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4. 네스토리안 교회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네스토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을 지지한 사람들이 로마제국 국경 밖 시리아 지역으로 와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여서 그 교세가 일취월장해 갔다. 그리고 이미 서방의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한 시리아 동양교회와 연합하여 선교하다가 결국은 시리아의 교권을 장악하게 되어 그 후 동양교회는 네스토리안 교회가 되었다.
네스토리안 교회는 시리아의 에뎃사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워 교역자와 선교사를 양성하였고 병원과 자선사업체를 만들어서 복지를 향상시켰다. 그러나 동로마의 황제 제노(Zeno)가 그리스도론의 양성론과 단성론을 다 배격하는 교서를 발표하고 양성론파인 네스토리안과 단성론파인 야곱파를 다 박해하기 시작하여 에뎃사의 네스토리안 교회와 수도원과 병원이 폐쇄되었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안 교회는 또 다시 로마 영토를 떠나(이때 에뎃사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본거지를 페르시아의 니시비스(Nisibis)와 셀루키아(Seleucia)로 옮겼다.
네스토리안 교회가 이렇게 페르시아로 왔을 때 사산제국의 황제는 네스토리안이 로마제국과 관계가 없는 것을 환영하여 네스토리안의 선교활동이 자유롭게 되었다. 페르시아에 있던 종전의 그리스도교회가 사산제국과 정치적 이유로 평안하지 못했는데 그 교회가 네스토리안 교회와 합류하여 다같이 자유롭게 선교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안 교회는 총회를 열고 니케아 신앙고백을 따르되 서방의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의했으며 498년에는 명실공히 ‘동양교회’(The Church of the East)를 설립했다. 이 동양교회는 시리아, 갈디아, 페르시아 등지의 교회를 포함하였다.
페르시아와 시리아로 이주하여 선교한 네스토리안들은 희랍 문화를 소개하여 목공, 기계공과 각종 수공업 기술을 소개하여 발전시켰고, 교육과 의술 및 상업기술도 도입하여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화적 공헌으로 네스토리안 교회의 선교적 지평이 날로 확장되어 티그리스강 양편에 펼쳐진 광대한 지역에까지 진출했는데 그곳은 유럽과 서부아시아 사이에 위치하여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리적 여건이 그들의 선교 확장에 유리하였다. 5세기에서 6세기 중엽 사이에 선교지역은 유프라테스강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어서 이집트, 시리아, 아라비아, 소코토라, 메소포타미아, 갈디아, 메디아, 박트리아 및 인도까지 미쳤다. 박트리아는 흉노족 영토이다. 그리하여 530년경에 동양을 여행한 코스마스(Cosmas)가 쓴 <그리스도교 풍토기>(Christian Topography)에 이러한 네스토리안 선교지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 광대한 네스토리안 교회의 교구에는 수많은 감독들이 있었고 지역에 따라 박해가 있어 순교자들도 있었다. 대감독은 셀루키아에 자리잡고 있었고 네스토리안 선교 이전에 있던 교회들도 거의 다 네스토리안 교회에 합류되었다.
페르시아의 사산왕조가 6세기에 내란이 생겨 이를 피하여 흉노족 속으로 피난 갔던 코바드 왕이 돌아와서 비잔틴제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교회당과 수도원을 파괴하였고 페르시아의 그리스도인 귀족의 자녀들을 투옥시켰다.
사산왕조의 호스로우 2세가 황제가 되어 비잔틴 군대와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여 안디옥과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가를 빼앗고 예루살렘을 유대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군대를 도와준 보답이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인 군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 가서는 페르시아에 있던 그리스도교회도 박해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의 재산이 몰수당하였다.
제34대 주교 그레고리우스 이래 20년 동안 주교의 자리가 비어있다가 예스야부스(Jesjabus)가 제35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사산왕조는 651년에 회교군대의 공격을 받고 왕이 도망치다가 살해된 후 회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