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수요성서학당(3차), 2009년 9월 30일, 오후 7:00-8:30, 삭개오작은교회]
오늘의 주제: 속죄론이 남긴 빛과 그림자: 자율/타율의 이분법을 넘어서
강의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
[1] 문제제기: 한국교회의 도덕적 자기위선과 세속적 현대인의 불가능한 초인의식
1.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라고 흔히 말한다. 그 말 뜻 중에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적 진리로서 ‘십자가사건이 인류죄를 속량하는 대속적 죽음이라는 고백’ 이 있다(마20;28, 막10:45,요1:29, 롬3:25-26,5:6-11, 고후 5:18-21, 골 1:19-22, 엡2: 14-16, 히 2:17-18, 요한1서 2:2).
이를 일컬어 ‘ 십자가의 속죄신앙’이라 부른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오직 ‘죄의 대속적 사건’으로 국한하거나 강조할수록, 지구촌 사회의 비그리스도교 문명권의 종교들과 인류문명인은 위대한 보편적 세계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옛 이스라엘 유대교의 분파적 종교에로 퇴행하거나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2. 기독교신앙의 중심적 신앙고백인 ‘속죄론’이 본래 의미에서 타락하거나 잘못 이해되면, 기독교 신앙 그 자체가 죽고마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1,500만 신도(대략 개신교 900만, 가톨릭 5백 7십만)통계의 교세를 가진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만, 한국 사회의 도덕적 부패상과 특히 개신교의 도덕적 위기상황은, 그리스도교가 중시하는 ‘속죄론’의 실질적 진리성에 대하여 세인들의 심각한 회의와 비판을 초래하고 있다.
3.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인들의 주체적 자기의식은 ‘인격적 개인주의’ 신념으로 확고해 감으로써, 인간의 개체인격적 죄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책임 질 일이지, 남이 대신 자기 죄를 속량해준다는 ‘종교적 교의’를 고대사회의 신화적 잔재로 보는 경향이 늘어간다. 더욱이, 인격적 죄의 속죄사건이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의한 피흘림’으로 인한 보상이라는 교리가 고대사회의 군주적 신관의 잔영이요 ‘셈족계 짐승피 제사의례’의 잔재물 이라고 비판하며, 재해석을 하던지 폐기하라는 주장을 휴메니즘의 이름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2] 속죄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한 준비: 그 신앙의 종교사적 배경과 신관 및 인간실존
1. 거룩함․공의로움 ․ 긍휼사랑 이라는 3대 특징을 신적속성으로서 체험한 성서적 신관의 배경:
인류종교사중에서,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된 이스라엘종교사는 아주 특이하다. 그들의 제사종교의 발달은 그들의 ‘하나님관’에서 연원한다. 그들의 신관에 의하면, 초월적 절대 인격신으로서 하나님은 단순한 사랑의 속성만이 아니라, 공의로움을 핵심으로 요청하시며, 그 본질이 거룩하신 분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관계맺는 사람들도 거룩해야하며, 공의로워야 하며, 사랑해야 함을 요청하는 하나님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죄의 결과는 응분의 대가로 무의미, 죄책감, 심판, 죽음을 맞이 할 뿐이다.
2. 죄책감 곧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자기실존이해의 특이한 문화:
이스라엘 종교사는 위의 신관에 대응하여 다른 그 어느나라 종교사나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날카로운 윤리적 종교, 도덕적 양심의 각성, 그 결과로서 죄책감의 해결문제 의식을 진지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종교문화나 도덕종교에서는 ‘중도적 예문화(中道的 禮文化), 수치심(羞恥心)의 문화, 신분과 가문에 어울리는 체면문화(體面文化)가 발달 했을 뿐,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발견되는 신 앞에서 양심가책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3. 피흘림의 제사의례의 상징성의 상실과 경직화: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희생제물’ 드리는 예배 곧 양들과 소들과 날짐승을 가지고 제단에 바치는 행위는 첨엔 매우 상징성을 지닌 것이었다. 곧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한 죄값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겐 현실적으로 한 개의 생명만을 가지고 있음으로, 자기의 죽음을 상징하는 표징으로서 ‘짐승의 피’를 흘리게하여, 자신의 죽음을 제사행위로서 고백했다.
이스라엘 고대인들은 “생명은 피에 있다”(창9:4, fp 17:10-11, 신 12:23)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고대인들의 생명론의 의식구조에서 저 유명한 히브리서의 결론적 말씀 곧 “피로서 정결하게 되며,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히9:22)가 가능하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의 종교적 의식구조를 알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사건 속에서 ‘속죄신앙’의 완전한 성취를 보았고,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번에 드리는 속죄제사로서 해석했다.(히9:27, 벧전 1:19).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생각하는 셈족계 사회와 다른 생명관을 가진 문명권의 사람들에게 ‘피흘림으로서 속죄제사를 드림’이라는 종교적 개념의 영적-상징적 의미를 ‘객관적 사실적 진리’로서 받아드리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의 중요한 속죄론의 의미는 경직된 교리의 외피로 덮힌다. 당의정 양약을 물과 함께 마시는 행위와 다름없는 ‘속죄론의 교리적 비인격화, 경직화, 주술화’가 진행되고 만다.
속죄론을 고백하는 신자가 실존적으로 옛사람으로서는 십자가 안에서 철저하게 ‘죽음’을 경험하고, 정결한 삶으로서 ‘재생’하는 통과의례가 동시에 성취되는 현실을 실제로 보이고 있다면, 기독교 속죄론에 관련된 모든 비판들은 잠잠해질 것이다. ‘선한 열매’가 곧 ‘선한 나무’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십자가 피로인한 대속신앙’을 교리적으로만 선전하는 생명없는 주술적 종교처럼 변질되어 버린 현실이 오늘의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이다. ‘죄’란 도덕적 실수나 계명의 범법행위 이상이다.
속죄론은 ‘교리수용’ 문제가 아니라, 옛 사람의 죽음이 동반되는 ‘존재변화’ 곧 ‘거듭남’ 여부의 문제인 것이다(요3:3). 예수님의 비유처럼, 500데나리온 정도의 금전부체 탕감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명값을 탕감받은자 같은 감격적 존재변화가 따르지 않는 오늘의 크리스챤의 실존현실이 전통적 속죄론의 ‘재해석’ 또는 ‘바른 해석’을 세상사람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3] 2000년 동안 교회사에 나타난 속죄론 이해의 4가지 유형( 속죄론의 이해신학)
1.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328-373)가 주장한 사탄적 세력에 대한 투쟁승리설
초대교회 및 교부시대 교회들의 대표적 십자가 사건이해의 한가지 유형이다. 당시 고대사회의 문화종교적 상황은 로마제국의 외형적 위용에 가리워져 있어서, 현실적 삶의 비극적 상황을 은폐하고 있었다. 세상은 사탄적 불의, 거짓, 위선, 교만, 정욕쾌락추구, 정치적 계략과 투쟁, 그리고 수많은 노예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이었다. 양심이 살아있는 신앙인의 눈에는 “현실세계는 사탄적 세력의 지배권, 곧 악마와 죄와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현실”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수동적이거나, 패배적인 죽음이 아니라, 이러한 ‘죽임의 세력과 공중의 권세 잡은자’에 대한 정면돌파요 투쟁을 통한 승리의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거져 쉽게 쟁취된 것이 아니라, 참사람․참 하나님의 양성을 갖추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자기내어줌과 자기희생의 사랑의 죽음을 통해 이뤄진 사건으로 보았다. 죄와 악에 대한 예수의 불퇴전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승리에 초점이 있다. “다 이루었다”(요19:30).
2. 안셀름(Anselm, 1034-1109)의 법정적 보상설(法廷的 補償說)
중세기 봉건사회와 기사도문화의 배경을 깔고 발전한 교리적 해석유형이지만, 중요한 속죄론 진리의 일면을 담고 있다. 안셀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로움을 해치고 손상시킨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합당한 대가는 그 무엇으로 대신 할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죄와 반란이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권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이미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보상할 어느것도 피조물로서 블가능하다. 다만 신성․인성을 입으시고 육화하신 성자의 대신죽음과 속량에 의해 ‘법적 응보의 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인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가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안셀름의 법정적 보상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약화되고 있으며, 그대신 냉정한 법정개념이 지배하지만, 핵심은 죄값은 치루어야 하며,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지 죄를 용납하거나 죄와 타협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안셀름은 화해와 구원사건이 하나님의 주도적 화육사건을 통해 ‘객관적으로 완결된 영적 법정에서의 보상사건’ 같은 성격이라고 해석하였다.
3. 아베라르드(Abelard, 1079-1142)의 아가페적 사랑의 내적 감화설
안셀름의 입장과 다른 반대측면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성 일반이 빠진 나약함과 불순종과 죄성을 극복한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명, 공의의 실현, 무한한 용서, 사랑의 실현을 나타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 속에 지극히 쇠약해있고 거의 말살된 것과 다름없는 인간본성의 ‘하나님 형상’을 일깨우고 성숙시키는 능력을 부어준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시키고, 내적인 영적 변화를 가져올 만큼 예수의 절대 아가페 사랑이 인간에게 새 힘과 믿음을 동반한 감동을 부어준다고 본다. 아베라르드 속죄론의 특징은 예수의 자기희생적 십자가의 아가페가 ‘인간심령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의 힘’이 된다는 것이다. 잃어버렸젔던 탕자가 되돌아 올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다. 본래 인간모습인 사랑, 용서, 공의, 평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화해론 혹은 속죄론은 현대 20세기 실존주의 신학자들에게, 그리고 휴메니즘적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4. 16세기 종교개혁자들 루터(1483-1546) 칼빈(1509-1564)의 대속적 속죄론
앞에서 살펴본 3가지 유형의 속죄론 이해를 총체적으로 완결시킨 속죄론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속죄사건의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 투쟁적 요소와 자기희생적 요소, 하나님의 자기 내어줌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적 요소, 인간의 의지적 순명과 하나님의 개입적 요소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 공의, 사랑이 동시에 손상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속죄론 혹은 화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건이 달려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정통신학적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양면성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편으론 인간의 맏형과 형제로서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 다른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류앞에 선다.
그의 십자가 죽음은 세계 및 인간의 죄의 현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죄인을 용서하고 대신 죄값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의 나타남의 사건이라고 본다. 성서가 증언하는 참된 속죄론의 본래 멧시지는, 응보법칙에 입각한 율법주의적 법정개념만이 지배되어서도 않되고, 인간성 내면 능력의 되살림이나 영적 고양만을 강조하는 휴메니즘적 윤리차원에 머물러서도 않된다고 종교개혁자들은 보았다.
[4] 오늘의 주제에 대한 잠정적 결론
1. 속죄론은 인간의 참여와 책임성을 배제한 ‘타율적 사건’만으로 이해해서는 않되며, 또한 인격적 개인의 주체적 책임성만을 강조하는 ‘자율적 사건’으로 이해해서도 않된다. 알고보면, 인간적 삶 그 자체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대리적 삶이고 빚진 삶’이기 때문이며, 신앙이란 ‘자율이냐 타율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선 ‘타율이면서도 자율인 역설적 은혜 세계’ 인 때문이다. 현대 인간들이 자신의 인격적 주체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난 인류역사과정의 ‘집단주의’에서 벗어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개인적, 인격적 주체성 주장은 좋은 현상이지만, 명실공히 인간이 자신의 인격적 행위와 실존현실에 대하여 과연 책임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웅주의적 자기과장인 것이다. 독립적 자유의식과 관계적 책임의식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정 초인이라면 좋다. 그러나, “빈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진실된 영혼의 은혜 안에서 고백이다.
2. 속죄론(atonment)의 역설적 진정성은 예수생명과 나의 생명이 하나되는 일치사건체험(at-one-ment)에 있다. 죄란 ‘분리’(인간소외)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속죄론은 교리지식이 아니고, 실존적-영적 신앙체험 속에서만 살아있는 진실로서 숨쉰다. 나의 실존이 ‘십자가’ 아래에 섰을 때, 십자가 사건이 쏟아붓는 영적 조명등에 의해 인간의 영혼이 영적으로 조명당하기 전에는, 인간은 자기실존의 적라라한 ‘죄의 현실성’을 보기 어렵다. “십자가의 대속적 힘을 믿는 속죄신앙”이란 십자가를 짊어지시기로 작정하시고, 죽음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죄와 죽임의 권세’를 절대사랑, 절대용서, 절대진실, 절대정의, 절대순명으로써 이기신 예수의 생명 속에 나의 실존을 내던저 일치시킴으로서, 나를 지배하던 ‘죄와 죽임의 세력’을 실존적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되고 자유하게된 영적 체험 속에서만 진리로서 숨쉰다.
3. ‘속죄’는 과거에 지었던 죄들의 결과를 ‘도말’(없앰)시키는 용서사건일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 ‘새 사람’에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야 한다. 신앙생활 속에서, 한번 중생체험을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십자가의 대속적 능력’을 경험했던 신자는 ‘의롭다함을 받음’(칭의)에서 점진적 ‘성화’를 이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