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고 서용문 목사의 60주기 추모예배에서 설교를 전한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 본지 논설주간)가 설교 전문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주
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
▲본지 논설주간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 |
60년 전 10월, 6.25 한국전쟁을 평양에서 겪은 우리들에게는 잔인한 10월이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비가 엇갈리는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을 앞세운 미군이 UN의 푸른 깃발을 휘날리며 탱크를 몰고 평양에 입성한 것이 1950년 10월이었습니다.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집 안에 굴을 파고 숨어 있던 우리 젊은이들은 누렇게 뜬 얼굴로 어두운 굴속에서 기어 나와 급하게 만든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에서 만세를 불러 댔습니다. 해방의 만세를 불러댔습니다. 8.15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그 날에 소리소리 질렀던 만세를 UN군 평양 탈환의 날 다시 한 번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해 10월은 평양 해방의 기쁨과 환희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아버지, 인민군이 끌고 가버린 목사 아버지, 행방이 묘연하고 생사 불명의 아버지를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교회 교인들이 총 동원되어 목사님 행방을 찾아 나섰습니다. 19살 난 맏아들인 저 역시 이리저리 경찰서로 군부대가 있던 곳으로 산으로 강가로 정처 없이 찾아 헤맸습니다.
인민군이 도망치면서 감옥에 잡아 두었던 반공 인사들은 물론,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한 비참한 자국을 보았습니다. 탄광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고 폭탄을 터뜨려 시체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게 죽여버린 잔인한 광경, 도망치기 급한 나머지 사람들을 우물에 처넣어 죽인 시체들--평양의 산과 들, 대동강은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해 10월, 평양의 10월은 잔인한 10월이었습니다.
아버지 얼굴에 총알이
대동강 하류 강가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아버지 얼굴에는 총알 자국이 수없이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분노에 찬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빨갱이 놈들,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소리 질렀습니다.
아버지는 성경 말씀에 있는 스데반처럼 마지막 순간에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60)"하고 무지한 인민군들의 총질을 용서하고 쓰러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치밀어 오는 분노와 증오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같은 민족, 젊은 인민군의 총알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만으로 45세. 여기 이사진은 40세 만주의 봉천신학교 졸업사진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 일본 침략군과 대항해서 싸운 의병대장, 저의 할아버지는 함흥 일본 감옥에서 옥사하신 줄로만 알고 고아로 자랐습니다. 평안북도 드메 산꼴에서 염소 치는 양치기 소년으로 자라다가 쪽 복음 성경책 파는 판서인 아주머니에게서 한글을 깨우치고 강계읍에 있는 선교사 학교, 영실학교에 입학해서 고학으로 일하며 공부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맨손으로 평양신학교로 진학했지만 학비가 없어서 전도사로 고향으로 돌아와 압록강 강변 시골, 농촌 동네에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교인들이 가져다주는 곡식으로 연명하다시피 굶주렸고, 말라빠진 약한 몸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강직한 성격에 불같은 열정으로 전도하고 목회하고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흥해서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 나면, 교회 장로님들과 회의하다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회의장을 뛰쳐나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하는 말씀, "어서 일어나 짐 싸시오. 나 사표 냈으니, 내일 아침 우리 이사 갑시다." 어머니는 아무 말 안하시고 일어나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를 챙기고, 다음 날 아침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교회를 떠나 다음 동네로 정처 없이 떠납니다. 교인들이 소달구지에 매달려 소리소리 가지 말라고 아우성치고 눈물바다가 됩니다.
아버지는 그런 전도사였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기억하는 아버지의 설교는 주로 모세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노예로 고생하는 것을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모세를 앞장 세워 해방시킨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한국 백성들도 일제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이 될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소리 높여 열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소문을 안들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하라고 하는데 안하겠다고 소리 지르니, 일본 경찰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경찰서로 아버지를 불러다가 때리고 고문하고 별 협박을 다 했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제 어린 눈에도 우리 아버지는 항일 투사였습니다.
일본 경찰의 폭력에 굴복하느니 교회 일을 그만두고 잡화 식료품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 운영하듯이 장사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난생 처음 하루 세 끼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절이 우리 집의 황금시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장사가 잘되면 잘될수록 괴로워하시더니, 결국 영실학교 교장인 캄부열 선교사를 찾아 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캄부열 목사님을 뵙고 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짐을 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의 행선지는 압록강 넘어 만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식구는 다시 춥고 배고픈 만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막내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폐병에 걸려 고향 땅 어머니 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3살 난 저는 어머니를 평안북도 산골짜기 산소에 묻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야말로 만주 선교사의 아내로 순교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절대로 목사는 안 되겠다고 굳게 맹세까지 했었습니다. 목사 돼서 마누라 고생 안 시키겠다, 우리 집 아이들 절대 굶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해방과 분단과 전쟁
우리 식구는 8.15 해방을 만주에서 맞이했습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한국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아버지는 새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끌고 평안북도 고향 땅으로 돌아 왔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우리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주 땅에서 아버지는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는 목사네 식구가 많다는 이유로 교회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해방된 조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였습니다. 우리나라 북쪽의 해방군은 소련 군대였습니다. 소련 군대와 함께 평양에 진출한 공산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목사 안수를 받으신 다음에는 반공 목사가 되었고 더욱 강렬한 모세의 해방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공산정권이 세운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한, 성분이 나쁜 목사로 낙인 찍혔습니다.
아버지가 대동강 기슭에서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묶여 총살로 순교 당하신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버지를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뒷산에 장사지내고 며칠 되지 않아 폭탄이 터지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평양을 뒤로 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는 대열을 따라 수많은 피난민 행렬에 섞여 남으로 피난했습니다.
저는 동생들과 어머니와 떨어져서 단신 38선을 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생들과 어머니는 제가 부산으로 피난 와서 대한민국 해군에 자원입대한 뒤에도 2년 동안 인민군과 중공군을 피해서 피난생활을 이북에서 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저희 동생들과 어머니의 전쟁 중의 이북 피난민 생활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고난과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출간해서 여러분에게 선사하는 회고록, <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는 동생들의 피눈물 나는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 길에서 헤매이던 죽음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어린 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아버지만이 순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신앙과 교회를 지키다가 독재자 억압자의 총에 맞아 영웅으로 순교자의 거룩한 이름을 받았지만, 순교자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피난민의 고생을 했던 어머니와 우리 동생들은 순교자의 이름도 받지 못하면서 순교자의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동생들은 살아있는 6.25 전쟁의 순교자들입니다. 우리 형제들과 외동딸 누이동생을 나아 주신 어머니도 전도사 아내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만, 우리를 길러 주신 새 어머니는 전쟁 통에 피난민으로 더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길러주시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해 주신 한진모 권사님의 은혜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봉원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리는 데는 큰 뜻이 있습니다. 우리 새 어머니가 1973 년부터 1995년, 돌아가실 때 까지 이 교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으시고 출석하시고 저희들을 이 교회로 이끄셨습니다.
우리의 가족사가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만, 6.25 한국전쟁 때 목숨을 잃고 팔다리를 잃은 군인들, 남과 북에서 피난민으로 고생한 우리 형제자매들, 남과 북에서 이념의 이름으로, 분단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6.25 한국전쟁 추모예배
저희 아버지 서용문 목사님의 순교 60주년 추모예배의 참 뜻은 6.25 한국전쟁 60주년을 기억하는데 있습니다. 아버지 순교당하신지 60년 동안, 우리 형제들은 제사 한 번도 못 드리고 추모예배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우리 모두 70이 넘은 고령자가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잘들 살고 있습니다. 우리 2세대, 우리 아이들, 우리 손자들 4세대까지 아들 손자며느리 모두 합해서 총 37명이 여기 봉원교회의 교인으로 지난 37년 동안 출석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자식들이 아버지의 신앙을 지키고 목사가 안 되겠다던 제가 전두환 신군부의 감옥에서 회개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아버지 추모예배를 한 번은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모으면서, 추모예배는 우리 식구들만 모여 앉아서 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아버지의 순교는 6.25 한국전쟁의 비극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 믿음의 봉원교회 식구들과 신앙의 동지들과 친구들을 모시고 우리의 눈물과 아픔을 나누고 분단된 우리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서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대동강을 넘어 자유의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우리가 넘어야 할 요단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앞에 놓인 요단강 넘어 에는 이스라엘의 해방자 모세가 바라보던 가나안 복지, 통일된 자주 독립의 나라, 우리나라가 보입니다. 우리 늙은 세대, 전쟁의 한가운데서 손에 피를 묻힌 우리 전쟁의 세대는 모세처럼 요단강을 건널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통일 한국은 우리 몫이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 여호수아의 몫인 것 같습니다. 우리, 전쟁 세대는 평화와 통일의 요단강을 바라다보면서 죽어 가야할 것 같습니다.
대동강 기슭에 쓰러진 아버지를 안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겠다"는 분노에 찬 절규에서 "다시는 다시는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하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전쟁 없는 평화의 나라, 통일된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믿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과 많은 눈물과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원수에서 이웃으로, 증오와 분노에서 용서와 화해로, 앙갚음에서 측은지심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로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희생양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순교자가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천안함의 비극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어코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고 살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의를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다가 핍박 받는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 순교자 아버지는 축복 받은 분입니다. 그리고 순교자 아버지를 따라 신앙을 지킨 우리 모두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속절없이 북한의 평양 땅 대동강 강가에 쓰러진 순교자 서용문 목사의 십자가, 분단과 6.25 한국전쟁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우리 민족의 앞날에, 요단강 넘어, 평화와 통일의 부활의 믿음과 희망이 용솟음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희 가운데 오셔서 저희들의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저희들의 분노를 받아 주시고, 저희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죽음과 분단과 전쟁의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평화를 말하고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는 세상에서, 평화의 왕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책 증정:
저희 형제들이 오늘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내자고 했습니다. 회고록을 쓰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너무 슬프고 화나고 아팠습니다. 아버지를 회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를 총살한 북한 공산당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면서, 피난민으로 아버지 없이 고생한 이야기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 <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동연)를 쓰면서 우리 마음의 분노와 아픔이 많이 정리되었고, 눈물로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전쟁 세대가 평화의 세대에게 우리의 유언, 우리 유물로 물려 주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으로 고생했지만, 우리 다음 세대는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평화롭게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유언으로 우리 다음 세대에 물려 줍니다.
독재와 폭력의 3대 세습이 아니라, 평화의 세습, 순교자 아들이 순교자 외 손자에게 목사 세습를 한 것입니다. 저의 조카되는 홍지훈 목사가 이 책을 받는 소감을 자기 세대를 대표해서 한마디 해 주시겠습니다. 홍박사는 이 봉원교회에서 성장했고, 현재 호남신학대학교의 교회사학 교수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