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자문위원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첫째 사례: ‘찬양인도자학교’ 소속이라고 밝힌 청년들이 서울 봉은사 대웅전에 들어가서 불상 제단 앞에서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보고 불교를 비방 폄훼하는 속칭 ‘봉은사 땅밟기’란 제목의 인터넷 동영상이 잠시 유포되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동영상 내용 중에는 불교가 우상종교라는 것, 봉은사가 서있는 이 땅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땅이 될 것이라는 것,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포한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단체가 신중하지 못했던 행동이었음을 사과하는 일로 문제가 확대되지 않았으나 문제를 일으킨 불씨의 여진이 아직도 심상치 않다. 그 근본 동인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월 24일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자신이 일요법회에서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이같은 행동들이 한국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가고 있다”고 깊은 유감과 비판의 죽비를 든 바 있다.
둘째 사례: 앞의 사건이 일부 미성숙한 청년들의 경솔하고 무례한 행동이었다면 둘째 사례는 그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며 경남북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이다. 대립갈등의 두 단체는 대표적으로 ‘대구기독교총연합회’와 이에 맞서서 결성된 ‘대구불교총연합회’가 대응단체로 결성되었고, 조계종 본부에서도 성명서를 내고 심각하게 일부 기독교의 불교 폄훼와 현 정부의 특정종교 편향정책을 성토하고 나섰다.
문제의 발단은 대구시가 불교계와의 협의도 없이 진행한 ‘대구 팔공산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이 보수 개신교 집단의 저항과 반발로 무산·취소된 데서 일어났다. 타는 장작불에 기름 붓는다는 격으로 ‘대구기독교총연합회’는 2010년 5월17일 인터불고호텔에서 목사 7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동영상을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 중에 상식에 어긋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불교 신도가 들으면 기가 막히고 화가 날 내용인즉, 동화사에 통일대불이 세워진 후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적 진노 때문에 대구 지하철 사고도 나고, 대구 지역에 불행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 KTX 울산역 이름에다가 ‘통도사’라는 역명을 함께 병기하기로 된 원안이 취소되었고, 국회 예산 통과를 본 템플스테이 예산도 삭감되었다는 것이다.
불교계의 반발과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 불교가 한국문화사 속에서 1500여년이 지나는 동안에, 싫든 좋든 불교 문화는 한국 문화와 역사의 일부가 되었고, 문화재 보호와 민족문화 육성이라는 관점에서 대승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을 보수 기독교계가 십자군 정신으로 종교전쟁 하듯 사사건건 시비와 폄훼를 일삼는데,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 배후엔 MB 장로대통령의 본의 아니더라도 암묵적인 종교편향정책이 있다는 비판이다.
셋째 사례: 지난 11월1일 조간신문은 장충체육관에서 ‘기독교사회복지은행설립 발기인대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전했다. 기독교인 8,000여명이 참석했고, 귀빈으로 참석한 이들은 엄신형 목사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한국기독교지도자 협의회’, ‘성공21서울지역협의회’등에 소속된 보수 성향의 교계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대회에서 현 한기총 명예회장은 장로대통령을 세우신 하나님의 시대경륜을 찬양하고, ‘성공21서울협의회’ 대표회장은 4대강사업의 지지발언을 빼놓지 않았다.
뉴스를 접한 시민들의 반응은 결코 곱지 않고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이다. 기독교 실업인들이 모여 자본 출자하여 은행 설립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만, 현재 은행 설립 기본자산과 타당성 근거로서 제시하는 발언들이 한국교회 부동산 가치만 해도 80조원이고, 헌금 연간총액만 해도 4조8천억 이라는 등 교회자산과 헌금까지 들먹이면서 은행업을 하려한단 말이냐는 비아냥거리는 냉소적 비판이 식자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은행 설립 인가권을 책임진 정부기관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교회 헌금으로 자본금을 마련하더라도 자본건전성에 문제가 없으면, 특별히 은행 설립을 제재할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한다(한겨례 11월 2일 조간). 금융전문가 입장으로서는 돈에는 꼬리표가 안 붙는 것이니, 헌금이든 설립자들의 개인이나 단체의 출자금이든 문제될 것 없다는 말이다.
필자는 그 기사를 읽고 기가 막혔다. 한국교회가 이런 정도로 도덕적 감각에 아예 철판을 깔았고, 시대의 비판소리에 그렇게도 둔감함에 놀랐다. 사회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본주의 금융업계에 함께 손잡고 뛰어드셨나?”라고 조롱할 것이다. 헌금이 얼마나 차고 넘쳐서, 가난한 사람 구제하고도 남아 ‘이자 돈놀이’하려고 드는가 라고 한심스러워 한다. 은행설립자 명분은 은행 이름 그대로 한국사회 복지사업 지원에 있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고상한 ‘은행’이지 실제는 까놓고 말하면 은행이란 저축기탁금과 대출 금액 사이에 기간을 조절하는 ‘이자돈놀이’ 돈 버는 사업인 것이다.
문제를 어디서 풀어가야만 하는가? 동양고전 「논어」에 “근본이 바로서면 해결의 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는 명구가 있다. 그렇다. 오늘의 한국기독교계의 근본문제는 근본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대구 지역에서 발생하는 기독교계와 불교계의 긴장 갈등을 보면 이제는 ‘일부 기독교인’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도 어렵게 되어진 형국이다. 적어도 한국기독교의 소위 보수적 교단이라고 자처하는 기독교인 인구수 600만명 이상이 지금 한국 사회 속에서 ‘문제의 집단’으로서 급속하게 부각되고 주목을 받으며 기피집단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 제 1차적 책임은 교인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생각을 주입시킨 교계지도자들에게 있다.
지금 지구촌과 한국사회는 소위 말하는 ‘국가사회’ 발전단계를 넘어 ‘시민사회단계’로 진입하였다. 후진국 일수록 국가가 시민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범위가 넓고 깊지만, 역사는 국가 존재 이유를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육성하는 것이라고 합의하고 있다. 그런데, 시민사회 존속의 기본원리는 다양성, 관용성, 비폭력, 공공성 이라는 4가지 기본원리를 밑바탕에 깔고서만 성립되고 존속된다. 현대사회는 중세사회가 아니다. 각자 가치관과 종교와 삶의 목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시민사회인 것이다. 나와 다른 삶의 신념과 철학과 종교를 가지고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 엄연한 현실을 존중하고 관용하며 공공성을 지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시민사회 이다.
그런데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크게 열고, 정신을 차리고 오늘의 한국 기독교, 특히 흥황성세 중이라고 착각하는 소위 ‘보수적 기독교집단’들의 사고방식과 행태를 보라. 그들은 마치 중세 기독교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하다. 아니면 심지어 고대 가나안 입주시대 여호수아 시대이거나, 19세기 서구 문명의 문화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행태를 취한다. 한국사회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 복음정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우리조상들이 그 종교에 귀의했었고 한국 문화를 조성해온 전통종교를 마치 여호수아 군단이 가나안 입주시에 가졌던 바알종교와 동일시하여, 끄떡하면 불교나 다른 종교를 우상종교시 한다.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독단적인 행태인 줄도 모르고 스스로 기독교 교세 확장과 전도 열기에 광신도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 사이에, 한국사회는 한국기독교를 모두 싸잡아서 ‘가장 독선적, 독단적, 반사회적, 비윤리적 집단’으로 평가절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한기총을 포함한 한국 보수적 지도자들, 정확히 말하면 자기희생적 예수사랑의 삶은 없고 교리적 기독교를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그들이 이뤄놓은 지극히 제한된 종교적 성취에 도취하여 지나친 자신감과 안하무인격 무례를 한국사회 특히 한국 종교계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선교, 선교, 선교를 항상 부르짖지만, 정작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고 있는 한국 인구 50%를 ‘복음’에로 접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방해를 하는 역설적 반동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누가 복음전도의 길을 차단하고 있는가? 자기가 귀의하고 있는 불교도나, 천도교인이거나 유교인이거나, 원불교도 이거나, 심지어 가톨릭 교인들이 한국개신교의 전도를 차단하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동화사 불상대불설립이 대구지하철 참사의 직간접적 원인이라고 전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유포하고 불교박멸전의를 가다듬는 한국 기독교에 미래가 있을까? 한국사회가 이런 기독교를 용납할까?
다시 말한다. “본립이도생”이라고 했다. 골수에까지 들어간 이 깊은 병을 한국기독교가 고치기 위해선 최소한 다음 3가지를 바로잡아야 살 수 있다. 첫째, 성경문자주의적 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바울 사도가 말씀했다. 서울 봉은사에 들어가서 봉은사 땅을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기도하는 ‘청년기독신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 청년 책임이 아니고 ‘성경문자무오설’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신학자들과 목사들 책임이다.
둘째, 근본주의적 교리기독교를 예수의 ‘사랑의 복음’이라고 착각하는 교리주자들과, 십자군적 전투정신을 교회 물량적 성장으로 이용하는 21세기 바알 신앙적 기독교 물신숭배를 청산해야 한다. 진정한 바알종교는 불교나 천도교나 민족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안에 있다. 바알신은 ‘황금송아지’로서 항상 상징되어 왔다. 권력과 재력의 야합을 말한다.
셋째, 한국기독교는 한국사회가 개방적 시민사회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다양성, 관용성, 비폭력, 공공성을 침해하지 않는 최소한도의 시민윤리성을 지녀야 한다. 이웃종교를 교회교육 과정에서 교육하고 계몽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한국사회 속에서 계속 ‘왕따’를 당할 것이고, 새로운 전도 길은 점전 막힐 것이고, 30년 후에는 현재 한국 개신교 신도 총수 중에서 300만 명은 감소할 것이다.
축복이 아니라 재앙을 선포하는 이름 없는 한 은퇴교수요 목사인 나의 운명을 스스로 불행하게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누가 그 좋은 사랑의 예수 복음 전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