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6장 수도원의 발달, 암브로즈와 어거스틴
1. 수도원의 발달
수도원의 희랍어 ‘nomos’는 혼자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이 시작한 것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남쪽의 사막지대 황량한 곳으로 피신해 가서 혼자 산 때부터였다. 수도생활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과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권면한 사도 바울의 교훈 또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성욕을 버리는 것과 현세의 물질생활의 모든 욕심과 미련을 버리는 것이 수도자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금욕생활을 원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자기 가정에서 실천하였다가 여의치 않아서 집에서 나와 오막살이집으로 옮겼다가 나중에는 멀리 한적한 사막지대로 가서 동굴 속이나 바위 밑이나 큰 나무 아래서 혼자 묵상과 기도로 지내게 되었다. 이런 생활이 수도원 발달의 첫 단계인 은거, 또는 은사생활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자유롭게 하고 친히 그리스도교 옹호자처럼 정책을 펴갔을 때 출세를 위하여 관공리들과 군인들과 기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다 교회의 기강에 따른 절차를 밟아 교인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교인들의 질이 저하되자, 이를 본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박해 시기의 신앙과 생활과 헌신에 비하여 너무도 차이가 있다고 여겨졌다. 이에 교회를 떠나 사막지대로 가서 은둔생활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은둔하여 혼자 산 은사들에게는 위험한 일이 많았다. 들짐승의 습격, 기근과 아사와 질병의 위험으로 숨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수도생활은 제각기 달라서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지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래를 깊이 파 목만 내놓고 몸은 묻고 지낸 사람이 있었고, 나체로 50년간 지낸 사람,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고 지낸 사람이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짐승처럼 풀을 뜯거나 곤충을 잡아 먹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안토니(Antony, 251~356)는 15년 동안 사막에 은둔하며 수도생활 했다. 그는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수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은둔자들의 독거가 너무 위험한 것을 알고 그들이 서로 도우며 함께 기도하고 예배 드릴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은둔자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옮겨 살게 됐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함께 예배 드리며 친교 나눴다. 사생활에 규칙은 없었다. 안토니는 자기 주위의 수사들을 모아서 이런 사회성을 띤 생활로 이끌어갔고 암모니어스(Ammonius)라는 사람은 320년경에 니트리아 사막에서 600명의 수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안토니와 비슷하게 수사생활을 이끌었다. 그밖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수사생활이 있었다.
수사생활 발달의 마지막 단계로 수사들이 한 건물에 동거하면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수도원이 생기게 되었다. 이 제도를 시작한 사람은 파코미우스(Pachomius, 290~345)였다. 그는 나일강 상류에 있는 타벤니스섬에서 12년 동안의 수사생활을 한 끝에 수사들을 모아 한 집에서 공동생활 하면서 금욕생활 하였다. 수도원 생활은 청빈과 금욕을 주목적으로 삼은 것이었지만 그는 한 식탁에서 먹고 같은 잠자리에서 자더라도 개인 행동으로는 수사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규칙을 만들어서 단체행동의 생활이 되게 하고, 각자의 기량에 따라 노동을 해서 수공품이나 농작물을 생산하게 해 공동생활에 사용하는 동시에 남는 것은 시중에 팔아 수도원의 필수품을 구입하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개인의 생활을 엄격하게 억압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사적인 행동을 할 여유가 있었다.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제도는 신속하게 다른 지방으로 확산돼갔다. 카파도키아의 신학자 바실(Basil)이 이 제도를 동방에서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일찍이 이집트 사막지대에서의 수도생활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가 360년경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기 이상대로 수도원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수도원 건물을 사막에서 도시 가까운 곳으로 옮겼고, 수사들의 개인적인 은둔생활을 허락하지 않고 완전한 공동생활을 도모했으며, 수사가 자기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못하게 하고 고난보다는 공동노동과 학문수양을 중시하였다. 그의 모친 마르키나(Marcina)와 그의 동생이 수도생활을 위하여 지은 집이 나중에 수녀원이 되었고 마르키나는 희랍 지방의 수녀원의 창시자가 되었다.
수도원 운동을 서방 로마 쪽으로 전하여 발전시킨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였다. 그는 이집트 수도사 2명을 데리고 로마를 방문하여 수도원의 경건생활을 소개하였고, 안토티의 전기를 써서 그의 수도생활을 널리 소개하였다. 그 영향으로 서방 여러 지방에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다.
이집트의 초기 수도원 생활이 영국에 전파되어 발달해갔는데 여기서는 수도원을 통하여 선교가 시작되어서 수도원의 수도사가 교회를 목회하는 감독직을 겸하였다. 이것이 켈틱(Celtic) 교회와 수도원의 특징이 되었으나, 수도원의 평신도의 신앙운동이어서 교회의 목회에 간여하는 것이 아니므로 후에 양자의 분리가 왔다.
안디옥부터 예루살렘까지 수도원이 신속하게 발전해갔고 각 지방은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수도원이 온 세계교회에 전파되어서 금욕적인 경건생활이 도모된 동시에 선교운동으로도 발전해갔다. 어거스틴이 세운 수도원도 전세계로 전파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