 선교사가 복음으로 이 민족을 돕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이상 네 가지 성격을 모아보면, 제중원은 선교사가 이 민족을 잘 도울 수 있도록 터 잡고 살며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갈 수 있는, 법적으로 보장된 장소인 셈입니다.


우리는 제중원의 성격을 다시 이렇게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봄이 되어 벼 농사철이 되면 우리 농부들은 제일 먼저 논 한쪽에 부드러운 흙과 적당한 물로 ‘못자리’라는 곳을 만듭니다. 농부는 이 못자리에 먼저 볍씨를 뿌리지요. 이 못자리에서 볍씨가 자라나 적당한 키의 모가 되면 이제 논에 옮겨 심습니다. 모가 벼가 되어 나락이 잘 익으면 추수합니다. 그 곡식은 이제 밥이 되어 우리의 식탁에 오릅니다. 이상이 벼농사 짓는 과정입니다. 씨가 땅에 뿌려져서 우리의 식탁에까지 오리기 위해 처음 거치는 곳이 못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제중원은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질 수 있도록 돕는 한국교회의 ‘못자리’였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 복음의 못자리를 만드신 하나님! 제중원은 처음 ‘자생적 신앙공동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장 24절)
 

첫 선교사 알렌의 헌신으로 제중원이 세워진 1885년 4월 3일 이후 3개월이 안 되어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선교사 네 가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했습니다. 이 네 가족 중에 두 가족은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파송하였고, 두 가족은 미국의 북감리교에서 파송하였습니다. 사실 이 네 가족의 선교사들은 이미 일년 전인 1884년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 올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중원이 세워지고 이틀 후인 4월 5일 부활절에 선교사 두 가족, 장로교 목사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선교사 아펜젤러 가족이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5월 3일에 감리교 목사이면서 의사인 스크랜튼이 혼자 왔습니다. 6월 20일에는 선교사 세 가족이 동시에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 항에 도착했습니다. 언더우드와 함께 앞서 왔었지만 정세가 불안해 일본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던 아펜젤러 부부가 다시 왔습니다. 또한 앞서 혼자 왔던 스크랜튼의 어머니 스크랜튼은 미국의 ‘부인외국선교회’에서 처음으로 임명한 한국 파송 여선교사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53세였습니다. 나머지 한 선교사 가족은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과 그의 아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1885년 6월말까지 한국에 들어 온 선교사 가족은 알렌 가족을 포함하여 총 다섯 가족이 되었습니다. 모두 헤아리자면, 알렌과 그의 아내와 아기,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임신 중인 아내, 스크랜튼과 그의 아내와 아기와 어머니 스크랜튼 여사, 헤론과 그의 아내, 이렇게 총 12명입니다.


그런데 6월 20일 선교사 세 가족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매우 중요하고 뜻 깊은 일이 시작됩니다. 다음날인 6월 21일 오후에 헤론 가족과 어머니 스크랜튼은 서울에 있는 알렌의 집에서 첫 만남을 기념하는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후, 마침 그날이 주일이기도 하기에 그들은 저녁 8시에 주일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알렌은 그날 자신의 일기에 이때의 예배를 우리나라 안에서 드린 첫 번째 공식 예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날 이후 1885년 6월 21일 주일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첫 공식 예배를 계기로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목사의 집이나 미국공사관의 사무실 또는 제중원 등을 번갈아 가며 주일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동안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렸었고 그 일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과 함께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공식 주일예배를 통해 서양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이 조선 땅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것입니다. 이는 1879년에 우리나라 사람들만으로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이후 실로 6여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이방인이었던 그들 ‘선교사 공동체’가 우리의 ‘자생적 신앙공동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선교사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다양했습니다. 선교사들마다 교단 소속이 달랐고, 복음전도, 의료, 교육 등 그 사역의 관심사들도 모두 달랐습니다. 1885년 6월 26일에 쓴 의사 헤론의 보고서에는 처음 선교사 공동체가 그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나는 나의 임무가 위대하신 의사에 관해 알리는 것이지 단순히 내가 가진 의료기술을 행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를 이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약 60여명의 외래 환자를 매일 치료해 왔는데, 가끔 수마일 떨어진 시골에서 온 환자들도 있다. 업무는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주님께 쓰여질 수 있도록 당신들의 끊임없는 기도를 부탁드린다.”
 

지금은 의술을 통해 병든 이 땅의 백성들을 치료하지만, “위대하신 의사” 구세주를 알리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헤론과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의술이든 교육이든 궁극적인 목표는 구세주를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중원 중심의 선교사 공동체를 지탱해 주는 신앙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중원은 선교사 공동체가 추구하는 그 목표에 적합한 기관이어야 했으며, 선교사로 이 땅에 들어온 각 개인 역시 그 목표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동의 목표가 흔들릴 때, 선교사 공동체 역시 크게 흔들렸습니다. 1903년 원산의 선교사공동체가 통회 자복함으로써 회복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첫 마음, ‘첫 사랑’이었습니다.

 

글쓴이 : 정성한(영남신학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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