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31)

중세교회편 연재 시작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Ⅱ부. 중세교회편

제1장 신성로마제국의 등장

1. 암흑시대의 시작

기원후 410년 영원불멸의 도시로 자랑해 온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시가 북방 고스족 알아릭의 침략으로 함락된 후 서방 로마제국은 계속되는 야만족들의 남침으로 인한 파괴와 비참으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과 문화적 퇴보가 날로 심각해가서 소위 초기 중세의 약 500년간의 암흑시대를 맞았다.

이태리에서 알아릭의 군대는 철수하여 가울(Gaul)로 돌아갔으나 476년에 오스트로고스족이 다시 이태리를 침범해 들어와서 라벤나에 있던 서방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패배시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후로 이태리는 다시 20년 이상 야만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야만족의 아리우스 이단종파의 종교세력이 로마가톨릭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으나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북방의 다른 야만족들이 로마제국의 여러 영토에 침략해 들어와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반달족(Vandal)이 429년에 지중해 연안을 침략해 들어와서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아리우스 종파를 믿는 사람들이어서 이 지방에 뿌리박고 있던 로마가톨릭교회를 탄압하여 5,000명의 신도들을 남쪽 사막지대로 압송하였고 교회 감독들을 배에 실어서 코르시카(Corsica)로 보내어 벌목작업의 노동자로 만들었다.

야만족 비시고스(Visigoth)는 스페인을 점령하였고 버간디안(Burgandian)은 가울 남방을 점령하였고 앵글족(Angle)족과 색슨족(Saxon)은 영국을 침략하였고 프랑크족(Frank)은 가울 북방을 점령하였다. 이 야만족의 족장들 중에는 로마제국 정부로부터 지방 통치자의 이름을 얻어서 다스린 사람도 있었다.

이 암흑시기에 로마에서는 황제라고 자칭한 사람들이 여럿 생겼으나 야만족 점령자들이 그들을 다 허수아비 황제로 보고 물리쳤다. 그리고 침략군의 군대가 서방 로마제국의 정규군이 되었고 야만족 오도바카(Odovacar)가 황제로 행세하였다. 451년에는 흉노족이 이태리를 침략했으나 당시 교황 리오(Leo) 1세의 충고로 퇴각해 갔다.

2.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시기(527~565)는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통치사에서 가장 찬란한 때였다. 정치적으로는 야만족의 통치 아래 있었던 영토들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오스트로고스족의 지배에 있던 이태리를 도로 찾아서 이태리인에게 돌려줌으로써 큰 환영을 받았고, 반달족의 지배에 있던 북아프리카를 도로 찾아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또 새로운 한 야만족 롬바드족(Lombard)이 이태리를 점령하여 들어왔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와의 싸움이 벌어졌으나 과거보다는 평화로웠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야만족들과의 싸움은 일종의 종교적 십자군운동과도 같았다. 그는 정통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아리우스 이단종파를 물리치고 정통 가톨릭교회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태리에서는 물론 아프리카의 교회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100년 동안 즉 이슬람의 침략이 있기 전 가톨릭교회의 회복과 더불어 선교 활동을 가능케 하여 야만족의 개종을 준비시켜주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전을 편찬하여 로마제국의 초기 법률제도를 정리 및 재편하였다. 그동안 많은 법들이 혼돈되어 있던 것을 조화 있게 정리한 것인데 이것은 교회가 교회법을 정리하여 편집하는 작업의 표본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전에는 교회 성직자의 조직과 그들의 도덕률과 수도원의 설치와 관리, 또 교회의 재신과 성직자를 치리하는 문제들을 취급하는 법률도 많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27년에 이단자들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그는 이단자들은 교회의 집회를 열 수 없고 로마시민권자의 특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족하게 여기라’고 말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여러 지방에 교회와 수도원을 많이 세웠지만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었다. 원형과 정방형과 장방형으로 된 본당의 지붕은 여러 개의 둥근 원옥이 연결돼있고, 작은 집들의 내부에는 예배실들이 들어있으며, 본당의 큰 제단은 황금보석으로 만들었고, 신부들의 좌석은 은으로 만들었고, 강대는 값진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자리는 대리석과 상아로 만들었고, 건물 곳곳에는 무늬 있는 대리석과 여러가지 모형과 형상을 새긴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보도와 담들의 아름다운 색깔의 돌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영국과 유럽 각지에서 가져온 희귀한 돌들이었다. 그는 537년 성탄절에 성전을 완공시켰는데 이 성당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들고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교회를 완전히 자기 손 안에 넣어 다스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이단교파들을 탄압하려고 단성론자들과 도나투스파와 몬타누스파와 유대인들과 마니교도들이 다 로마가톨릭교회와 화해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단성론자들의 세력이 만만찮아서 군사력을 동원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아내 데오도라(Theodora)가 단성론자들을 옹호하고 편들었으므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결국 아내의 청을 들게 되었다.

데오도라의 힘으로 단성론자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어 단성론의 부흥을 일으켰으나, 로마 교회의 감독(교황) 아가페투스(Agapetus)가 콘스탄티노플에 직접 가서 콘스탄티노플의 단성론자 감독을 폐위시켰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7년 로마의 새 교황이 선택되었을 때 그를 폐위시키고 단성론자를 교황에 앉혔다. 안디옥과 칼타고와 그밖의 대도시에도 단성론자 감돌들이 임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스티니아누스가 교회의 실권자가 되었고 로마 교황도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3. 교황 그레고리 1세

그리스도교의 전성기로 볼 수 있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토대가 된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Gregory Ⅰ, 재위 590~604)는 476년 이후로 황제가 업게 된 서방 로마제국의 황제처럼 정치와 사회와 교회의 유일한 유능한 지도자로서 존경과 영광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감독이라기보다는 법왕 또는 교황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교황을 뜻하는 ‘Pope’의 원어는 ‘Papa’ 즉 아버지라는 말인데, 초대교회 시대에는 모든 감독을 Pope이라고 불렀지만 로마 감독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로마의 감독에게만 Pope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그레고리는 이태리를 점령하고 통치하게 된 게르만족보다 훨씬 더 사나웠던 새로운 침략자 롬바드족과 정치적 협상으로 평화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여 그가 서방의 실질적인 정치실권자가 되어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황제와 정치적 상대자가 되었고, 서방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동방의 황제가 로마 교회에 간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레고리가 540년 로마에서 태어났을 때 로마시는 고스족의 침략으로 걸인의 도시가 되어있었고 다만 수 명의 로마 관리들이 한 작은 산 위에 시정사무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의 부모는 경건하고 유족한 원로원급의 부유층이었다. 그는 좋은 학교에 다니면서 교육을 잘 받고 학문을 닦았다.

그레고리가 로마시의 하급 관리에 취직해 있었을 때인 568년 롬바드족이 쳐들어왔다. 572년에는 로마시의 최고 관리가 되었는데 이는 원로원 회원의 지위만큼 높은 것이었다. 그는 로마시의 100마일 안의 민간행정의 최고 관리여서 시민의 양식 공급과 수도와 하수도를 돌보았고, 로마의 관리들을 통솔하고 시의 재정을 관리하는 등의 중책을 담당했다. 그레고리의 이러한 행정 경험이 후에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교회 행정에도 반영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레고리는 라벤나의 지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승진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574년에 시실리섬에 있는 자기 세습재산을 털어서 수도원 여섯을 지었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부친의 집을 수도원으로 만들어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 생활을 하기로 하였다.

로마의 감독 펠라기우스(Pelagius)가 578년에 그레고리를 집사라는 성직에 임명하여 안수하고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사절로 파송하여 로마에 군대를 보내줄 것과 돈과 그밖의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레고스는 황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레고리는 시실리섬의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수도원장으로 여생을 보내려 하고 있었는데 590년 펠라기우스가 사망하였을 때 로마 교구가 그를 새 감독으로 추대하여 로마의 감독이 되었다.

그레고리는 교황이 된 후 무엇보다 로마 교황청의 교권을 증진시키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다. 이를 위해 롬바드족장과 정치적으로 협상하여 로마시민과 서방 로마제국의 평화와 질서를 확보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는 오랫동안 로마 시정을 맡고 고관으로서도 활동한 경험을 살려 외교적 수완을 잘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롬바드족장과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잘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교회의 발언권이 힘을 얻어서 로마시정에 잘 반영되어서 교회가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고, 로마 교회에 속한 재산을 잘 관리하여 교회 재산이 불어나 교회와 수도원과 성직자들에게 혜택이 많이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는 로마 교회가 다른 지방의 교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 곧 로마 교회의 수위성(首位性)을 공고히 하였다.

로마 교회는 1,300~1,800 평방마일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토지는 죽어가던 귀족이나 부자가 교회에 기증하여 불어난 토지였다. 이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주어서 소작료를 받아 로마 교회의 유지비를 충당해갔는데 그동안 야만족의 침략과 사회 혼과 관리 부실로 소작료 수입이 줄어서 로마 교회의 재정 형편이 어려웠는데 그레고리가 관리를 철저하게 하여 소작료 수입을 크게 불렸다. 그리하여 그는 넉넉한 재원을 가지고 성직자들의 봉급을 올려주고 1년에 네 번 보너스까지 지불하여주었고 수도원과 여인숙과 병원과 자선단체에 보조금을 넉넉히 주어서 그 모든 기관들의 운영이 개선되었다. 그리고 그는 로마시민들에게도 양곡을 배급하여줌으로 그들의 생활을 도왔다.

그레고리는 로마교구의 교권과 영향력을 높여서 로마교구가 세계 어떤 교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시책을 성취했으며, 로마 교회의 감독은 그리스도의 수제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베드로의 뒤를 이은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로마교구의 감독은 세계교회의 지배자이며 모든 이단과 불의와 악을 시정하고 벌하는 세계교회 최고의 판정이매, 모든 사제와 감독들은 로마교구의 교황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세계교회의 전체 회의는 로마교회의 감독의 허락으로 소집되어야 하며, 또 그 회의의 결정도 로마 감독의 최종적인 승인 없이는 효력을 내지 못하며,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도 로마 교회 감독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교회보다 교회역사적으로 후생(後生)이어서 세계교회의 수위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약하였고 로마가 로마제국의 수도라는 정치적 이유만으로써는 세계교회의 수위성을 주장할 수 없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그리스도교 자유화 정책 이후로 로마 교회의 역할이 중요시 되었고, 교계의 많은 신학논쟁에서 로마 교회가 논쟁의 중재자 역할을 해내면서 교회의 권위를 높였다. 로마 교회는 야만족들의 침략으로 인한 박해와 수난을 잘 견뎌내면서 교회의 권위와 질서 특히 감독의 사도적 전승과 사도적 권위를 일찍부터 확립시켰고 이러한 교회제도의 발전을 이룩한 교회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었는데, 그레고리 1세의 치적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력이 크게 증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실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발전의 토대를 놓은 사람이었다.

그레고리 1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의 확장의 한 길을 선교를 통한 로마 교구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고 먼 데 떨어져 있는 영국에는 아직 선교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어거스틴이라는 수도사를 단장으로 한 40명의 수도사선교단을 만들어서 596년에 파송하였다. 로마에서 영국까지는 험한 알프스산도 넘어야 하고 바다도 건너야만 했다. 어거스틴은 중동에서 여행을 단념하고 돌아왔으나 그레고리는 그들을 다시 보내서 이듬해인 4월에 영국에 상륙하게 했다. 이 때 십자가를 들고 행렬을 지은 사람들이 어거스틴 일행을 환영했는데, 그들은 칸타베리의 성 마틴교회 사제들이었다.

어거스틴은 성 마틴교회를 거점으로 삼고 선교를 전개하여 영국의 왕 에델버트(Ethelbert)를 회심시켜서 597년에 세례를 주었다. 어거스틴은 교황으로부터 칸타베리 교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어거스틴은 자기와 같이 온 수도사들을 다른 지역 교구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영국 기성교회의 예배와 성례전 등의 전통을 존중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고, 영국 교회를 로마대교구에 속하게 하였다. 성 콜럼바나가 개척하여 세운 켈틱 교회와 앵글로색슨족에 전파된 교회들이 로마의 대교구에 속하게 되어 673년에 영국 전국의 교회회의에서 다 로마 교회에 석하여 로마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갖도록 결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로마 교회의 교권과 지평이 증대하고 확장하였다.

그레고리는 야만족들의 침략으로 고난을 겪으면서 언제나 종말이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성 어거스틴의 저서와 교부들의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그는 신학을 발전시키지는 않고 예배학과 목회학의 좋은 모범과 교훈을 남겼다. 교회음악으로는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의 기원을 그에게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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