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신앙대부흥운동 이야기
사건으로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장 16~19절)
앞서의 ‘조선의 말로 조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첫머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 우리말로 된 첫 쪽복음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1882년)를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아마도 ‘오병이어 사건’(눅 9:12~17)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 그 백성들의 삶에 가장 깊이 스며들어 가슴에서 가슴으로 희망의 불길로 사로잡았을 말씀은 어디일까요? 분명 위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가난한 자’요 ‘포로된 자’며, ‘눈먼 자’요 ‘눌린 자’들이었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 오셨으니, 이제 그분을 눈으로 뵙고, 귀로 듣게 되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벅찬 감격들이 삶으로 이어지고 눈물로 모아져, 1907년 살을 에는 추운 겨울날씨에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홑이불과 양식 보따리 머리에 이고 지고, 성경책 가슴에 안아 들고, 어린 젖먹이 등에 들추어 업고, 평양으로, 도회지로 말씀 가르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지 않았을까요?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은 말 그대로 1907년에 한국교회 안에 일어난 신앙대부흥운동입니다. 그 발단은 1903년에 한반도의 북동쪽에 자리 잡은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시작한 회개기도회입니다. 사실 한반도 오지에서 시작된 회개기도운동은 서서히 서쪽으로 이듬해 1907년 정월 초(1월)에는 평양에서 모이고 있던 성경공부 중심의 사경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사경회는 매년 구정(설날)을 기해 약 10일간 모이는 것이었고, 1907년에도 1월 6일(양력으로 2월 18일) 구정 사경회가 개최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경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였고, 낮 시간에는 남자들과 부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저녁에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연합 집회로 모였습니다. ‘신앙대부흥운동’의 첫 현상이라 할 수 있는 ‘통회자복’ 기도는 사경회 둘째 날 낮의 학생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통회자복 기도는 곧 저녁집회로 이어졌고 10일 간의 집회기간 내내 사경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깊은 영적 체험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집단적인 영적 체험은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정기 사경회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는데, 이제는 한국인 지도자들을 통해 그 열기가 더욱 크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2월에는 이 부흥의 열기가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대학교로 확산되면서 학생들을 통해 감리교를 비롯한 다른 교단들에게 더욱 강한 영향을 주었고, 평양을 벗어나 지방으로까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평양장로회 신학교가 봄 학기를 시작하며 3월에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이 부흥회를 통해 ‘성령체험/을 한 신학생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집회를 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은 변방에서 시작되어 대도시에서 크게 점화된 후 다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회개기도운동과 성경공부운동이 만나 이루어진 것이며, 셋째는, 이 운동의 중심에 젊은 학생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성경공부운동이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하는 성경공부를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우선 당시에는 성경 66권 중에서 구약부분은 아직 다 번역되거나 인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우리말로 된 신약전서는 이미 1887년에 심양에서 출간되었고, 1900년에 새롭게 번역된 두 번째 신약전서가 서울과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경우는 사정이 너무 달랐습니다. 1898년 5월에 피터즈라는 선교사 개인에 의해 <시편촬요>(일종의 시편 요약본)가 구약으로서는 첫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04년에 가서야 선교사들로 구성된 한국성서위원회가 구약을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이 번역작업이 1906년 9월에 들어 결실을 보기 시작해 창세기와 시편이 부분적으로 출간되고, 1907년에는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상하, 말라기서 등이 쪽복음서 형태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구약전서 완역판은 1911년 3월에 가서야 일본에서 출간됩니다. 이 때 신약과 구약을 합친 그야말로 말 그대로 최초의 성경전서인 <셩경젼셔>도 출간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을 있게 했던 성경공부운동은 사실 신약성경과 구약 일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슴을 찢는 사람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꾜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사도행전 2장 37~39절)
1907년을 감동시켰던 ‘신앙대부흥운동’은 비록 해를 거듭해 연속되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 한국교회와 사회뿐만 아니라 이후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당시 한국교회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신앙대부흥운동 기간의 회개기도운동은,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와서 선교하던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이제 막 훈련되고 있던 한국인 토착 지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기독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입신양명을 위해 교회를 드나들던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그들 자신의 잘못과 죄(영적이면서 도덕적인 죄)를 깨닫게 했고, 진정으로 참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참회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형제자매 및 비기독교인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바르게 함으로써 대사회적인 도덕성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도덕성의 회복은, 한국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조선 봉건사회가 물려준 당시의 관습의 굴레들에서 구조적인 악을 보게 만들었고, 따라서 그런 악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가히 혁명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대부흥운동’의 영적체험을 한 신앙인들은 신분질서를 뛰어넘어 노비를 해방시키고 남존여비 사상을 극복하는 등 인권과 관련된 의식이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대사회적인 영향은 선교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쳐,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고 교육기관이 수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이제 청년이 된 한국교회가 그 나이에 걸 맞는 영성을 갖게 되었고, 성숙한 지도력으로 스스로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신앙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여 고유한 예배 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하여, ‘통성기도회’, ‘날연보’, ‘성미’ 등 서양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토착적인 신앙양태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런 양태들은 한국교회가 체험한 신앙의 본질을 삶 속에 구체화하려는 수단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양태들은 한국교회의 지도력을 성숙하게 하였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종속되는 듯한 그 동안의 태도들을 벗어나 대등한 동역자 의식을 갖게 되었고, 다른 교파들과도 함께 연합하는 일치 의식 역시 매우 높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대부흥운동’은 1907년의 한국교회사에 특징적인 몇 가지 사실을 기록으로 더 추가해 주었습니다. 평양신학교가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그들이 목사가 됨으로써 명실 공히 토착지도력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선교사들을 파송한 서구의 교회로부터 자립한 ‘독립노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선교 받는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을 살펴볼 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당시의 우리 민족내부와 한반도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지만, 1907년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서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가장 암울하고 치욕적인 시기의 한 중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대부흥운동’이라는 독특한 ‘영적체험’을 한 한국교회가, 이 시기 민족의 운명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하는 부분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서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고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에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의 전체적인 의미를 가치 없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이 글을 써가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어찌되었건, 한국교회는 1907년 그 날의 뜨겁고 감격스러웠던 기억을 되살려 한국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역사의 변혁기, 암울한 순간들마다 되풀이하곤 했었습니다.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순간들을 꼽아보면,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 2년 뒤인 1909년에 시작된 ‘100만명 구령운동’이 있고, 해방직후인 1945년 이후에 김치선 목사가 주도한 ‘300만 구령운동’ 역시 그 역사적 맥락은 1907년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습니다. 2007년의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들 역시 매우 강력한 리바이벌 운동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태복음 4장 12~13절)
신앙대부흥운동은 회개기도운동과 성경공부운동이라는 두 축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미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신앙대부흥운동의 한 축인 성경공부운동은 한국교회 초기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시켜 놓은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또 하나의 축인 ‘회개기도운동’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은 그로부터 4년 전, 함경남도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한 작은 수련회 모임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봅니다. 1903년 겨울에 원산 지역의 감리교 선교사들은 기도를 주제로 자신들을 위한 수련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수련회에는 스웨덴에서 한국을 잠시 방문한 프랜슨(F. Franson) 목사와 중국에서 선교하던 화이트(M. C. White) 여선교사가 참석했습니다. 당시 원산의 감리교 선교사들은 영적으로 매우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의 무력감이란 결국 복음전도의 성과가 좋지 않아 선교활동이 위축되어 있는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지금 수련회를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프랜슨 목사의 설교와 화이트 선교사의 중국선교 경험담 등을 들으며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이 기도회 모임은 수련회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제는 장로교와 침례교 선교사들 및 한국인들까지 참석한 연합기도회 성격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기도회 과정에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로 강원도 북부지역에서 사역하던 하디(R. A. Hardie)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회를 통해 선교사로 오게 된 자신의 동기를 반성하고 자책하던 중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통회자복 기도는 기도회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고, 그 기도회는 해를 넘겨 1904년에도 계속되다가 서서히 변방에서 중심으로, 그리고 서쪽과 남쪽과 북쪽으로 온 한반도에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서울이나 평양 같은 대도시의 선교사들도 당시에 많은 기도회를 하고 있었을 게 분명한데,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이라는 큰 사건의 계기가 어떻게 변방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시작될 수 있었는가하는 것이지요, 요즘처럼 한국교회의 모든 주도권이 서울의 큰 교회들에게 쏠려있는 상황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당시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나 평양의 마펫 선교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유일한 신앙대부흥운동이 변방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이 문제를 자세히 살피자면 많은 연구가 필요한데, 우선 몇 가지를 짚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먼저 당시 한국사의 큰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1904년에는 한반도에 전쟁이 있었고, 1905년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사실상 일본에 빼앗긴 해입니다. 1904년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 두 외세들이 우리 땅에서 벌인 남의 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제 아무런 방해세력 없이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은 것이지요. 즉 당시 서울(한양)과 평양은 정치적인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방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서울이든 평양이든 이 지역의 선교사들은 지방과는 달리 많은 선교업무-교육사업, 의료사업, 교회연합사업, 교회설립, 성서번역, 신학교설립 및 운영 등으로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다 그러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지방의 선교사들은 대도시의 선교사업 같은 업무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따라서 선교사로서의 가장 본질적인 업무인 복음전도에 비교적 전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사 본연의 복음전도 사역에 별 성과가 없다고 할 때, 영적으로 예민한 선교사라면 당연히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도회지 선교사들의 문제의식과 변방 선교사들의 문제의식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도시는 조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선교사업을 할 것인가가 중요했다면, 변방은 조선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삶을 나눌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산의 선교사들은 그들의 죄를 통회자복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적인 허물, 곧 조선인 앞에 백인으로서의 우월의식과 자만심에 찼던 권위주의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계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를 영적으로 새롭게 하는 운동들은 대부분 변방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그의 복음사역을 변방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변방의 농어촌 시골교회라고 무조건 대도시 교회들의 흐름을 따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일 많은 도시 교회들보다는 일 없어 보이는 시골교회들이 교회 본연의 복음전도 사역에 충실할 수 있고, 지역 이웃들과 삶을 나누는 데 보다 더 성실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쓴이 : 정성한(영남신학대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