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32)

야만족 선교와 개종, 신성로마제국, 샬망의 문화부흥운동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4. 야만족 선교와 개종

로마가톨릭교회가 교세를 확장하는 한 방법은 선교운동이었다. 그레고리 1세의 영국 선교로 영국 전국 교회가 로마대교구에 속하였다. 그리고 역대 교황들은 북유럽의 야만족 중에 아직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민족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울필라스의 선교로 인하여 아리우스 이단종파를 믿는 사람들이 고스족 중에 있었고, 남침하여 정착한 야만족 중에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야만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번영과 평화와 함께 개화를 촉진시키는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윌프리드

영국의 요크(Yokr) 교구의 감독 윌프리드(Wilfrid, 634~709)는 영국 교회와 로마교황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교구의 일을 로마교황청과 의논하기 위하여 로마로 여행을 떠났을 때 배가 풍랑에 밀려서 홀랜드의 해변의 우트레트(Utrecht)에 상륙하여 한겨울을 지내면서 그곳의 프랑크족 공작인 페핀(Pepin)을 만나 복음을 전하여 그와 그의 신하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며 많은 신자를 얻고 교회를 세우고 교구를 설치하였다. 로마 교황은 윌프리드를 695년에 그 교구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교회와 수도원을 많이 세웠다.

윌리브로드

윌리브로드(Willibrord, 658~739)는 영국 켈틱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는데 33세 때 우트레트에 상륙하여 프랑크족장 페핀(Pepin)을 만나 프랑크왕국 북방에서 선교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그는 교회와 수도원을 많이 지었다. 한때 그는 프리시안들의 공격을 받아 일행이 모두 피살된 때도 있었다. 그는 소년들을 교육해서 선교사로 만들어 선교사로 파송했다. 페핀은 그를 많이 도와서 수도원과 교회를 짓게 하였다. 교황은 695년에 윌리브로드를 우트레트 교회의 교구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보니패이스

독일 민족의 사도로 알려진 보니패이스(Boniface, 680~754)는 영국의 수도사였는데 우트레트에 와서 3년 동안 윌리브로드와 함께 선교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학문을 닦고 고전과 성서를 많이 연구하였다. 많은 개종자를 얻어 교회와 수도원을 많이 세웠고 교황은 프랑크 왕에게 부탁하여 보니패이스의 선교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도록 요청했다.

보니패이스는 10년간 전도하였는데 주로 수도원을 많이 세워서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프랑크 교회의 법규와 제도를 로마가톨릭교회의 법규와 제도에 맞게 개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동역 선교사 스턴(Sturn)은 로마에서 베네딕트수도원의 제도를 배워 와서 풀다(Fulda)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이 독일에서 가장 큰 수도원이 되게 하고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쳐서 독일 교회의 사제들을 배출하였다. 이 때는 사제를 교육시킬 기관이 없었다. 스턴은 영국의 수녀 리바(Liba)를 초청해서 독일의 여수도원을 창설하였다.

5.  프랑크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정교 유대 – 신성로마제국

프랑크족(Frank)은 북부 유럽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살고 있던 족속인데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수도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이미 그곳에 교회와 수도원이 많이 섰고 교황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은 부단한 외침에 시달려왔는데 롬바드족이 이태리를 점령하여 지배하면서 교황청과 정치적 충돌을 빚었으며 교회가 늘 억압받고 있었다. 이태리와 로마가톨릭교회를 보호해줄 정치권력과 군대가 서방 로마제국에 없은 지 오래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왕 페핀의 아들 샬망(Charlemagne)이 강력한 군대력을 가지고 슬라브족을 정복하고 스페인까지 정복해갔다. 그는 로마 교황 리오(Leo) 3세에게 이태리를 야만족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줄 것을 약속한 바가 있었다. 733년에 롬바드족이 다시 이태리를 침략하여 교황청의 영지까지 위협하였다. 이때 교황 하드리안(Hadrian)이 샬망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샬망은 알프스산을 넘어서 이태리에 와서 롬바드족을 축출하고 교황청 영지를 교황에게 돌려주고 지방의 영토는 로마인 지사들의 지배로 환원시켜주었다.

샬망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자기 부친이 하던 말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면 우리는 성자들의 수준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샬망은 교황청을 돌봐주는 후견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이 있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이 일곱이나 있으며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줄 짓고 거룩한 예배와 축체가 때때로 열리는 로마시를 거룩한 도성으로 여겼다. 그는 그의 스승, 영국에서 온 알퀸(Alcuin)으로부터 어거스틴의 유명한 저서 「하나님의 도성」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영원한 천상의 도성을 생각하고 지상의 로마시의 평화를 위하여 교황을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고, 자기 부친이 희구한 평화를 향유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황이 자기와 같은 교황청 호위자를 필요로 할 것으로 생각했고, 자기 왕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는 교황과 같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샬망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AD 800년 성탄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 미사를 드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후 일어서려고 할 때 교황 리오 3세가 그에게 왕관을 머리에 얹어주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신도들이 그가 로마에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로마인의 황제라고 외쳤다. 이 대관식이 샬망으로 하여금 로마인의 황제가 되게 하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교황의 집행으로 된 이 대관식으로 말미암아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였다고 말한다. 즉 로마제국은 단순한 세속권력이 형성한 제국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의 신성한 권위로 생긴 제국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 제국과 교회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유착된 신정체제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제국과 교회가 서로를 필요로 하였다. 제국은 교회의 영적 및 도덕적 도움을, 교회는 국가의 정치적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이때의 대관식이 없었더라도 샬망이 이태리를 보호한 행위는 그가 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서방에는 통치세력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동방의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서방의 야만족들을 물리칠 힘이 없었고 원거리의 출군도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하나의 로마제국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다만 양편이 다 그리스도교 제국이라는 동일성만 띈 채 교회도 동서로 나뉘어서 같은 교단이나 교구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프랑크왕국과 교황청과의 관계일 뿐 영국과 기타 유럽 국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샬망의 대관식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 유럽의 로마가톨릭 국가의 왕의 취임식 때는 로마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는 관례가 생겼다. 이 관례를 처음으로 깨뜨린 왕은 종교개혁 시대의 영국의 헨리 8세였고 이 관례를 최후적으로 깨뜨린 왕은 1804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왕관을 머리에 썼다.

6. 샬망의 문화부흥운동

샬망은 부친 페핀이 768년에 사망한 후 왕위를 이어서 814년에 사망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나라를 혼자서 통치하였는데 그는 용감한 전사이며 정치적 능력을 가졌었다. 그는 정치적 및 종교적 혁신을 열망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문화 일반에 걸친 혁신운동의 결과로 약 200년간의 암흑시대가 지나가고 중세문화의 새로운 발달이 진작되었다.

샬망은 전쟁터에서는 잔인하였고 결혼생활은 난잡하였고 그리고 독재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깊은 신앙심이 있어서 자기는 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따라 통치한다고 자신하였다. 그는 특별히 성 어거스틴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을 애독하여 정치적 및 사회적 이상을 가지고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도성이 되게 하려는 뜻을 품었다.

먼저 그는 로마 교회의 교회법을 도입하여 프랑크 제국 안의 교회를 혁신하고자 하였다. 그가 점령하여 얻은 영토 안에 수도원을 많이 세우고 새로운 교구를 만들고 감독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자기 영토 안의 재래의 교회에서 사제회의가 신도들의 동의를 얻어서 감독을 선출할 때 샬망 자신의 허락을 받게 하였다. 감독 선출의 전통이 해이해져 있던 것을 바로 잡으려 한 것인데 앞으로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이 감독이 되게 하고 그리고 수도원의 수입을 감독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학적 교리를 의논하는 교회의 중요한 노회는 자기가 직접 사회하고 자기의 의견을 발언하였다.

샬망은 교회 교구 행정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때 교구가 시골에 여럿 있었고 사제회가 교구를 운영하였고 지방 행정관청에서 사제회의 운영비를 위하여 토지를 주었다. 그런데 그 토지를 기증한 사람이 교회 감독을 임명하는 권리를 갖게 되어 목회자의 권리가 약화되었다. 때로 그 기증자가 감독을 임명하는 권리를 돈 받고 다른 사람에게 이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 감독은 설교와 성례전의 집행 등 목회일만 할 수 있을 뿐, 교회의 치리와 행정에 대한 권리가 없게 되었었다. 샬망은 이것을 개혁하여 감독이 교구 안 모든 사제를 임명하고 훈련시키며 징계하는 권리를 갖게 하였고, 감독이 정치적인 문제와 더불어 시민의 민생 문제에도 간여하게 하였다.

샬망은 교회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기존의 주교(archbishop)의 수를 늘리고 감독을 감시하고 지도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자신의 칙령이 교회와 민간 행정기관과 군에서 권위 있게 시행되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감사원을 파송하였다.

샬망은 부친 페핀이 시행했던 십일조 제도를 재확인하여 시행시켰다. 페핀은 십일조를 세금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과수원의 수확과 농작물과 가축과 포도주의 생산과 가축사료의 생산도 십일조를 바치게 하고 불응자는 출교처분 하였다. 샬망은 십일조의 헌금을 가지고 교회 성직자들의 생활비를 공급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였다.

샬망은 교회당과 예배 처소의 수리와 재건을 적극 장려하였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독려하여 부르게 하고 로마 교회의 예배의식을 모범으로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사제들이 신도들에게 신조와 십계명을 설교하여 가르치게 하고 모든 신도들이 주기도와 니케아신조를 알도록 하고 신자들이 신성한 결혼생활을 하도록 교회의 법을 만들게 하였다.

샬망은 교육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였다. 먼저 사제들의 교육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동안 수도원의 교육이 해이해져 학문의 발달이 저조하게 되었던 것을 개혁시켜 나갔다. 신부와 수도사가 도시에 학교를 세우게 하고 감독관에는 감독학교를 세우게 하였다. 그는 종교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기초가 되는 로마의 고전문헌들을 가르쳐 배우게 하였다. 그 문헌들이 다 그리스도교 학자의 저술이 아니지만 일반철학과 논리학과 수학과 윤리학과 문학 등등의 교양학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고전문헌들의 책의 사본이 많이 나온 것은 샬망의 문화운동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었으므로 필기로 책을 베껴 내었다.

샬망의 교육혁신 정책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아일랜드, 스페인, 이태리, 가울, 그리고 특별히 영국에서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불러와서 각급 학교와 수도원에서 가르치게 한 것이었다. 당대 유명한 학자들 중에는 영국의 베데(Bede), 리아드(Reared), 알퀸(Alcuin) 등이 있었다. 샬망은 수도원의 학문을 부흥시키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금욕생활을 장려하기 위해서도 수도원을 많이 세웠다.

샬망은 부친 페핀이 교황청을 돕고 교황을 존경한 것을 본받아 자기 부친이 베드로의 교구 땅을 교황청에 증여한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터(Sylvester) 1세에게 전국토를 기증하였다는 중세기 문서가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닌 문서이다.

이태리가 야만족의 침략을 받고 있었을 때 샬망이 몇 도시를 빼앗아 로마 교황에게 주어서 754년부터 그 지역을 소유하여 다스리게 된 로마 교황청은 1870년에 와서 바티칸과 라테란 두 지역만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이 때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시대에 이태리 왕국이 수립되었을 때였고 로마가톨릭교회의 교세와 교황청의 권위는 위축된 때였기 때문이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