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만우 송창근 목사의 납북 6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고자 주재용 박사(한신대 전 총장)의 기고글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주 박사는 그의 제자 장공 김재준과는 달리 연구 및 평가에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송창근을 오랜 기간 연구, 지난 2008년 말에는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를 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주
Ⅱ-3. 그의 인간성 : 다정다감한 사람
▲주재용 한신대 명예교수(한신대 전 총장) |
만우 송창근 목사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 한편이 있다. 『萬里長空 片雲浮動 晩雨一過后 秋陽可愛』이것은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그리고 한경직의 아호를 가지고 만든 시다. 이들은 각기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아호로 시가 만들어질 만큼 그들은 남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혹시 네 사람의 공동시인지도 모르겠고 제 삼자가 그들의 인간관계를 두고 만든 시일 수도 있다. 이 시에 대해서 서정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시구는 한국 교회가 큰 시련에 맞닿아 있을 때 새로운 웅지와 기운을 품고 선구적 사명을 다하던 지도적 인물들의 우애와 교분을 표적하는, 그들만의 정표가 깃든 우정시(友情詩)이다. … 이들은 각기 다른 면면과 사유를 지녔음에도 오랜 정분과 공감으로 한국교회의 갱신과 비전에 앞장 섰었고 더러는 지금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송창근의 글을 『신학지남』에서 직접 편집도 하고 교정도 보았다고 하는 김인서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좀 더 살았었다면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막았을 것이라고 한다.
“씨는 총명한 위에 多讀하고, 다정한 위에 결벽의 사람이다. 경건 문학을 애호하여 프란시스 연구로는 조선에서 第1人일 것이다. … 그 多愛한 일면은 목회자 되기에 좋으나, 그 강직한 일면은 처세도에 불리해 보았다. … 西道 사람이라 할 만치 西道知友가 많고, 남도 사람이라 할 만큼 남도 지우를 많이 가진 평양 宋목사는 남북 절충의 안전판이 되었거니와….”
송창근은 누구보다도 민족과 교회를 사랑했고 그 미래 운명을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것이겠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사람을 그리워하고 아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성격이 그로 하여금 김재준을 찾아내 한국 교회 역사에 거인이 되게 했던 것이다. 김재준은 송창근과의 첫 만남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위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기 때문에 다시 기술하지 않겠다.
그리고 김재준은 송창근에 대해서 “그는 다감하고 정다운 미남이었지만 뜻은 구름처럼 높았다”고 하였다.
강원룡은 “애증의 갈등 속에서 자란 정”을 송창근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송창근은 강원룡이 정치 운동을 한다고 그를 반(半) 기독교주의자라고 야단을 치면서도 구제품이 오면 그가 입을 만한 옷가지들을 골라 싸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에게 “그놈보고 옷이나 제대로 입고 돌아다니며 떠들라고 해!” 하면서 옷 보따리를 던지고 갔다는 것이다. 송창근은 강원룡을 꾸중하면서도 사랑했던 것이다.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꾸중하시던 송창근은 강원룡이 오자 그의 손을 움켜쥐고 그의 손등에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는 것이다. 강원룡은 송창근이 손수 만들어 준 보신탕을 함께 먹고 헤어진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한다.
이일선에 의하면 송창근은 넓은 인품에 영웅적이면서도 인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일선은 자기 교회에서 부흥회를 끝내고 김천교회로 돌아가신 송창근 목사에게 감사절에 교회에서 할 연설문을 써서 보내달라는 요청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송창근은 알지도 못하는 이일선 소년에게 감사절 연설문을 써서 보내준 것이다.
박한진은 송창근에 대해서 “불이면서 물이신 분”이라 했고 양정신은 “학생들을 총회 결의에 따라 처벌하시고 교단에서 통곡하시는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한봉심은 “자애로운 아버지 같으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교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으나 교수들에 대해서는 불평이 많아 학교생활에 있어서 교수들에게 반항을 했던 김영수는 그의 추모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학년에 들어와서 나에게 비친 송박사 상은 뛰어난 경세가라는 이미지였다. 나는 그에게서 민족적인 긍지가 무엇임을 배웠고 한국 교회가 어디로 지향해야겠다는 것을 배웠다. 그분은 우리에게 소꼬리가 되지 말고 닭 모가지가 되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를 격언과 잠언으로 교육을 했다. 사실 그에게서 배운 것은 신학의 이론이 아니라 신학의 실상이었고 삶의 실상이었고 한국교회의 실상이었다.
송박사에게 수없이 호출을 당했지만, 그분이 나를 꾸짖은 말씀은 늘 ‘임자, 내가 임자에게 무엇을 잘못했다고 내 속을 썩혀!’하는 식의 말로 매서우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자식을 대하듯 따뜻한 정이 깔려 있는 훈계였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목회자로서의 송창근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얼마나 해학적인 사람이었나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송창근이 교회를 순회하는 중에 어느 교회의 영수 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때마침 영수는 마당에서 일을 하면서 담배를 피어 물고 있었다. 그가 송창근 일행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당황하여 담뱃대를 등에다 감추었다. 이것을 본 송 목사는 “아이구 영수님, 그러시다가 등의 살을 데시겠습니다”하고는 등에서 담뱃대를 빼주고는 그 다음 주일예배에서 교인들에게 영수님이 속병이 있어서 가끔 담배를 피우니 흉하게 보지 말라고 광고를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수는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결코 규격적으로 살지는 않았으며, 항상 긍정적이며 미래 비전을 바라보고 살았다. 그래서 엄격하면서도 자상했던 것이다. 강자에게는 강했고 약자에게는 약했던 사람이다. 김삼수는 송창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는데, 이 글은 인간 송창근에 대한 결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송 박사는 범같이 무서운 위엄과 권위를 가지셨는가 하면 또한 그 반면에 어리고 약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온정이 인자한 어머니 사랑 같이 흐르며, 또한 신념 충만한 일당만의 기백을 가지신 어른이신 동시에 지극히 세밀한 사건까지 무관심으로 지내 버리신 일이 없으며 항상 약자를 돕는 친구였으며, 또한 교만한 마음의 소유자를 그의 독특하신 권위로 꺾어 낮추시는 어른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