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종교와 정치…침묵도 정치임을 잊지 말아야"

『종교와 인간』 저자와의 만남

  ▲『종교와 인간』 두 번째 증보판을 펴낸 이화여대 서광선 명예교수 ⓒ베리타스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부터 시작해 영혼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인간이 던진 수많은 물음들에 답해왔고, 지금도 답하고 있다. 이화여대 서광선 명예교수가 『종교와 인간』 두 번째 증보판을 냈다. 이번 증보판에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각 종교들의 다양한 이해들을 충실히 담았다.

비교종교학이란 학문적 방법을 이용한 저자는 인간 사회의 양대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각 종교들의 전통적 입장을 분석하고, 비교했다. 종교들의 의견들을 종합해 이상 사회를 향한 바람직한 정치·경제 제도가 무엇인지를 전망했고, 종교의 바람직한 역할도 논했다. 신학자이면서 철학자 그리고 종교학자인 서광선 명예교수를 7일 이화여대 근처에 소재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75년에 초판을 쓴 이후로 93년 첫 증보판에서 한 쳅터(16장 인간과 역사의 종말)를 더 늘릴 때 하나님 나라와 정치 이야기를 잠깐 했어요. 그것을 따로 떼어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쓴 것이고, 뉴욕발 금융위기 등 경제 문제가 한창일때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 다니면서 배우고, 보충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번 용기를 내서 ‘종교와 경제’를 다루게 된 것이에요”


초판에서 처럼 ‘신과 인간’이란 철학적이면서 실존적 질문에 답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와 경제’란 인간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실전적인 물음에 종교의 대답들을 한 데 모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기자의 관심은 기독교가 무슨 답을 했을지에 모아졌다. 저자는 ‘기독교와 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했을까?

- 새로 추가된 ‘종교와 정치’ 쳅터에서 ‘기독교와 정치’를 따로 떼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조명해 주십시오.

“정치 신학을 얘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정치 신학이라는 책을 하나쓰게 될거에요. 신학자 몰트만 식으로 할 수 있겠죠. 몰트만은 주로 정치 신학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기독론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의 정치 사상을 주로 다뤘어요. 내가 만약 포괄적인 방식으로 정치 신학이란 책을 하나 쓴다면,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부터 살펴봤을 거에요. 야훼 하나님이 왜 왕을 세우는 것을 처음부터 반대했는지. 그리고 왜 백성들은 야훼한테 왕을 세워달라고 그렇게 졸랐는지.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을 세웠더니 그들의 정치에 대해 또 어떤 비판이 있었는지. 특히 다윗왕, 솔로몬의 정치에 선지자들은 어떻게 비판을 했는지. 어용적인 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권을 유지하는 제사장들 그리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아모스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입장.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두가지 흐름이 있다면 하나는 선지자적인 비판적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적인 보수적이고, 정권을 유지하는 입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그 흐름에서 하나님은 어느 편이었는가. 그게 논의가 되어야 하겠죠. 또 그런 전통에서 예수는 제사장이냐? 카톨릭도 그렇지만, 개신교 신학에서도 예수를 제사장쪽을 많이 강조하잖아요. 그러나 진보쪽에서는 예수를 선지자의 전통 위에 놓죠. 그런 흐름을 가지고 서구의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인정될 때, 그 때 기독교는 벌써 정치에 밀착한, 권력 의존적이고 권력 지향적이게 되죠. 그래서 권력이 부패하면 기독교도 동시해 부패했던 과거가 있잖아요. 그렇게 중세 기독교까지 쭉 성서에서 시작해서 역사적으로 종교와 정치 얘기를 쓸 수 있겠죠”

- 종교에서 정치 얘기를 할 때 ‘정교 분리의 원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교 분리의 원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계몽주의 시대, 불란서 혁명을 시작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시작됐죠. 분리라고 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는 국교라는 것을 없애겠다고 하는 거죠. 신교의 자유를 준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종교의 다원화도 진행되고 말이죠. 그런데 국가는 종교에 대해서 정교 차이라고 하는 등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지만, 종교는 국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냐, 다만 침묵해야 되느냐. 이런 질문들은 20세기 들어 히틀러의 문제로 심각하게 논의되기에 이르렀어요.전쟁에 대한 문제, 폭력에 대한 문제, 인권에 대한 문제 이런 것들이 나오면서 국가는 종교에 대해서 간섭 안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해요.

종교는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발언을 할 수 있고, 선지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종교 자체가 정치화 되거나 어용 종교가 되면서 종교가 국가권력에 들어가서 좌지우지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요. 그래서 부패가 생기면 말할 것도 없고요.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 스님이 스님 옷을 입고서 국회 국무회의에 들어갔다. 한국 사람의 정서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신부도 신부 옷을 입고서 국무회의에 들어갔다면. 한국인들의 민심은 어떨까? 이런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해야되거든요. 쉬쉬하고 덮어버릴 수 만은 없는 일 아니겠어요. 종교인이 국회에 들어가고, 종교인이 정부에 들어가 고위 관리가 되는 것에 대해 본인들이 고민을 했는가.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요. 별로 고민한 흔적이 안 보인다는 거에요. 그런 얘기까지 하게 되면 책이 한권이 되요”

- 정치 신학 관점에서 교회의 사회·정치 참여는 바람직해 보일지 모르지만 보수 교회들은 여전히 이를 ‘세속주의’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 봅니다.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과연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서 박사는 진보와 보수의 정의를 먼저 시도했다. 보수가 지키려는 가치가 무엇이고, 진보가 지키려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석하며 진보·보수의 견해차를 좁히려고 한 것이다.“보수의 원뜻은 결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를 보수하는거 아니겠어요. 자유라든지, 평등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인권 같은 것 말이죠. 그래서 보수는 이북에 대한 자유를 얘기할 때 자기들만 인권을 얘기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북에 인권 얘기를 하면서도 한국에서 인권을 말하면 아마 "그건 좌파가 하는 일”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거에요. 내면적인 자기 모순이 있어요.

진보쪽에서도 우리만 인권을 부르짖고, 우리만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것이지 보수는 아니다라고 생각해요. 보수는 자유와 인권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가장 오래된 보편적 가치를 보수하겠다는 것이 보수고, 진보도 가장 오래된 역사적인 것들을 어떻게 하면 오늘의 상황에서 지켜나가야 하느냐는 것이 진보죠.

보전하고, 보수한다는거 뭘 보수하자는 거냐?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간단한거 인지도 모르겠어요. 교회가서 헌금을 하고 예수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천당에 간다고 가르치고, 성경은 틀림없다며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고 말이죠. 보수가 근본주의가 되면 극단화 되는 거죠. 자유주의도 마찬가지에요. 말하자면 자유주의의 근본주의가 또 있거든요. 자유주의의 근본주의는 잡힐게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안잡히는게 자유주의란 말이에요. 정치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얘기하고,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비판적인 입장에서의 참여지 직접 정치권 아래 들어가서 일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 중에서도 정권 아래로 들어가 세속화된 사람도 있죠. .

그런데 어떻게 보면 보수는 더 세속화되거든요. 비판하면 안된다고 하고, 정치에 대해서 발언해선 안된다 하는 것도 정치적인 것임을 잊어버리고 있는 거에요. 침묵한다는 얘기고, 방치한다는 얘기이며 동조한다는 얘기거든요. 히틀러의 정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입장을 지킨다면서 가만 있어야 하는걸까요? 침묵도 일종의 동조였거든요. 거기에 대한 성찰이 없이 우리는 영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천당만 바라봐도 되는걸까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교회의 정치·사회 참여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서광선 명예교수는 비판적 입장에서의 교회의 사회·정치 참여를 지지하면서 침묵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한 보수 교회를 향해 “침묵 역시 정치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베리타스

- 이번 증보판에서는 경제 얘기도 다뤘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다 동양종교 아닌가요. 기독교도 사막에서 생긴 중동 종교로 가난의 문제, 가난을 그야말로 찬양할 정도였지 않나요? 그런데 그게 가난하다고 체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탐욕, 욕심을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을 갖다가 탐욕이라고 할 때 인간의 본성, 심리학, 철학으로 얘기할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로 얘기를 하게 되면 종교와 가난의 문제, 종교와 부의 문제가 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 그렇다면 가난에 관한 각 종교들의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요?

“그래서 천주교 신학자들은 가난에는 두가지 가난이 있는데 하나는 자원적인 가난이 있고, 하나는 피동적인 가난이 있다고 해요. 기독교는 자원적인 가난을 모범적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것이 천주교의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런데 경제적인 박탈이라든지 악으로서 가난. 그것은 없애야 한다는 거죠. 자원적인 가난과 달리 피동적인 가난은 정부의 정책 때문에 산업화와 빈부격차 문제 따문에 생기는 가난으로 보는 거에요.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는 스스로 자기의 탐욕을 억제하라. 그래야만 우리가 고통에서부터 해탈된다고 가르쳐요. 포기하는 것은 나누어 가지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을 비우는. 그게 불교의 사상인데. 이와 비슷한 생각이 칼빈이나 개혁주의에도 있었어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죠.

특히 칼빈은 기독교 윤리로서 우리는 청렴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지 않나요.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자원적인 가난을 수도원적인 가난한 생활을 청렴한 생활을 수도원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하라는 거죠.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죠. 새속주의가 아니라 세속화죠. 이 세상 안에서 수도원에서 사는 것 처럼 살자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살겠어요. 근면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니까 자연히 부가 축적이 되잖아. 청빈이 아니라 청부가 된 거죠. 그것이 개혁주의 경제사상이었어요. 그렇게 보니까 기독교 경제 윤리의 근본에는 탐욕을 누르는 깨끗한 삶이 있었어요

불교는 계속해서 청빈이거든. 청부가 될 수 없다는 거죠. 그렇게 생긴 부를 갖다가 기독교에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예수의 나눔 생활을 했지요” 탐욕을 처음에 죄로 여기는 각 종교의 초심은 바람직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은 사뭇 빠르게 달라졌다.

결국은 기독교 개혁주의 칼빈의 경제 윤리가 자본주의를 일으키게 된 하나의 정신. 개혁주의 사상이 자본주의 서구사회에서 일어나게 된 하나의 정신적인 근거가 된거에요. 그것을 설명을 하려고 애를 쓴거에요. 그러한 청교도 윤리를 가지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생겨나요. 그래서 고전적인 자유주의 경제 사상이 나타나는데 그 근거에는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가 있어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다. 불교에서는 억제하라고 했는데 그 탐욕을 갖다가 조장한 것이 결국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된거죠.

그 탐욕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도록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결국은 자유주의 경제 이론 아닌가요. 시장경제. 그래서 그것을 갖다가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정한다고도 말했어요. 보이지 않는게 중요한거죠.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은 자유롭게 물건을 만들고 팔고, 남의 것 식민지에 가서 훔처다가 팔고, 돈벌고 돈으로 또 투자하고, 그러면서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거죠.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오늘의 입장에서 칼빈의 경제 윤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담 스미스의 고전적인 자유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가? 그때 우리 칼막스를 이해하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역시 사회주의 경제윤리를 하나의 대안적인 자본주의를 조정하는, 조절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국가가 자본의 행태를 방치하는 그런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사회적인 약자, 빈곤, 사회적인 경제를 조정하는 그런 입장에 서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약한 정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한 정부가 아니라 강한 정부, 누구를 위한? 약자를 위한 복지, 사회를 위한 정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더 적합한, 하나님 나라의 우리 이상에 더 적합한 그런 경제 윤리를 기독교 윤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인간의 탐욕을 발산하게 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얘기를 다시 꺼냈고, 서광선 명예교수는 시장 경제 중심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름 아닌 ‘인간의 탐욕’이었다고 강조했다. 정치 그리고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아마도 세 번째 증보판에서는 나올 법한 ‘종교와 과학’에 대한 서 교수의 생각도 들어봤다.  

  ▲ 서광선 명예교수는 기독교 경제 윤리를 설명하며 시장 경제 중심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름 아닌 “인간의 탐욕”이었다고 역설했다 ⓒ베리타스

- 만약 『종교와 인간』에 ‘종교와 과학’이란 쳅터를 덧붙였다면, 어떻게 집필하실 생각이었나요?

“진화론, 과학과 종교를 얘기하면 진화론을 반대하는 것이 종교여야 한다. 또는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믿는다면 어떻게 진화론을 믿느냐. 창조와 진화는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종교를 믿는 사람은 창조론을 믿을 것이고. 종교에서는 창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창조를 믿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라고 해요. 어떻게 종교인이 진화론을 믿느냐. 진화론이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종교인이 과학을 믿고 창조론을 포기하냐. 거기서부터 출발이 될 것 같아요. 특히 종교와 진화론이 배타적이고, 양립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생각이 달라요. 종교에서는 창조론도 진화론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식으로 얘기를 전개해 나갔을 거에요”

-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와 인간의 분리를 시도합니다. <종교와 인간>에 따르면 종교와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했는데, 반박할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과학만 있으면 된다. 그런 과학은 굉장히 책임이 무거울 것 같아요. 종교적인 가치가 없이 과학을 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엔 과학도 정치나 경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윤리로 조정을 받거나 통제나 비판을 받지 않고, 종교 없이 과학만 계속된다면 인간을 파괴하고, 적대시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과 대립하는 과학이 되지 않을 것인가. 과학이 종교화될 때 종교가 세속화되는 것 만큼 과학이면 다 된다. 이것도 일종의 종교화 되는 거죠. 과학 이데올로기. 과학 스스로도 그렇게 빠지면 안되지만, 종교도 과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져야 하고, 과학과 기술. 자연 파괴적인 과학, 자연 파괴적인 기술, 성장. 현대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성장, 생태, 자연. 파괴 동시에 인간 파괴적인 것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을 해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비판적인 우호관계 말이죠” 


종교의 본질과 기능을 탐색하는 종교학 입문서 『종교와 인간』은 초판된 1974년 이래로 30년이 훌쩍 넘도록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스테디셀러. 이 책에서 저자는 종교란 인간 자신에 대한 물음이며, 사회와 우주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발돋움이라고 말한다. 결국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1975년 초판의 머리말에 썼듯이 이 책은 종교와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함께 질문을 던지고, 고뇌하는 학생들, 신앙인들과 함께 써 내려간 책이다. 종교와 인생에 대한 그 많은 질문이 모두 다 풀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글 쓴 사람과 함께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노력이 바로 종교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던가? 질문이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의미 있는 인생을 찾아나서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길잡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두번째 증보판을 내면서- 서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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