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33)

동양교회와 이슬람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2장 동양교회와 이슬람

모하멛

모하멛(Mohammed)은 570년에 아라비아의 한 족속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632년에 죽은 이슬람교(Islam)의 창시자이다. 이슬람이란 말은 절대복종이란 뜻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멕카(Mecca)의 대상(隊商)들에게 고용되어 시리아와 예멘 사이를 왕래하면서 그리스도인 은사들과 수도사들을 더러 만났고, 유대인들도 만나서 예수의 이야기와 함께 모세의 이야기도 들었다. 25세 때 5세 연상의 한 과부와 결혼하여 2남 4녀를 얻었으나 아들 둘은 일찍 죽었다.

모하멛이 40세 때 멕카 근처의 산정에서 독거하면서 금식하고 철야기도하던 중에 처음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잡신과 우상을 섬기는 멕카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다는 계시였다. 멕카인들은 나무와 돌과 온갖 신상을 섬기며, 인신희생의 축제를 벌였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다. 모하멛은 이 멕카를 정복하고 모든 잡신을 쫓아내려는 겨심을 했다.

이 시기 아라비아에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모하멛의 아내의 종과 친척과 이웃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모하멛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히라(Hira)산으로 가서 알라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알라신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야훼 하나님이었다. 그가 거기서 가브리엘 천사를 꿈에서 만나고 알라의 계시를 받고 그것을 먼저 자기 가족들에게 믿게 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여 믿게 하였다.

모하멛은 멕카인의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공격하였는데 멕카인의 반대를 받아 멕카를 탈출해서 신도 100여 명과 함께 메디나(Medina)로 갔다. 모하멛은 여기 살고 있던 모든 족속이 단일 신앙공동체가 되게 만들고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위군대를 키웠다. 그리하여 630년 초에 멕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멕카가 이슬람의 중심 성지가 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다고 설교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이슬람의 신앙 근본원리로 삼고 그리스도교가 마리아의 아들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메시아로 믿는 것을 부정하였다.

이슬람의 성경 코란(Koran)은 모하멛이 받은 계시를 비롯하여 그가 말한 것을 기록한 책인데 책으로서는 체계도 형식도 없이 편찬된 것이고 반면에 강력한 살아있는 음성이 들리는 책이다. 즉 구약이 신탁을 받아 쓴 것처럼, 그리고 예수의 간단한 교훈의 복음서처럼 보이는 책이다.

이슬람의 주요 교리는 유일신론이다. 알라의 절대주권과 전능과 함께 자비를 강조하며 예정과 심판을 믿으며 모하멛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복종을 가르친다.

이슬람의 특징은 엄격한 신앙생활의 실천이다. 매 금요일 정오의 정기 전체예배, 신도들의 매일의 기도의 규정, 금주와 도박 금지, 유아살해 금지, 딸의 수를 줄이기 위해 딸을 생매장해서 죽이는 일을 금지, 범행한 남녀를 같이 처벌, 남자가 일시에 가질 아내의 수의 제한, 신도가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을 공적으로 치하할 일 등등인데 코란이 명령하는 도덕의 수준은 신명기와 레위기 19장의 교훈의 기준에 비교해서 꽤 높은 것이다.

마호멛은 먼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유일한 종교로 만들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지만 이슬람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은 학살하여 그리스도교가 결국은 멸절하게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만 존재하게 만든 후에는 북상하여 중동의 여러 나라에 무력으로 침략해 들어가서 다른 종교와 대결하게 되었다. 모하멛의 후계자를 칼리프(kaliph)라고 부르고 그가 이슬람 국가의 교권과 정권을 다 차지하여 신정체제의 나라를 만들었다.

이슬람을 믿는 신도들을 모슬렘 또는 무슬림이라고 부른다. 모슬렘은 635년에는 다메섹을 점령하고 636년에는 시리아를,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그리고 642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다. 652년에는 페르샤제국을 침략하여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697년에는 서부 아프리카의 칼타고를 점령하여 로마의 영토를 빼앗았다. 711년에는 스페인까지 점령하고 프랑스로 진군하려 했고 71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비잔틴제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슬렘은 과거의 로마제국의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중동의 교회와 모슬렘의 관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과의 관계는 때와 장소를 따라 늘 가변적이었고, 그리스도교회는 모슬렘의 무력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모하멛의 운동 초기에는 모슬렘이 그리스도인에게 우호적이었다. 첫째 모하멛이 예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모하멛을 예언자로 간주하여서 모하멛은 그리스도인들을 강제로 모슬렘으로 만들 생각이 없이 정치적으로 복종케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다음으로 모하멛의 신도들이 멕카에서 박해를 받고 메디나로 피난해 왔을 때 메디나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것을 알고 모하멛이 말하기를 모슬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이 말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모하멛은 구약의 오경(五經)을 믿으면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성서의 사람들’(The People of the Book)이라고 하면서 다른 종교와 구별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후대하였다. 그러나 모하멛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로만 인정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자칭하였다.

예루살렘이 모슬렘의 칼리프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그곳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은 칼리프에게 복종해야 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적인 그의 통치에 순응했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에 적당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Umar)가 예루살렘에 이슬람 사원을 세우고자 하여 부지를 물색했을 때 예루살렘 교구의 대주교 소프로니우스(Sophronius)가 오물폐기처가 되어 있던 옛 예루살렘 성전 터를 소개하여주어서 그 자리에 이슬람 성전 모스크(mosque)를 세웠다. 그 터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옛날 모하멛이 꿈에 천사에 이끌려서 큰 바위가 있는 데 왔었다는 이야기를 그가 상기하고 그 큰 바위를 가운데 두고 사원을 지었다.

칼리프 우마르는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만 존재하게 하고 다른 종교는 다 추방하여 페르샤와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만들고, 점령지역에 사는 모슬렘들이 현지의 주민들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여 아라비아인의 순수한 모슬렘 혈통을 이어가게 하였다. 우마르는 점령지에 아라비아인 군대를 주둔시켰고 아라비아의 문무(文武)를 겸한 문화가 발달하게 하였고 현지인들이 납부하는 인두세와 지세를 받아 군비에 충당하였다. 그리고 현지의 농민들이 토지를 팔거나 버리고 이주할 자유를 주지 않았다. 누구든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인두세는 면제되었다.

이슬람의 확장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제2대 칼리프 우마르인데 그는 한 사원에서 페르샤 출신의 노예에게 살해되었고, 제3대 칼리프 오스만은 656년 재위 2년 만에 물러났고, 모하멛의 사위 알리(Ahli)는 칼리프로서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이처럼 칼리프들이 살해되는 것은 이슬람 안에 3, 4개의 파벌이 있어서 권력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호멛을 최후의 예언자로 믿는다면 아무도 이슬람의 예언자로 자처할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예언자라고 자칭한 칼리프들이 있어서 교권과 정권을 다 장악하여 독재하였다.

카리프 알리는 우마이야 가문의 출신 무아위야(Muawiyah)에게 패배를 당하여 무아위야 왕조 시대가 들어섰다. 무아위야는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칼리프의 세습제도를 확립했으며 바그다드를 이슬람 왕국의 영구적인 수도로 정하였고 칼리프는 모하멛의 후계자로서 교주가 되어 신도들 앞에서 설교도 하였고 정권도 잡았다.

중동 여러 지역에서 선교하여 동양교회를 성장시킨 네스토리우스파의 교인들은 일찍부터 아시아인들의 생활의 큰 변화를 일으켰다. 파르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내 둘을 두지 않게 되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폐지하였고, 박트리아의 여자들은 외래의 나그네와 정을 통하지 않게 되었고, 페르샤인 남자들은 딸을 아내로 삼지 않게 되었고, 에뎃사에서는 간음한 딸이나 아내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벌하지 않았고, 하라에서는 도둑놈을 돌로 쳐 죽이지 않게 되었다.

중동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고 순교정신이 강렬하여 박해를 감수하는 신앙의 증인들이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지식과 기술과 문화가 앞서 있어서 어디서나 문화와 경제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것을 모슬렘 정권이 인정하여 동양교회의 본부를 바그다드로 옮기도록 권하여 736년에 바그다드에 동양교회의 총대주교가 주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그다드에서 동양교회는 12세기경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하면서 문화적으로 공헌하였다.

페르샤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뒤진 유대인들은 주로 염색업과 이발업과 피혁업과 수선업과 같은 비천한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출세율도 저조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경영하는 직장에서 잡역에 종사하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학교, 병원, 수도원 등을 세워서 발전시켜서 철학, 천문학, 예술, 의학, 직물기술, 염색기술 등을 발전시켰고 국가의 관리가 되어 회계와 경리 사무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왕과 귀족들의 시의(侍醫)와 은행가와 향료업자가 되어 모슬렘 상류층과 상종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이외의 타종교 신도들의 거주단지 멜레트(melet)에서 거주하였다. 모슬렘 정권은 이 멜레트 사회의 준수규칙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생활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들인데 동양교회 총대주교 요한 6세 때의 문헌에서 밝혀진 것은 아래와 같다.

  강제적인 규정

  1) 이슬람 경전 코란을 비난하지 말라.
  2) 예언자 모하멛을 훼방하지 말라.
  3) 이슬람을 멸시하는 언동을 하지 말라.
  4) 이슬람교도를 유괴하거나 여교도와 결혼하지 말라.
  5) 이슬람교도의 신체를 해치거나 재산에 손해를 끼치지 말라.
  6) 이슬람교도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지 말라.
  7) 이슬람 국가의 적국을 원조하거나 적국의 간첩행위를 하지 말라.

이 강제규정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이슬람교도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선교하여도 무관하며, 모슬렘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엄벌을 받게 된다.

  권고적인 규정

  1)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 사원보다 높고 화려한 교회당을 짓지 말 것.
  2) 고성으로 성서를 읽거나 찬송을 부르지 말며, 종이나 목판을 쳐서 모슬렘의 귀에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할 것.
  3)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부르지 말 것.
  4) 그리스도인들은 공공연하게 음주하거나 십자가를 사용하지 말 것.
  5) 그리스도인들은 밀장으로 장례를 치르되 울음소리를 내지 말 것.
  6) 그리스도인들이 단번에 표가 나도록 몸에 표장을 붙이거나 허리에 검은 띠를 띨 것.
  7) 그리스도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 것.

이상의 규정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정도의 제약 아래서는 선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기득권에 속한 여러가지를 유지하고파 하였다. 실제로 모슬렘 정권은 조로아스터교나 힌두교나 세례 요한의 교회나 어떤 다른 종교보다 그리스도교를 우대하였기 때문에 무모한 충돌을 피하려 하였다. 모슬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성경 코란을 읽어보면 그리스도교인을 박해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이슬람이 그리스도교를 관대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두 종교 사이에 충돌이 없지 않았다. 한때 바그다드에서 야곱파 그리스도인(단성론파)이 죽인 사람의 시체가 발견되어 모슬렘들이 그가 속한 야곱파 교회당을 불태우고 많은 교인들을 죽였다. 이때 모슬렘 권위자들이 그것은 법률적으로 불법행위라고 생각하고 모슬렘들을 처벌하였다. 1138년 바그다드의 칼리프 묵카피(Mukafi) 2세가 그리스도인 보호헌장을 발표하여 동양교회 대주교 에베디예수(Ebedyeshu)에게 보낸 것이 있다. 그 헌장은 이슬람을 깊게 소개하고 쓰기를 “알라의 신실한 신도들의 지휘자의 손에 그의 종들의 일을 관장하는 책임을 맡겼다. 알라는 그들의 복지를 돌보며 그들의 번영을 위하여 일하며 그들의 목장을 채운다. 이러한 배려는 모슬렘뿐 아니라 동맹관계에 있는 원근의 다른 신하 국민에게도 미친다. 이 다른 백성은 ‘성서의 백성’(The People of the Book)이다. 이들은 보호조약의 조건의 제한 아래 있다. 칼리프들의 친절의 그늘이 이들에게도 미치고 있고 이것은 그들의 눈과 귀가 여기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는 바대로 확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교사업의 확장

네스토리우스파 동양교회는 비교적 자유로운 모슬렘 정권 아래서 선교를 확장해 갔다. 교회 본부가 옛날 셀루키아-크테시폰에 있었던 8세기 중엽 이전에 비하면 바그다드로 본부를 옮긴 이후 10~11세기에 이르는 동안 이 교회의 판도는 크게 확장되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유족해지고 부가 늘어남에 따라 선교사업의 자원이 풍족해졌다. 바그다드의 총대주교 티모디 1세는 40년 동안 교권을 장기간 쥐고서 교회 발전을 도모할 만큼 유능하였다. 바그다드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동양교회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도 있었는데 티모디는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비잔틴제국의 ‘가톨릭교회’ 감독과의 접촉도 실패했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독신생활을 명하였고 학교교육을 크게 강화하였고 칼리프와의 관계도 원만하였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인 멜레트 공동체의 수장을 겸하면서 멜레트의 조직과 운영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대도시별로 감독구를 신설하여 6세기 초에 7개였던 교구 수가 20개로 불었다. 10~13세기에 걸쳐 조직된 대도시 교구는 바그다드 본부 교구를 위시하여 니시비스 지방, 모슬 지방, 아디아베네 지방, 터크스탄 지방, 인도와 중국 당나라, 다메섹과 예루살렘 지방 등등의 교구들이었다.

이 중 터크스탄 지방의 선교가 주목되는데 중앙아시아와 몽고의 선교사업이기 때문이다. 터어키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흉노족과 몽고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부족 속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가 일찍 들어갔다. 사산왕조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흉노족과 터어키족을 따라 중앙아시아 고원 지대로 피난해 갔었는데 그들은 아란(Arran)과 장로 4명이었다. 바그다드의 총대주교 티모디는 터어키족 중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감독 한 사람과 100명 가량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수도사도 보냈다. 그리하여 타쉬켄트(Tashkent) 교구에 샤브할쇼(Sabhalsho)라는 감독이 있게 되었고 흉노족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또 케라이트(Keraite) 족속 속에도 그리스도인이 생겼다. 중세 서양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도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위구르족(Uighur), 나이만족(Naiman) 및 메르키트족(Merkit) 가운데도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런데 후에 징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점령으로 인하여 이 족속들이 다 몽고족에 합류되었고 교회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의 아들들이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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