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최근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7. 아라비아 교회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의 혹독한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의 하나가 아라비아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비옥한 나라는 오만(Oman)과 예멘(Yemen)이고 그 두 나라의 가운데는 광대한 사막지대인데 고도 3000피트의 산악지대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책에 따르면 사도 바돌로매가 그곳에 전하여준 마태복음서가 4세기 중엽까지 보존되었다고 한다. 바돌로매가 이곳에 와서 전도하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왔던 사람들 중에는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지방에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에 일찍이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교회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리아 교회 문서에도 바돌로매의 아라비아 선교 기록이 있다.
바돌로매는 예멘의 왕 폴리미우스(Polymius)의 딸의 마귀 병을 고쳐주고 호의를 사고 큰 사례금을 받았으나 그 돈을 사사롭게 쓰지 않았다. 그는 26년이나 되는 옷을 입고 소매 없는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다녔다. 바돌로매는 그 나라의 미신과 마귀와 계속 싸우면서 전도하고 왕과 그 백성이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었다. 그런데 희랍인들이 왕의 형인 아스트레게스에게 바돌로매 때문에 재래의 신들과 마술이 망해버렸다고 호소하여 바돌로매를 목 베어 죽여버렸다. 12,000명이나 되는 군중들이 몰려와서 바돌로매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시체를 리파리스(Liparis)섬에 묻었다. 그리고 폴리미우스 왕은 바돌로매의 명령에 따라 감독 안수를 받고 20년 동안 감독직에 있었다.
아무튼 225년경에 예멘의 카타스(Katas) 지방에 감독교구가 있었다는 것이 230년에서 250년경에 쓰인 「사도교훈」(Didascalia Apostolorum)이란 책에 나온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그 지역의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살았고 집사 두 사람이 보스트라(Bostra)에 있는 한 교회를 다스리고 있었고 교인들은 대체로 중산층이고 소수의 부유한 사람이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정한 돈으로 내는 헌금은 교회가 받지 않았고 헌금을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의 명단이 교회에 비치돼 있었다. 명단의 사람들은 채무자를 투옥시킨 채권자, 노예를 학대한 주인들, 간음한 자, 부정직한 상인들, 범죄자들, 불의한 행정관들, 편파적인 판사들, 우상을 위한 기물제작자들과 보석상들, 점치는 자들, 물탄 술을 파는 자들, 불한당 같은 폭력적인 병사들, 고리대금업자 등등이었다. 이렇게 헌금 관리를 엄격하게 하면서 만일 교회를 돈이 없어 유지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문을 닫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고 교회사가 하르낙(Harnack)이 초대교회의 확장 역사에서 진술하였다.
아라비아 선교사화에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집사 데오필루스(Theophilus)의 이름도 나온다. 그는 353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예멘의 왕에게 파송된 대사의 수행원으로 가서 그곳 왕을 설득해서 예수를 믿게 했고 몇 군데에 교회를 세웠다. 데오필루스는 본래 아라비아의 한 섬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인질로 로마제국에 끌려가서 교육을 받고 356년에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아라비아 선교역사에 나오는 또 다른 한 사람은 하얀(Hayyan)이라는 상인인데 콘스탄티노플에 사업차 여행하였다가 예수를 믿게 되고 귀국길에 히르타에 머물면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배웠다. 후에 세례를 받고 전도해서 많은 신자를 얻었다.
아라비아의 교회는 로마교회 곧 동방의 비잔틴 교회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페르시아의 박해를 피하여 온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아라비아 지방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으므로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고 325년 니케아회의 때 아라비아 교회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아라비아에는 일찍부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많았다. 아라비아인들이 섬기던 황금으로 만든 비너스 금상을 녹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쓴 노만 아부 가마스(Noman Abu Kamas)라는 신도가 있었고 그를 모방한 신자들이 많았다. 페르시아에서 박해를 받아 이곳으로 피난온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네스토리안들도 많았는데 기존의 그리스도인들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이 지방에 유대인 정착민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도 했다.
523년에 유대인들이 우세한 에미레테인들의 유대계 왕 마스루크(Masrug)가 그리스도인 왕의 사후 권력을 잡았는데 그가 유대계 모친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고 요청하자 마스루크는 정치적인 감정을 품고 더 심하게 박해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이 바다 건너 아비시니아(오늘의 에티오피아)의 왕에게 도움을 청하여 아비시니아 왕 칼렙(Kaleb)이 원군을 보내 마스루크를 패배시켰다. 마스루크는 산으로 피했다가 아비시니아 군대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다시 돌아와서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비시니아군 중에 남아있던 군인 300여명을 교회당에 가두고 불을 질러 다 죽였다.
마스루크 왕은 예멘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불응한 사람들의 가옥을 불사르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더러 십자가에 침을 뱉게 하고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고 다만 남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 죽었다고 고백하도록 강요하고 불응하는 사람은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45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불태워 죽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살던 샵와(Shabwa)라는 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는 더 가혹한 박해를 계속해서 2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칼로 죽이거나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이때 도피한 그리스도인들이 페르시아의 이슬람 통치자 칼리프에게 가서 이 박해를 통지하였다. 이곳의 이러한 박해와 순교의 이야기가 모베르그(Moberg)가 쓴 「에메레테인의 책」(The Book of the Himyarites)에 많이 나온다.
예멘의 한 신자 우마야(Umayya)가 아비시니아 왕에게 도움을 청하여 원군이 와서 마스루크의 군대와 접전하여 마침내 마스루크는 패하고 홍해에서 익사하였다. 아비시니아의 왕 칼렙은 예멘의 유대인들을 괴롭혔을 때 그리스도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십자가를 보여주어서 도움을 받았다.
칼렙 왕은 에미레테인의 왕족 한 사람을 뽑아서 왕으로 세우고 그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후 파괴된 교회당을 재건하고 교세를 회복시켰다. 새 왕이 된 아브라하 아쉬람(Abraha Ashram)은 그리스도인 통치자가 되어 나라를 부흥시켜 갔다. 아쉬람 왕이 멕카(Mecca)에 그리스도교 성전을 하나 지어서 아라비아인들이 그 성전을 참배하도록 했을 때 그 성전 준공식의 전야에 멕카에 있던 코레쉬족이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567년에 멕카로 진군했으나 패배하였다. 후일 멕카를 정복하고 이슬람의 본산으로 만든 모하메드가 3년 후 멕카에서 태어났다. 아브라하 왕의 멕카 공격의 역사는 이슬람의 성경 코란 제105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멘과 에미레테에서 아비시니아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하메드가 630년에 멕카를 점령하고 아라비아를 장악한 후에는 아라비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8. 에티오피아 교회
누가복음 8장에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내시는 기뻐하며 길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상 그 내시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므로 에티오피아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의 역사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여왕의 역사에 대한 기록도 얻어볼 수 없다.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야기는 또 하나의 신기한 이야기이다. 이태리 태생인 루피누스(Rufinus)가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있는 감람산에서 20년 동안 수도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닦은 학자였는데 그가 쓴 「교회사」(A Church History)라는 책에 에티오피아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저서 「제일원리」를 비롯하여 희랍어 문서를 라틴어로 번역을 많이 했다.
팔레스틴의 두로(Tyre)에 살던 메로피우스(Meropius)라는 한 학자가 두 제자 소년을 데리고 인도여행을 떠났다가 홍해변의 에티오피아 해안의 아둘리스(Adulis)에 기항하여 식량과 식수를 구하려고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들을 로마제국의 첩자로 알고 체포하여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죽였다. 그 가운데 소년 둘은 살아남았는데 나이 많은 소년은 프루멘티우스(Frumentius), 나이 적은 소년은 에데시우스(Edesius)였다. 이 두 소년은 교육을 많이 받은 것이 인정되어 그 나라 왕의 신임을 받아 신하가 되었다. 왕이 죽은 후 왕후가 그 소년을 왕후의 통치의 협력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온 상인들 중 그리스도인을 찾아내어 그들을 도와주고 교회를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고 교세가 커갔다.
에데시우스는 고향 두로로 돌아와서 에티오피아 교회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교회사 책을 쓴 루피누스가 에데시우스로부터 직접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프루멘티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아다나시우스가 감독으로 취임하던 328년 직후에 그를 만나서 에티오피아 교회 이야기를 말하였고, 아다나시우스로부터 에디오피아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 받았다.
325년에서 350년 사이에 에디오피아 왕이었던 에잔나(Ezana) 왕이 그리스도인이었는데 프루멘티우스가 에티오피아 정부의 집정관으로 있을 때 아직 어린 왕자였다. 에잔나 왕이 만든 화폐에는 십자가가 넷 새겨져 있었다. 그 당시의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큠(Axum)에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에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힘이 세신 하늘의 주재자에게 감사한다’고 새겨져 있었다. 아무튼 에티오피아는 350년 전에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고 그때 수도 아큠은 오늘의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이매, 지금도 300년이 넘는 성 마리아 교회당이 거기에 있는데 프루멘티우스가 처음에 교회당을 세웠던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