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흐른다. 때로는 멈추어 서는 것 같지만 굽이치며 흐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 너와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너와 내가 분열하고 갈등하는 것 같지만 결국 역사의 한 줄기를 이루며 더불어 흐른다. 역사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 보다는 과거가 지닌 가치를 찾아보려는 넉넉한 마음가짐을 가져보라고 가르친다.
역사인식의 차이가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세월’로 규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토록 분명하게 ‘과거와의 단절, 너에 대한 부정’을 선언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을 ‘의미 있는 세월’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부닥치고 있다.
삶은 관계이고 만남이다. 나의 삶은 ‘너’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유대인 신학자 마틴 부버는 관계의 두 가지 형태를 언급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이다.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 ‘나 만큼의 너’를 만나게 된다. 내가 ‘그것’의 차원에 있으면,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너’가 아니라, 단지 대상이요 사물에 불과한 ‘그것으로서의 너’를 만나게 될 뿐이다. 반면에 너에게서 ‘영원한 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나는 분명 ‘영원한 너’(하나님)와 하나 된 ‘영원한 나’일 것이다. 이렇게 너와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너의 가치’를 인정함에서 ‘나의 가치’가 드러난다. 조선 초기, 태조의 셋째 아들 방원은 권력욕이 커서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구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다. 어느 날 방원은 아버지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된 무학대사를 만나자 이렇게 무안을 주었다. ‘대사를 보니 마치 돼지를 보는 것 같소이다.’ 그러자 무학이 방원에게 답한다. ‘제 눈에는 왕자님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그려.’ ‘너의 가치’를 볼 눈이 없었던 방원은 결국 ‘너를 무시하는 일’을 하게 된다. 나중에 즉위하여 태종이 되자, 왕권을 강화하고, 전국의 주요 사찰을 철폐하는 등의 구습타파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얻어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기록하지만, 야곱도 마찬가지로 에서를 가볍게 여겼다. 그로 인해서 20년 넘게 고향을 떠나 있어야 했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에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에서를 만난 야곱이 형에게 고백한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에서도 변했지만, 에서를 보는 야곱은 더 많이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너’를 무시하던 야곱이 아니었다. 한 때 무시하던 형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야곱에게 하나님은 복을 허락하셨다.
진정한 가치는 발견하는 자의 몫이다.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각이 진 다이아몬드는 둥근 유리구슬 보다 가치가 없기 마련이다. 제대로 구르지 못하는 돌이라고 버려질 것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국보 중에 일명 ‘기자에몬 이도’라고 불리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이 있다. 일본인들이 말차를 만들어 마시는 자그마한 그릇이다. 이 그릇은 원래 경남 진주 지방에서 주로 생산되던, ‘평소에는 밥사발이요, 이빨이 빠지면 개밥사발’이었던 흔해빠진 조선의 ‘막사발’에서 유래한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서 잡혀간 도공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평범한 사기 사발에 매료되었다. 두 손으로 감싸 잡으면 아귀에 쏙 안기는 무심한 사발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경탄한다. 유별이다 싶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가치관을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자신을 하나로 여기셨다(마태 25:40,45).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버림받은 자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신앙생활은 이런 예수의 안목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다. 너를 소중히 여기면 그만큼 내가 소중하게 인정받는다.
‘링에 오르지 않으려면 싸우지도 말아라.’하는 말이 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링에 올라 싸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니 싸움이 성립한다는 것 자체가 링에 올라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 모두 사회라는 링에 올라선 존재들이다. 링에서 싸우려면 상대를 인정하고, 룰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상대도, 룰도 인정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링 자체를 부정하는 독선적인 자세일 뿐이다. 이런 독선이 힘을 얻으면 ‘너와 나’의 관계는 단절되고, 역사는 몸살을 앓게 된다. ‘너는 동으로 갔으니, 나는 서로 간다.’는 방식으로 사회는 분열되고, 부정적인 기운이 퍼져서 서로를 질식시키게 된다.
우리 모두를 품고 흐르는 역사의 흐름만큼 국민들의 의식도 변하고 있다. 오늘의 국민의식은 분명히 ‘잃어버린 10년’ 이전의 의식과 같지 않다. 세월의 흐름만큼 성숙해졌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물리적 힘에 의존하여 ‘나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강압적인 권력은 인정받지 못한다. 권력의 근거를 ‘경제적 성취를 제공함’으로 확보하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요 단견이다. 이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성취와 절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으나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 권력은 철학이 있어야 한다. 멀리 내어다 볼 수 있는 역사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2009년을 맞이하여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칼빈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개혁자로서 평생토록 여러 전선에 걸쳐서 날카로운 대립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500년의 간격이 놓여 있기에 ‘역사적 칼빈’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서 단편적이나마 그의 역사 인식을 그려볼 수 있다.
칼빈이 개혁 도상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가장 큰 위협은 이전 시대의 권력자였던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로마 교회는 개혁의 싹을 꺾어 버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로마 교회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로마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보존하여주신 구원의 씨가 살아있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혜다. 이제 개혁교회가 할 일은 그 씨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싹을 틔우는 일이다. 칼빈은 과거의 구체제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거부한 것은 우선 로마 교회의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권체제였다. 과거에 대한 전적인 부정은 자칫하면 자신의 근원을 지워버리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한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사’로서의 예배를 거부하면서도, 그들의 예배를 이루는 성찬을 부인하지 않았다. 칼빈은 ‘말씀 없는 성만찬’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성만찬’으로써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매주 성만찬을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제네바 교회는 성만찬을 일 년에 네 차례만 갖게 되었다. 시 의회가 성만찬 예식이 과거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어서 곤란하다는 정치논리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그 상태를 그대로 두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을 수가 없다. 개혁 초기에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정치논리에 의해서 고착된 편향적인 개혁교회의 예배양식은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그 문제점을 재론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은 잠깐이지만, 무분별한 단절로 인해서 초래하는 역사적 여파는 실로 크다.
칼빈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면서, 구시대의 긍정적인 유산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그의 교회론이다. 칼빈의 교회론적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인 부르심’에 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은밀하게 부르셔서, 품에 안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아 주시는 품이 교회이다. 그래서 칼빈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본성을 ‘어머니’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어머니이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론에는 로마 교회 교회론의 근거가 된 어거스틴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의 첫 출생은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출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회의 사명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고, 양육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칼빈은 대야에 담긴 더러워진 목욕물을 내버리면서 목욕시킨 어린아이까지 내버리는 우를 범하려 하지 않았다. 로마 교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마땅히 단절해야겠지만,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본분은 소중한 유산으로 이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칼빈에게 큰 시련을 안겨준 인물 중에 루이 두틸레(Louis du Tillet)가 있다. 한 때 칼빈의 친구이기도 했던 두틸레는 제네바를 떠나 로마 교회 다시 돌아간 인물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주의자라는 신학적 모함을 받고 쫓겨나자, 두틸레는 쫓겨난 칼빈에게 편지를 보내서 분리주의자인 개신교를 위해서 목회하는 칼빈의 소명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신이 제네바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제네바인들을 도구로 선택하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조상들의 교회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은 두틸레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비록 쫓겨난 몸이지만 자신을 쫓아낸 제네바를 부정하지 않았다. 칼빈은 두틸레에게 ‘내가 섬겼던 제네바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교회였으며, 그들을 위한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개인적으로 겪은 아픔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칼빈은 그것으로 인해서 근본적인 관계마저 단절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빈의 믿음은 다시 현실이 되었다.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제네바는 칼빈을 다시 불렀고, 잠시 흐트러졌던 개혁은 더 힘찬 동력을 얻게 되었다.
칼빈에게 개혁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유산을 새롭게 이어가려는 몸부림이었다. 종교개혁은 역사 속에서 ‘너’를 배격하기보다 ‘너’에게서 희망의 싹을 찾아내는 눈 밝은 이들이 존재해야 할 가치를 보여준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정신이다.
(이재천 기장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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