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묵 목사 ⓒ베리타스 DB |
진보 기독교는 그 양적 규모가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1970~80년대 개발독제체제 하에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1980년대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적 모형을 추구하는 교회 등으로 분류돼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왔다. 진보 기독교는 무엇보다 돌진적 근대화를 추구하며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구축한 국가권력에 대해 저항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취했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는 민중운동을 배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진보 기독교 상층 인사들이 국가권력에 여러 형태로 참여하면서부터 그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최형묵 목사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장을 명분으로 참여한 기독교 세력은 국가권력 체제 안에서 의미 있는 소수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포섭된 형국이었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성장주의의 외연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며 “주류 한국 기독교와 정치적 차원에서 분명히 구별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자원 배분에서 주류 기독교와의 경합관계를 야기하였고, 나아가 경제적 성장주의를 고수하는 권력에 동조함으로써 주류 기독교와 결과적으로 동반자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민주화·인권 운동 시절 진보 기독교 내부에서 상층부와 하층부의 소통이 빈약했던 점도 문제시됐다. 최 목사는 “대개 1970~80년대 민주화 인권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회 사이에는 일정 정도 괴리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특히 사회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및 제도와 교회 안에 구축된 제도와 가치가 괴리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때문에 사회적 변혁을 지향하는 비주류 한국 기독교에서는 교회 상층부 및 지도자와 교회 회중 사이에 신념상 이질성이 강한 편이었고, 밖에서는 진보적인 목회자도 교회 안에서는 보수적이 되는 사연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 교회 밖으로는 비록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정작 교회 안에는 민주주의가 약했던 점도 우려할 만한 대목이었다. 최 목사는 “밖으로는 경제정의를 외쳤지만 교회 안에서는 물질적 축복만이 지상의 가치로 존재하고 있었다”며 “당대에는 그것이 문제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훗날 사회적 민주화가 진행되었을 때 점차 문제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다.
진보 기독교의 지도력 부재 문제도 크게 부각됐다. 최 목사는 “과거 진보 기독교 진영의 상층부가 사회적 약자의 이해관계로부터 이반되면서 오랫동안 한국 기독교의 유일한 대표적 연합기구이자 동시에 진보 기독교를 대변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NCCK)의 위상 또한 흔들렸다”며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이뤄지는 기간 동안 NCCK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역할보다는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 내지는 조정자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분석했다. 공교회적 성격을 띤 NCCK가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는 것 자체를 가지고 문제 삼을 수는 없겠으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약화된 것 만큼은 꼬집어야 한다는 것이 최 목사의 견해였다.
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시대. 진보 기독교는 어떤 진로를 모색해야할까? 최 목사는 진보 기독교의 몇 가지 과제를 들어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했다.
그에 따르면 진보 기독교는 첫째,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시각이 필요하며 둘째, 자본의 지구화 현실에서 대안적 세계화를 추구하는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해야 하고, 셋째, 민중운동은 생명ㆍ평화운동과 더욱 긴밀히 결합해야 하며 넷째, 소수자 운동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연대를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과 교회 및 신학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