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인간의 모든 의식은 항상 지향성을 담지하며, 자연과 역사를 이해 할 때 항상 어떤 패러다임에 의존한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사물과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100퍼센트 순수 객관적 관점이나 해석평가란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인간실존상황을 기독교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의 유한성이요, 죄성이다. 인간의 유한성이란 말은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도 100년 남짓 살다가 죽는다는 시간길이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죄성이라는 것도 온갖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범죄자라는 뜻보다 더 깊은 것이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못되고, 인식엔 한계와 오류가 발생하고, 도덕적 가치판단엔 편견과 당파성이 부지불식간에 개입된다는 통찰인 것이다.
좀더 보편적 예들어 말하자면, 플라톤이 「국가」라는 명저에서 언급한 ‘동굴의 비유’속의 노예들처럼, 자기가 평생 갇혀 살면서 일하는 동굴밖에 더 밝은 햇빛이 비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고 말해줘도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예만이 그런 것 아니다. 바울로 변화받기 전에 당대 젊은 엘리트 청년지식인 사울은 어떠했던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정통신앙 고백행동이고, 진리 파수행위 이며, 이스라엘민족의 위기상황을 지켜나가는 애국적 행동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상징적으로 말해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기 전엔 대부분 우리들도 그렇게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최대이슈는 이명박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소위 ‘4대강 살리기’ 국책사업을 둘러싼 찬반 양론이다. 이 땅에서 살아갈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행복문제만이 아니라, 생태환경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정부의 ‘4대강 사업’에 관한 찬반논쟁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4대강사업’에 관련된 전문적 학문분야만 해도 수계학, 지질학, 하천생태학, 기상학, 농학, 삼림학, 토목공학, 경영학 등등 이름도 낯선 전문분야 학자들의 공동관심의 국책사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전문가들의 견해의 종합적 판단에 경청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오늘날 핫이슈가 된 국책 토목사업 ‘4대강사업’ 일명 ‘4대강 살리기’사업의 위험성과 졸속성과 비과학적 정책강행 태도를 비판하면서, 평소에 사회문제나 특히 정부의 권력입김이 작용하는 일엔 침묵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전문분야 학자들 2300여명이 개인 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들고 일어나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주목해야 할 점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 종파를 초월하여 한 목소리를 낸 종교계가 100년만에 ‘4대강 사업’을 중단하라고 하나된 목소리로서 일치단결하고 있는 놀라운 현상이다. 불교계는 조계종 종단본부가 나섰고, 가톨릭계는 주교단까지 한목소리를 내면서 정부의 사업 강행 중지와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해법을 촉구하고 있다. 원불교,천도교, NCCK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기독교계도 이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한국사회에서 집단적 힘과 조직력을 동원하여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중단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일간지에 크게 보도하는 종교집단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뿐이다(동아일보.5월26일자 신문광고 참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원로목사들 16명 이름이 명예회장으로 이름이 올랐고, 대표회장 이광선 목사외 66개 회원교단과 19개 회원단체이름으로 위에서 말한 지지성명이 보도되었다.
성명서 지지명분의 대부분 내용은 정부가 ‘4대강 살리기’ 국책사업 추진명분으로 내거는 홍보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물 부족 해결, 홍수예방, 수질개선과 생태환경복원, 일자리 창출, 문화 공간 및 시설확충 등등이다. 그리고, 그 모든 명분들이 이명박정부의 ‘녹색뉴딜정책’이라는 아름다운 홍보지로서 마지막으로 포장되었다. 놀랍게도 위 성명서는 보(洑) 공사의 27% 공정이 이미 이뤄진 상태에서 공사를 중단하거나 갑론을박하는 것은 사회혼란과 갈등을 더 유발 할 것이므로, 정쟁도구로 삼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갈등해소하고 지지하자는 내용이다.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은 사회갈등 조장행위, 극론분열행위, 정쟁도구로 사용되는 도구라고 단정적으로 폄훼하고 있다.
나는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의 한사람으로서 ‘한기총 지도부’들의 위와 같은 ‘역사를 읽는 눈멀음’과 ‘가치판단의 기준 혼동’과 ‘처신의 무분별성’과 ‘믿음의 눈 오남용’에 대하여 개탄하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기총 지도부들에 대하여 제발 눈을 크게 뜨고, 역사현실을 직시하고, 민심을 제대로 읽으시라고 간곡히 고언 드리고 싶다. 하기야 필자 같은 일개 퇴직교수 힘없는 서생(書生)의 고언이, 청와대를 드나들고 대통령을 필요에 따라 면담할 수 있는 높으신 분들의 귀에 들어갈는지 알 수도 없다.
한기총 성명서는 4대강사업 지지성명의 타당함을 보증하려고 ‘유엔환경계획’보고서가 한국정부의 녹색성장정책과 4대강 사업을 칭찬하고 좋게 평가한다는 것을 지지성명 근거로서 제시했다. 그러나 위 유엔환경계획이 마련한 한국정부의 녹색성장정책 검토보고서중 4대강사업은 논쟁적 사안이라는 점과 습지환경보호조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세계적 과학권위지 「사이언스」가 4대강 사업은 시대역행적 발상이며, 오늘날 선진국가의 하천관리 정책과 정반대방향으로 치닫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4대강 살리기’는 권력으로 밀어 부칠 일도 아니고, 집단세력을 동원하여 목소리 큰 사람편이 승리할 일도 아니다. 아무리 인간의 의식에 지향성이 따라 붙고, 사물과 역사사건 판단에 있어서 ‘패러다임 의존적 존재’ 일지라도, 비관할 정도로 맹목적이거나 절대적 상대주의론자가 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리 분별할 지성과 이성도 주셨고, 상호 열린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진위를 가려내고, 보다 합리적 대안을 공동으로 찾아낼 능력도 주셨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말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통령이 되기전 거대한 토목공사 사업을 주도한 경험 많은 이명박 대통령이 믿고 확신하는 ‘4대강 사업’의 목적과 명분이 기대하는 결과적 사실과 다르고, 과정이 비민주적이며,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기총 지도층 교역자들에게 묻고 싶다. 진실로 ‘4대강사업’이 물부족 해결, 홍수예방, 수질개선, 일자리창출, 문화시설확충의 무지개 빛 결과를 가져온다고 확신하시는가? 아니면, 한국 기독교 보수교단이 밀어줘서 당선시킨 대통령이 관철시키려는 중요정책이니까 지지성명을 내고 밀어드려야 한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일반 보통사람들 사회인들은 특히 국민의 80%에 해당하는 개신교 교회 밖 국민들은 한기총 지도부가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나단선지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시대에 왕의 식탁테이블의 빵조각을 얻어먹는 왕가(王家)의 ‘가신집단’(家臣集團)으로 전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종교계에 종사하는 가톨릭 지도자들, 불교계지도자들, 타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바닥에서 생태환경운동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애쓰고 있는 개신교의 많은 젊은 목회자와 NGO 운동가들도 한기총지도부 어른들이 이명박 정권의 ‘가신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듣기 거북하시고, 나도 또한 말하기 거북한 이런 솔직한 세평(世評)을 전해드려야 하는 꼬락서니가 스스로 맘 편하거나 곱지 않다. 그러나 복음전파를 사명으로 하여 존재한다는 한국 개신교 교회가 ‘생명의 4대강’을 지키고, 대통령의 독선독단을 깨우쳐드리는 것이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믿는 이 땅의 돈키호테들은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지지성명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낸 한기총 지도부들에게 ‘가신집단’에서 ‘예언자집단’으로 돌아서라고 고언한다. 늦기 전에 그리해야 한다.
같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서도, 최근 개신교 목사 최병성 목사가 출판한 「강은 살아있다」라는 책 한권만이라도 아무리 바쁘셔도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5년 단임 짧은 기간 안에 수만년 흘러흘러 내려온 4대강 물길을 수중보와 제방으로 가두어 놓고, 물길을 고쳐놓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열심 속에 ‘애국심’만이 아니라 역대 대통령보다 위대한 토목사업을 어리석은 국민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완수했다는 ‘정치적 공명심’이 숨겨져 있음을 지적하여 드리라. 그 일 한가지 만이라도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자부하는 한국 한기총 지도부 인사들의 최소한의 책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