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준 박사(감신대 연구교수, 조직신학) ⓒ베리타스 DB |
박일준 박사(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연구교수, 조직신학)가 민중신학에 이의를 제기했다. 6일 향린교회에서 열린 한국민중신학회(회장 노정선) 월례모임에서다. 그는 연구논문 ‘가난, 영성, 그리고 혼종성’을 발표하며 민중신학이 지배 체제 담론 안에서 민중의 자리를 모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민중의 개념을 포괄하는 말로서 ‘가난한 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21세기 ‘민중’ 개념은 민중신학이 첫 출현했던 20세기 말과 다르다. 외국인노동자를 예로 들어보자. 1970-80년대에 외국인노동자는 민중신학의 사료 대상이 아니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외국인노동자는 온갖 불합리와 모순을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민중 중의 민중이다. 한국의 민중에 의해 억압 받는 새로운 민중인 셈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이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가난한 자’에 대한 새로운 범주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민중신학이 지난 20여 년 간 지배체제의 담론 안에서 ‘대항 담론’의 자리에 안주함에 따라 외국인노동자와 같이 이 시대 새로이 출현하는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진보신학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가난한 자’에 대한 재범주화는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가난을 잊은 신학은 힘이 없기에 그렇다고 말했다. “가난의 치열함이 망각되었을 때 신학은 쾌락주의 담론보다 세상을 설명하는 데 무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힘을 갖고 있지 못하며, 인문학의 담론보다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못하다. 신학 담론은 가난하고 무능한 영혼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에서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는 것.
이번 논문에서 박일준 박사는 현대인의 계층적 구분과 통합을 시도했던 학자들 3명에 대해 의의 부여와 비판을 시도함으로써 ‘가난’의 범주를 다층화했다. 3명은 <생명의 영성들>(Spiritualities of Life)의 저자 폴 힐라스(랭커스터대학 종교학 교수), 서양문화의 한복판에서 한국신학을 꽃 피웠던 고 이정용, 미국 내 다문화주의 연구를 주도해 온 호미 바바(하버드대 인문학연구소장)로, 모두 현대의 선구자적인 학자들이다.
폴 힐라스 “’가난’을 보편의 주제로 만드는 ‘전일적 영성’”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소비와 가난은 상극을 이루고 있으며 소비는 ‘탐욕’을 내재한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지만, 힐라스는 현대인들이 소비를 통해 탐욕을 발산한다기보다 소비를 통해 삶의 행복을 이루고 삶을 변화, 발전시키는 전일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을 완성한다고 보았다.
박일준 박사는 힐라스의 이러한 시도가 “소비적 자본주의와 표현적 인본주의의 이중구속이 낳는 괴리를 극복”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난의 해소에 대해 너무 막연하고 낭만적인 기대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가난이 전일적 소비에 참여하는 자아에게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는 점이 불만족스럽다고 밝혔다.
힐라스가 가난의 범주화에 기여하는 것은 ‘전일적 관점’이다. 박일준 박사는 “우리가 ‘가난’과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아갈 때 갖게 되는 오류, 즉 ‘소비주의’를 지배의 담론이나 폭력의 담론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면서 가난과 민중의 담론을 그에 대항하는 상황에서만 의미 있는 ‘편협하고 치우친’ 담론으로 만들어가는 오류를 힐라스는 시정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정용 “사이(in-between)로서 가난한 자”
이정용은 그 자신이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겪는 정체성의 이중성을 예로 들며, 인간의 근원적 모습은 ‘사이’, 즉 ‘in between’이라고 보았다. 이는 양쪽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고 떠도는 존재의 경험인데, 여기서 이정용은 ‘중첩의 경험’, 즉 ‘in both’라는 새로운 존재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양쪽 모두에 귀속된 존재로의 승화 가능성을 말한다.
박일준 박사는 그러나 이정용의 견해가 ‘사이’ 개념을 너무 순수하고 투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21세기 지구촌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중적인 정체성은 끊임없이 협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요구 이전에 스스로 협상해나가고 있는데 이정용은 이러한 정체성의 ‘협상’ 또는 ‘혼종’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사이(in between)로서 가난한 자’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그 한계가 느껴진다는 설명이다.
문화의 혼종화 탐색한 호미 바바
이정용에 비해 호미 바바는 문화적 ‘혼종’을 적극적으로 파고든다. 박일준 박사는 “바바는 차이들 속에 나있는 ‘사이 길(interstitial passage)’을 걸어나가는 가운데 배어드는 문화적 혼종을 통해 제국과 탈식민주의 담론의 이중구속을 넘어가면서, 우리 시대 이주민노동자의 문제 그리고 외국인며느리의 문제들이 결코 ‘단순하게’ 문제시되거나 해법이 제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밝혀준다”고 ‘혼종’에 대한 바바의 탐색을 소개했다.
그러나 바바는 혼종을 부각시키느라 이정용이 전개하였던 만큼의 ‘사이’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박일준 박사는 지적하며, 사이와 혼종에 대한 탐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