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만우 송창근 목사의 납북 6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고자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의 기고글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주 박사는 그의 제자 장공 김재준과는 달리 연구 및 평가에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송창근을 오랜 기간 연구, 지난 2008년 말에는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를 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주
Ⅱ-2. 행동하는 신앙과 신학적 삶(1932-1950)
▲주재용 한신대 명예교수(한신대 전 총장) |
박사학위를 가진 최고의 지성인 목사 송창근의 첫 목회지는 평양의 산정현(山亭峴)교회였다. 이 교회는 송창근 후임으로 부임한 주기철(朱基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옥되어 순교하므로 더욱 유명해진 교회지만, 이미 이 교회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월남하여 국회부의장을 지내다가 6․25때 납북된 김동원(金東元) 등이 장로로 시무하고 있어 그 성격이 뚜렷한 교회였다. 송창근이 부임하기 전에 1928년 미국에서 귀국한 박형룡(朴亨龍)이 부목사로 시무하고 있다가 그는 1930년에 평양신학교로 전임하였다. 1933년에 전임 목회자인 강규찬(姜奎燦)이 정식 사임한 것으로 보아 송창근은 1933년에 목회자로 위임된 것 같다. 송창근의 산정현교회 시무부임에 대해서 민경배는 당시 그 교회의 임시당회장이 박형룡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산정현이 보수와 진보의 이러한 절충지역 구실을 한 사실이 이 나라 교회사에서는 반드시 대서특필되어야 마땅하다”고 한다. 이것은 송창근의 신학사상이 이미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민경배 교수가 지적하듯이 송창근 박사가 “신학상으로 박형룡과는 극단의 대립관계에 있었던 근대주의적 경건 신학”의 입장이었다면, 물론 “근대주의적 경건의 신학”에 대한 개념정의가 불투명하지만, 송창근이 산정현교회에 청빙을 받게 된 것은 박형룡이 임시당회장이었다 해도 그 교회 지도자들의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신앙생활 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송창근을 산정현교회에 소개한 것은 채필근이었다고도 한다. 이 두 사람은 웅상교회에서부터 일본 동경 유학시절을 거쳐 오면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송창근은 평양에서 교회 목회와 함께 숭실학교에서 성경 교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영향을 받고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지도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 그는 청년학생들을 신앙과 민족을 연결시키면서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산정현교회는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송창근의 평양목회 기간은 겨우 3년이었다. 1936년 4월에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게 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설(設)이 있다.
김재준에 의하면 신사참배의 문제가 있었다.
“평양에서 안정할 것 같던 무렵에 ‘신사참배’ 문제가 있었다. 목사 이하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외 없이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晩雨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국 교역자들의 보조가 맞지 않아서 일은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에 가서 호주 선교부의 후원을 얻어 빈민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이른바 삼숭(三崇), 즉 숭실전문, 숭실, 숭의여학교 등의 존폐문제로 격론을 벌일 때 당시 종교교육부 총무이던 정인과(鄭仁果)가 신사참배를 해서라도 학교 교육을 계속 해야 한다고 하자 송창근이 정총무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회장 밖으로 밀어 내쳤다는 이야기”와 연결되기는 하지만 신사참배 문제가 송창근의 산정현교회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송창근의 후임으로 주기철이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역적 갈등과 교권과의 충돌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정인과 사건은 이 두 가지 갈등을 모두 포함한다. 정인과는 당시 장로교 총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서북계의 총수격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정인과에 대한 송창근의 행동은 곧 비서북계가 교권에 대한 도전을 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가 있었다. 송창근은 교회내 당파, 지역갈등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었다.
“天下共知하는 바에 조선교계에는 무슨 黨이 있다. 누구의 派가 있다 하야 서로 놀여 보고 못 믿업어 하는 터이요, 게다가 같은 조선 사람으로써 … 南놈 北놈 하야 스사로 갈등을 일삼으니 이 엇지 함인가. …결국은 조선 교회가 망하는 것 외에 소득이 없을 터인데 그래도 피차에 성찰이 부족한 듯하니 50년 禧年이냐 50년 噫年이냐”
셋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송창근의 신학사상이다. 민경배는 그의 신학이 “근대주의적 경건 신학”이라 했고 또 그의 논문이 “복음주의적 신앙을 고찰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의 경건과 신앙은 사회적 기독교론의 구조적 전환을 힐책할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 백과사전』은 그의 사임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신학 노선을 가졌던 송창근 목사는 보수성이 짙었던 한국교회, 특히 평양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고 마침내 1935년에 있은 유형기 단권 주석 사건 당시 집필자로 참여했던 것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936년에 산정현 교회를 사임하였다.”
송창근이 『단권 주석』번역에 참여한 것이 사실이었고, 이것이 1935년 총회에서 문제가 되었을 때, 채필근 등은 총회에 사과를 했으나, 송창근을 비롯한 김재준, 한경직 등은 총회의 결정에 반대하고 집필한 부분이 장로교 신경(信經)에 위배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김양선(金良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송창근 목사 일련의 집필자들은 교리의 위배를 이유로 한 사과와 같은 것은 전연 있을 수 없으며 신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총회의 독단에 응할 수 없음을 표명하였다. 이것은 실로 한국교회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보수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도전의 효시(曉矢)이었다.”
끝으로 교회 건축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건축비용 충당에 대해서 장로들과 목사와의 의견 대립 문제였다. 산정현교회 건물은 오래된 한국식 건물로서 예배당 안에는 몇 개의 기둥이 서 있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를 새로 건축하려고 했다. 그 당시 산정현교회에는 교인들 중에서 별세했거나 노년이 된 사람들이 자기들의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는 일이 많아서 그 재산이 상당한 액수에 달하고 있었다. 당회원들은 이것을 교회 건축비로 사용하려고 했고 송창근은 그 헌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뜻 있는 전도 사업에 쓰고 교회 건축은 별도로 헌금하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당회원들과 목사 사이에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송창근은 교회를 사임했다는 것이다.
송창근이 그 특별한 헌금을 교회 건축에 사용하지 않고 재산을 헌납한 교인들의 뜻에 맞는 다른 구제 사업에 쓰려고 했던 것은 그가 프란시스의 성빈 사상을 흠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송창근이 교회를 사임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것은 교회 건축비 문제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신사 참배를 반대했겠으나 그의 후임으로 주기철이 부임한 것으로 보아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가 되기에는 미흡한 것 같고, 서북 교권세력에 대한 도전을 그가 의도적으로 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교권세력이 비서부세력을 제거하려고 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교권적 갈등과 연관되어 그의 신학도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단권주석’ 사건에서 그는 총회의 결의에 순응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형룡의 신학사상과도 충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송창근은 박사 학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