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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신론으로 보는 기존 민중신학과 새로운 민중신학 그리고 과정신학

글쓴이 : 정강길(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자료출처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http://freeview.org/

 

 

기존 민중신학의 신론과 그 한계


기존 민중신학 진영에서 논의된 하나님 상(像)은 분명한 신관(神觀)의 구도를 제시하지는 못했었다. 단지 하나님이 부자보다 가난한 민중을 위한 당파적 하나님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했을 뿐 이것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구도에 놓여 있는지는 불분명했었다. 즉, 신과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그 그림을 명확하게 그려놓진 못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기존 민중신학이 당파적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정작 그 유신론적 색조를 뿜어내기보다 오히려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 색조를 더 많이 뿜어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편 때문인지 결국 민중교회 현장에서는 기존 민중신학이 외면을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민중교회 자체가 사회라는 현장에도 발을 담그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이 종교라는 현장에도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 처지의 자리이기에 유신론적 젖줄이 희박하거나 모호할 경우 결국은 그러한 신학은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 같은 문제의 발원은 나 자신이 앞서의 저술에서 밝혔듯이 기존 민중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 토대로서의 존재론에 대한 분명한 관계와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라고 보고 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이 말하는 신의 양태 즉 신과 세계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과정신학을 인지하는 자라면 내가 말하려는 민중신학의 신관이 좀더 수월하게 이해될 것이라고 본다. 새로운 민중신학의 신관은 과정신학의 신관과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내가 말하려는 하나님은 적어도 우선성의 원리로서 세계에 관여하는 하나님이라는 점만 말씀드린다. 우선성은 하나님이 세계를 치유함에 있어 가장 고난과 고통이 최대인 지점에서부터 우선적으로 그 민중사건, 해방사건, 치유사건을 일으키겠다는 얘기다.

나 역시 하나님이 세계 안의 강자/부자보다 약자/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더욱 사랑했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한 지라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각주 이 점에 대해서는 앞서의 저술에서 보편성과 당파성으로서의 신이해 참조). 하지만 기독교적 유산은 분명하게 유신론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고 할 때 그 유신론의 구도를 정확하게 제시함이 더욱 한국의 민중신학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세계 안의 현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내는 유익한 유신론이 있다고 할 때 이는 오히려 민중신학을 지향하고자 하는 민중교회 현장에서도 분명한 유용성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민중신학을 통해 민중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먹혀 들어갈 수 있는 유신론 신학을 제공하여 이들에게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계에서 세계를 보다 참되고 유익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제시함으로써 희망찬 종교적 신앙을 던져주고 싶을 따름이다.




새로운 민중신학과 화이트헤드의 유신론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의 풍부한 자산들을 십분 활용하는 기독교 신학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고맙게도 유신론 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유신론은 칸트가 비판했던 고전 유신론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유신론으로서 유신론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기체 철학은 과학기술이 발달했다는 매우 현대적인 이 시대에서도 세계 안의 현상과 인간 경험을 설득적으로 설명해내는 유신론 사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 자신이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을 이해한 바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면, 화이트헤드의 신론은 세계 안의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여러 자연과학자들에게조차도 설득적으로 먹혀들어갈 수 있는 첨단의 유신론적 패러다임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이미 이러한 징후들은 오늘날 과정사상을 연구하는 학군들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학 진영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자나 사회과학자 동양철학자 등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신론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과정신학과 여러모로 많은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기에 거의 닮아 있다고 하겠다. 기존 과정신학의 신론은 화이트헤드에서 촉발되어 그의 제자 하트숀으로 발전된 유신론으로서, 적어도 이들 과정신학 진영이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과 함께 화이트헤드 철학을 같이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불가피하게 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은 많은 대화의 길을 터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유신론을 말할 때, 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혹은 <만유내재신론>이라고도 불리며 범신론과도 다른 의미의 유신론이다.




기존 기독교 신 개념의 치명적 오류


기본적으로 과정신학에서 거부되고 있는 기존 주류 기독교의 신 개념을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컨대, 전능자, 완전자, 초월자로서의 신 개념은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도 역시 거부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존 기독교의 신 개념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자, 완전자, 초월자로 볼 경우 결국은 세계 안의 부조리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치명적 허점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은 세계 안의 모든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일일이 그 책임성을 하나님께 물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버린다.
 
그럴 경우 세계 안의 피조물들에게는 일종의 면책을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적어도 세계 안의 비극적 사태들과 악의 발흥에 대해 말할 때 그 책임성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에게서 어찌 이토록 부조리한 세계가 나올 수 있단 얘긴가. 이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고 단련시키기 위해서라는 답변은 그지없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그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결국은 우주와 인류의 모든 역사가 신 자신의 한 판 자작극이요 놀음이란 말인가. 구차하고 졸렬한 얘기들은 이제 그만 입을 닫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도 세계의 제약과 고통을 받는다


이에 대해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했던 기독교 신학은 과정신학 이전에는 뚜렷하게 없었다. 그 명백한 차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주류 전통의 기독교 신학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세계는 하나님에 대해 조금도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주류 기독교 신학과 과정신학 진영의 신 개념의 극명한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의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은 분명하게 말한다. “신이 꼭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이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라고.”


우리들이 분명하고도 엄연하게 맞닥뜨리는 세계 안의 악의 발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제약 역시 불가피하다는 사실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신이라는 존재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신조차도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해 그 영향을 불가피하게 받는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신 역시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세계로 인해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봐야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점은, 나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조종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 혹은 세계의 행보-그것이 설령 악이라는 비극을 초래한다고 해도-를 이를 존중해줄 수밖에 없는 사태에서 기인된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내세웠다고 해도 그가 이러한 점을 간과하는 한 그 역시 한낱 오류에 빠진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님이 완전하다면 세계는 완전하다. 그러나 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역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세계를 품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모성애적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가 신의 신다움을 도대체 어디서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그 모든 존재를 과정으로 파악했는데, 그가 말하는 신 개념에 있어서 완전무결함을 논할 수 있는 지평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양극성에 있어서의 원초적 본성이 이에 해당한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무한한 포용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것은 곧 어머님의 그것과도 같다. 그러한 신의 결과적 본성이 결국은 신의 원초적 본성을 지향하게끔 함으로서 세계 안에 다시금 구원의 빛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모성애적 신관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이는 모성에 대한 신화화를 유도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라 단적인 이미지로서 그렇다는 얘기임). 자식(=세계)이 아무리 못나고 나쁜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도 어머니(=하나님)는 이를 끊임없이 온몸으로 감내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식을 강제하거나 버려두거나 하지 않고 사랑으로서 설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신을 일컬어 말하길, “진선미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이끌어 가는 인내심 어린 세계의 시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신과 세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서로의 결단을 침해할 수 없고 존중해준다는 측면에서 동반자적 관계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이것은 또한 어머니와 자식 간의 관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식이 바른 길을 가도록 유도하고 설득한다. 새로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신이다. 결국 신 역시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 자체에 신의 신다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신 개념의 차이


앞서 말했듯, 과정신학과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과정형이상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러모로 닮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과정신학과 나의 민중신학의 차이점은 나는 화이트헤드의 유신론적 구도를 수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만, 오늘날의 과정신학은 대체로 화이트헤드보다 그의 제자인 찰스 하트숀의 신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라 이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이에 대한 간략한 사례를 말한다면 나는 화이트헤드가 애초에 신을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본 점을 수용하지만, 하트숀 계열의 과정신학 진영은 신을 인격적 계기들의 사회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변화하는 하나님이지만 나의 민중신학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내가 보는 신 이해는 변화와 불변 자체를 떠나 있는 단일한 현실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며, 영원히 생성 과정에 있는 하나님일 따름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과정신학의 하나님 상(像)과 나의 민중신학의 하나님 상(像)이 공유하고 있는 합치점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가 기존 과정신학이 따르고 있는 하트숀의 수정적인 신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정합성의 여부에 따른 나 자신의 불가피한 입장 차이일 따름이다(이 점에 대해선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난제 해결 모색"을 참조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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