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차정식] 햇볕의 기억

차정식 교수의 길 위의 신학에서

아파트 잔디밭 바위 위에 잠자리 한 마리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간밤의 어둔 기억을 털어내며, 아침이슬을 말리고 있다. 평온하다. 조는 듯, 명상하는 듯, 그 잠자리 한 마리의 포즈에 내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생각 없이 가벼운 날개 위에 햇볕을 받는 순간은 얼마나 행복한가. 바위는 아침햇살 아래 충분히 달구어져 있다. 그의 가느다란 다리도 발바닥에 달라붙은 섬세한 솜털도 그 따스한 온기에 깊이 머무는 듯, 미동이 없다. 모시망사보다 더 얇고 섬세한 날개는 양 옆으로 퍼져 이슬에 젖은 축축한 내면을 휘발시키고 있다. 고요하다. 이 다사로운 아침 풍경은 왜 그리도 경건하게 내 시선을 떨리게 하는가. 이 시월 한복판의 아침햇살은 왜 그리도 서럽게 고맙고 정겨운 것인가.


돌이켜보면 햇볕의 기억은 계절마다 다르게 내 감각을 자극했다. 봄날의 햇볕은 웅크렸던 겨울철의 쌀쌀함에 대한 간절한 보상으로 찾아오기 일쑤였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사위로 좌충우돌 먹잇감을 찾듯 햇볕은 일용할 양식으로 쟁취해야 할 대상 같았다. 동네 초가의 처마 밑에 고드름 녹은 물이 떨어질 즈음, 소년은 그 빛에 환한 햇살이 그 물방울에 부서지는 장면을 쳐다보며 물끄러미 쪼그려앉곤 하였다. 질척거리는 주변의 땅바닥을 피해 간신히 마른 땅 한 구석을 찾으면 영락없이 햇살이 모여들었다. 칙칙한 몰골이 호사를 누리는 짧은 순간이었다. 우울한 기억과 적빈의 휑한 가슴이 부요해지는 은총의 모서리였다. 딱딱한 고드름이 부드럽게 풀어져 지푸라기 냄새를 싣고 내릴라치면 햇살은 그 아롱지는 물방울을 보듬으며 앞으로 디뎌나가야 할 지상의 여정을 안내했다. 내 시선은 그 포획된 풍경 아래 소박하게 행복했을 터이다.


여름의 쨍쨍거리는 더운 볕뉘는 차라리 망각의 대상이었다. 땀에 절은 내 몸은 전전긍긍하며 그늘을 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풀 속에, 시냇물 아래, 심지어 동굴 속으로 숨어 햇볕은 이별해야 할 애증의 연인 같았다. 그렇게 작별의 망각이 길어질 때면 대낮의 햇살은 그 대신 들판의 곡식들을 향해 무구한 성장의 에너지를 선사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는 그 초록의 들판과 풍요한 산하의 물상들에게 햇볕은 보너스처럼 보름달처럼 늘 여분의 생명을 부여했다. 더울수록 더 바지런한 노동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찌우는 신진대사는 그 여분에 대한 감격의 답례였을 것이다.


가을이 들판을 익게 만들 때부터 햇볕은 아침과 저녁 나절 아쉬운 그대의 추억처럼 몸을 불러냈다. 황혼이 왜 황홀할 수밖에 없는지, 아침햇살이 왜 이별 너머 재회의 신호인지 관념의 추상에 앞서 몸의 구체가 그 전갈을 받아 먼저 알아챘다. 낙엽이 다 내리기 전, 또 다시 고드름의 계절로 잠입하기 전, 햇살은 몸을 알맞게 달구고 나서 사념마저 익게 만들곤 했다. 괜스레 더 긴 걸음으로 멀리 걷다보면 햇볕과 몸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우주의 저편으로 날아갈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일과를 망각에 묻고 언어를 잃어버려도 햇볕 한 가닥만으로도 하루의 여행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또 그 계절의 바퀴 한 바탕 돌아 다시 그 햇볕의 은총을 끌고 내 공허한 등판에 머문다. 고추잠자리 두 날개에도 머물며 고졸한 이미지 한 컷 선사한다. 조용히 속삭이며 전한다. 너의 ‘쇠도끼’는 ‘나뭇가지’로 띄워 찾아낼 수 있다고. 몸을 가볍게 하듯 정신을 줄이고 이제 보송보송한 날갯짓으로 저 햇살을 쫓아 무상한 여행을 떠나보라고 말이다. 잠자리는 내 손바닥 그늘에 당황했을까. 날개를 쫑긋거리며, 장난은 순전히 장난으로 화답된다. 아, 아직 따스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그 사실을 되뇌며 걷는 대지가 다시 정겨워진다. 내 등짝의 메마른 고독을 달구는 햇볕의 동선은 오래 묵은 자유의 한량이다. 그 헛헛한 소요의 틈새이다. 더 유쾌하게 놀고 싶은 에누리의 생명이다. 오로지 그 틈새와 에누리의 힘으로 계시의 순정을 회복시키는 저 둥근 햇볕의 다독임이여!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왜 한글 사도신경에만 "음부에 내리시사"가 빠졌나?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한국교회 사도신경에서 편집되어 삭제된 "음부에 내리시사"가 갖는 신학적 함의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