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 10월 모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에 대한 김영남교수, 김영한 교수, 강승삼 교수의 발표에 대한 응답)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회장)
사람은 물론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내가 어떤 입장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서 밝게도 또는 어둡게도 보이고 아름답게도 또는 추하게도 보인다. 즉 니느웨 성이 저주와 심판의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긍휼과 구원의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고넬료가 혐오의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긍휼과 구원의 대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성 프랜시스 당시 모슬렘과 이단은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었지만 프랜시스에게는 긍휼과 복음화의 대상이 되었다.
김영남 교수는 이슬람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와의 “공통점”과 “유사점”을 지적하면서 바라보았다. “이슬람은 사실 기독교와 여러 면에서 기독교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즉 유일신 사상에 나타난 공통점을 지적하면서 바라보았다. “초월적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과 “창조주와 심판 주로서의 하나님”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지니는 공통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그 의미와 강조점은 다르지만 이슬람이 “자애로우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기독교와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김영남 교수는 이슬람에 대해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긍정적인 자세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런 도전 앞에서 이웃으로 와 있는 무슬림에게 두려움이나 적대감을 가진다면, 그것은 복음전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슬림이 와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무슬림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종하는 경건한 삶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슬림들은 복음에 반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넬료의 경우에서 보듯이,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반응함으로써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들과의 대화에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양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유산을 통해 복음전달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엄격히 단일 유일 신론을 주장하는 무슬림들에게 삼위일체 유일신론이 하나님의 속성 그 어느 부분도 손상시키지 않고 성육신을 통해 드러난 유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임을 증거 해야 할 것이다.”
김영한 교수는 이슬람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바라보았다. “이제 이슬람을 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세계 선교 전략에 대비하는 일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적 차이를 논하는 데 있어서 신관, 중보자관, 성령관, 종교관, 구원론, 종말론에서의 차이를 밝히고자 한다.” 즉 “단일 신과 삼위일체 신”의 차이가 있고 “군주적 신과 사랑의 신”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고, 이슬람에는 중보자가 없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성령과 강신의 차이”가 있고 “율법 종교와 은혜 종교”의 차이가 있고 “자력구원과 대속구원의 차이”가 있으며 “낙원과 천국의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김영한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교리적인 면에서 비교해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은 전혀 다른 종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같은 하나님(여호와와 하나님)을 두고 있으나, 이슬람과 기독교는 전혀 다른 신(알라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다. 중보자관, 성령관, 구원관, 종말관도 다르다. 기독교와 이슬람, 양자의 대화와 협력은 다름을 인정하는 각 종교의 고유한 정체성의 기반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이슬람에 대한 김영남 교수와 김영한 교수의 상이한 이해와 강조는 우리들로 하여금 폭 넓은 그리고 균형 잡힌 이해와 해석을 지니게 하는데 큰 도움은 준다고 하겠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는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강승삼 교수는 선교학자로서 그리고 선교실무의 총책임자로서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복음화와 선교는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승삼 교수는 글 서두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이슬람에 대한 양면적 이해와 자세를 지적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의 도전적인 세력을 위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슬림들도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도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무슬림과 기독교간에 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잘 알아야 하고 존중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연 무슬림과 기독교 간에 대화가 가능할까? 먼저 우리의 무슬림 이웃이 우리 기독교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부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편견을 갖거나 정죄한다고 불평할 것이다. 그러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꾸란에서의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들은 부정적이다. 이와 같은 꾸란의 생각을 갖고 있는 무슬림들이 기독교인과 접촉하게 될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강승삼 교수의 글이 너무 길어서 정독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제안한 대화의 자세와 방식 몇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무슬림들은 우리의 이웃이며 알라신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무슬림 이웃의 믿음에 대하여 존중하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사랑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무슬림 이웃들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저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대화선교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단한 기도와 준비, 그리고 매일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대화선교 방법은 무슬림들과 친근한 관계형성이 중요하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맘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을 향하여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기 이전에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슬림의 시각의 관점, 어려움들, 그리고 어디에서 기독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확신있는 기독교인 믿음이 무슬림들과의 건강한 관계들을 돕는다. 무슬림은 우리가 믿는 것을 담력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경탄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슬림과의 대화에서 조심해야 몇 가지 사항이다. 첫째, 무슬림에 대해 두려움과 위협감으로 대하지 말자. 둘째, 무함마드와 꾸란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자. 셋째, 성경을 함부로 다루지 마라. 넷째, 이성(異性)에게 혼자 복음을 전하지 마라. 다섯째, 그들 앞에서 돼지고기, 술, 개고기를 먹거나 대접하지 마라. 여섯째, 삼위일체나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의 사용을 주의하라. 일곱째, 기독교의 부정적인 부분들을 이야기 하지마라.” “다음은 무슬림에게 접근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 이슬람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접근하라. 둘째, 기독교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접근하라. 셋째, 꾸란에 있는 예수님의 긍정적인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라. 넷째, 동성(同性)을 이용한 교제를 한다. 다섯째, 친구를 만들어라. 여섯째, 신용을 길러라. 일곱째, 무슬림을 밥상 공동체로 초청한다. 여덟째,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도덕성을 갖춰라.”
본인은 위의 세 분의 발표에 대한 종합을 하면서 본인이 무슬림에 대해서 경험한 경험담 세 가지 이야기 하므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첫째 1988년 4월 본인이 월드 리릴후(World Relief) 총재등과 함께 북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부르키나 파소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가난한 나라로 가뭄과 기근과 질병 등으로 사람들과 동물들과 나무들이 메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미국과 카나다의 교회들이 그곳에 가서 우물들을 파 주므로 메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고 있었다. 우물 한 개를 파 주므로 그 주변의 사람들 천 여명이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본인은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고 즉시 한국교회들에게 호소하여 우물 십여 개 이상을 파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본인이 목격한 충격적인 사실은 그 지역의 대표적인 무슬림 추장이 수 백년 동안 간직해오던 이슬람 가보인 검을 가지고 와서 월드 리릴후 총재에게 바치면서 자기들과 자기 종교는 자기의 자녀들과 주민들을 살릴 수 없었는데 미국과 카나다 교회와 하나님이 자기들과 자기의 자녀들을 살려주었다고 말하며 감사를 표하는 것을 목격한 일이었다. 마이나 설교가 아닌 눈물의 사랑이 무슬림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이었다.
둘째 본인이 2003년 7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고 그때 한국교회가 세워준 세 개 학교의 개교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아프간의 비참한 참상을 목격하고 강변교회가 아프간의 쿤두스 지역 무랏취드에 학교 하나를 더 지어준 일이 있었다. 1억 수 천만 원을 들여 지어진 학교는 16여 개의 교실을 갖춘 아담한 학교였는데 운동장 부지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무랃취흐 학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2005년 12월에 아프간에 간 일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무랏취드에 도착했을 때 400여명의 어린이들과 100여명의 지역 지도자들이 우리 일행을 열렬하게 환호했다. 무슬림 지도자들과 경찰 및 군인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10여 미터를 지날 때 마다 10여명의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종이로 만든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면서 우리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했다.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이윽고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주지사와 교육감등의 환영사가 있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환영사였다. 어린이들이 나와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발음이 정확한 한국말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본인이 설교한 일도 없었고 예수 믿으라고 한 일도 없었는데 무슬림 어린이들이 “할렐루야” 를 힘있게 외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순수한 사랑의 힘이 저들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감격한 일이 있었다. 400여명 학생들에게 Korean Church 라는 글이 인쇄된 가방과 티셔츠와 학용품 선물을 나눠주었을 때 저들은 너무너무 좋아했다. 가난의 빛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귀엽고 예쁜 얼굴들에 행복한 웃음들이 꽃 피어나고 있었다.
셋째 본인이 아프간을 방문하고 타직을 가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시켄트에 들러서 하루 밤을 잔 일이 있었는데 그날 오후 타시켄트의 위성 도시인 베카벳이란 작은 도시를 방문해서 그곳에서 농촌 사역과 어린이 사역을 하고 있는 장로님 한 분을 찾아서 위로와 격려를 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본인에게 베카벳 시장을 꼭 한 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시장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철저한 무슬림이었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그 분을 만나자마자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가 모슬렘들을 무참하게 짓밟은 것은 큰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일부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해서 종교 전쟁과 문화 전쟁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했다. 한국 선교사들이 지나친 열성 때문에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 시장이 내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 무슬림도 그동안 많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우리도 종교 전쟁과 문화 전쟁을 일으키면서 기독교도들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우리들이 코란과 성경 말씀대로 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개혁적인 이상에 대해서 나에게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장로님이 놀라며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시장은 앞으로 그 장로님이 하는 일을 잘 돕겠다고 말했다. 다른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수용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복음을 양보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뿐이다. 무슬림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설교도 논쟁도 아니고 겸손히 상대방은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또 다시 발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