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발음에 매우 익숙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도 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지저스’일 터이고, 독일인들에게는 ‘예수스’, 프랑스인들에게는 ‘제쥬’, 중국인들은 ‘야소’라 부르니 말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예수’라는 명칭의 원래 발음은 ‘요수아’에 가까웠다고 한다. 요수아란 구약성서에 20회 이상 등장하는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장본인인 ‘요수아’(혹은, 여호수아)가 잘 알려져 있다. 이 발음이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넘어가면서 헬라 발음인 ‘이에수스’가 되었고, 이것이 서구 사회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넘어오면서 이천 년 뒤의 한국에서는 ‘예수’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수’라는 발음의 족보를 치밀하게 추적하더라도 그 옛날 갈릴리 땅에서 불리어지던 정확한 발음의 복구는 어차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읽는 법이란 씌어진 글자와는 달라 세월이 지나면서 큰 변천을 겪기 때문이니, 우리에게는 그저 ‘예수’의 원래 발음이 ‘요수아’와 가까웠으려니 하는 추측만 허락될 뿐이다. ‘요수아’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돕는다’, 혹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를 두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들뜬 어조로, ‘예수’라는 이름 자체에 벌써 세상을 구원할 하느님의 경략經略이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 즉,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식으로, 예수님이 장차 이루어 내실 위업을 미리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주장이다(마태 1,21 참조).
물론 ‘예수’라는 이름에 그런 뜻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란 당시의 유다인들 사이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것들만 해도 ‘예수 바라바’라는 죄수(마태 27,16)와 ‘바르 예수’라는 거짓 예언자가 있을 정도이다(사도 13,6). 한국에서도 흔히 아기의 이름을 붙일 때 신경을 많이 써서, 가능한 한 복스럽고 아름답게 지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그 옛날의 유대인들도 좋은 이름을 아기에게 선사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유다 식 이름인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에서 따온 것이다(사도 7,58;8,1;9,1 등). ‘예수’라는 이름도 당시에는, 구약성서의 인물에서 따온 그저 평범한 남성의 이름이었다고 보면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좋은 이름을 너도나도 따왔을 테니, 그 수많은 예수들 중에 어떻게 우리들의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이는 ‘예수’와 하나처럼 붙어 다니는 또 하나의 호칭으로 가능하다. ‘예수 바라바’나 ‘바르 예수’처럼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불리어졌다(마태 2,23;26,71; 누가 18,37; 요한 18,5.7;19,19 등등). 이를테면, 많은 예수들 중에서 특히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이를테면 구별을 지향한 이름이 되겠다. 처음에는 구별을 위해 편의상 붙여졌던 ‘나사렛 예수’는 훗날 그리스도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구원자의 이름으로 그 독특한 향기를 풍기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예수를 ‘이에수스 크리스토스’라 불렀다. ‘크리스토스’란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으로 ‘기름 부은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며, 원래는 일종의 관직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고 한다.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우리말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 호칭 역시 그리스도교의 훗날을 통괄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