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
일시 : 2011년 1월 14일
발표 : 전병금 목사(강남교회)
출처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일 방안을 찾기 위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작년 3월에 전화설문조사를 했다. 이 조사 결과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8.4%에 불과한 반면 불신한다는 비중은 48.3%로 높았다. 또 ‘기독교(개신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쪽은 14%인 반면 ‘그렇지 않다’는 쪽이 3.5배에 달하는 50.8%나 됐다.
가톨릭교회와 불교사찰, 개신교회 셋의 신뢰도 조사에선 35.2%가 가톨릭교회를, 31.1%가 불교사찰을 신뢰한다고 답했고, 개신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8%로 크게 낮았다. 특히 자신의 종교를 기독(개신)교라고 답한 이들의 14.1%가 개신교회가 아니라 가톨릭교회를 더 신뢰한다고 응답한 반면 가톨릭 신자들은 1.1%만이 개신교회를 신뢰한다고 꼽았다. 종교별 호감도에선 기독교, 불교, 가톨릭, 유교 가운데 불교가 31.5%로 가장 높았고, 가톨릭은 29.8%, 기독교는 20.6%였다. 최하위를 기록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볼 때 한국 기독교가 조선왕조 말인 1885년 4월 5일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암흑 속에서 헤매던 우리의 정신과 문맹을 깨워온 것을 지금의 사회가 망각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 이후 한국 교회는 아직 미약한 교세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어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를 세워 문맹을 퇴치하고 외국의 선진문명을 도입하여 미신을 타파하는 등 우리나라의 수 천년된 어느 종교보다 한국 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했음에도 과거의 그러한 역사적 공로는 매도당한 채 지금은 ‘꼴찌’라는 ‘수모’를 겪고 있으니 교회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한다면 이러한 ‘수모’는 이미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수모’는 80년대 이후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교회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한국 사회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박정희 5.16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물량 위주의 성장주의가 기업과 교회에 침투하게 되어 가장 질적이어야 할 교회마저 이러한 물량주의에 매몰되어 교회성장 제일주의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사정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로 인한 교회의 심각한 분열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비단 나만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위의 기윤실 전화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교회의 신뢰도 제고를 위해 바뀌어야 하는 것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2%가 ‘교인과 교회지도자들이 언행일치 면에서 나아져야 한다’고 응답했고, 이어 타종교에 대한 관용(25.8%), 사회봉사(11.9%), 재정 사용의 투명성(11.5%), 교회의 성장제일주의(4.5%), 강압적인 전도(3.8%) 차례였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한국의 역사가 교회에 부여한 사회적 책임을 훌륭히 수행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아 한국의 정신사를 새롭게 바꾼 반면에 지금의 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대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오로지 교회 내적인 성장에만 치중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것이다. 민심(民心)은 바로 천심(天心)인 것처럼 우리는 이런 기독교의 ‘수모’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수모를 당했다고 하여 그러한 수모를 준 사람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여 교회의 변화와 갱신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적인 섬김과 이웃에 대한 실천적인 봉사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목회자의 윤리가 실종되어, 하나님이 선택한 종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맡겼다는 사실을 망각한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목회자의 비윤리적인 행동이 TV나 인터넷 등으로 공론화 되어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아주 빠른 속도로 파급시켜 전도를 가로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적대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까지는 성도들이 목회자를 대부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한국교회성장연구소가 서울 지역 교회 담임 목회자의 도덕성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바 있는데, 71%의 교인들이 담임목회자들에게 강한 신뢰를, 25%는 어느 정도의 신뢰를, 나머지 4%는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는 반기독교 정서를 고려하다면 71%의 교인들이 담임목회자에 대해 강한 도덕적 신뢰감을 갖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놀랄만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놀랄만한 결과에 자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놀랐다’는 것 자체가 목회자의 윤리가 심각할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윤리가 우려할 정도로 실종되어 많은 교인들이 부정적인 답을 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반대되는 결과를 내 놓아서 놀란 것이기에, 목회자들의 윤리가 실종되고 있다는 것을 목회자들 스스로가 자인한 셈인 것이다. 결과가 아무리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목회자들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윤리의 실종을 자인한 셈이니, 그 조사 결과는 목회자의 윤리가 심각할 정도로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소수의 불만족해하는 4%의 교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더욱 더 목회자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2. 효율성과 결과 중심의 비즈니스화 된 목회
무한경쟁을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숫적인 부흥에만 몰두하는 한국교회는목회를 ‘경영’으로, 목회자를 'CEO'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목회자의 CEO화는 세상을 바꾸어야 할 교회가 세상에 지배되고 만 결과의 표현이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 또는 기업화는 실로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 곳곳에 심각하게 그리고 널리 퍼져 있다. 교회의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 아니라 ‘효율’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고, 교회 성도는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효율적인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예배는 전문적인 예배 사역자들의 기능화된 ‘상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세속화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의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답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합리화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강단의 설교에서 느껴지는 것은 복음을 가장한 인간의 섬뜩할 정도로 세속적인 욕망일 뿐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히4:12)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종된 지 오래이다. 세속화된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뢰도 추락은 한국 교회 ‘강단’의 위기에서 온 것이다. 가톨릭은 예전 중심적인 미사를 드리고, 개신교는 말씀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만큼 기독교의 신뢰도의 추락은 바로 강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에 대한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우상숭배적인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함이 없이는 한국교회는 다시 한국의 초대교회처럼 존경받는 교회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지나친 외형적 성장의 집착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관심이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대형마트의 SSM이 주택가로까지 침투하여 소형 상점을 위협하는 것처럼 이런 대형교회로 인하여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 교회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게 하였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4. 물량주의
물량주의는 한국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주면서 그 전개과정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신도수, 교회 건물의 크기, 연간 예산, 헌금의 규모, 목회자 사례비와 승용차 모델에 이르기까지 물량적 지표들이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것(物)을 중요시하고, 수치로써 환산할 수 없는 질적인 것보다는 수치로서 환산할 수 있는 양적인 것(量)을 선호하는 태도가 짙게 한국교회에 깔려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성장주의적 물량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의 좌절이라든지 사회적 경쟁과정에서의 소외, 늘어난 물질적 욕구충족으로 인한 자연의 훼손, 실업 문제와 인간적 관계의 상실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다.
만화영화 슈렉을 보면, 슈렉과 당나귀 덩키가 악당의 성을 방문하게 된다. 엄청나게 큰 성을 본 당나귀 덩키가 이렇게 말한다. “우와 무지 큰 성이다!” 그때 슈렉이 이렇게 말한다. “성주가 건물에 대해 열등감이 있나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속에 공허감과 부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크기로 승부하지 않는다. 건강함이란 물량과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에 걸맞게 내면과 현실이 조화를 이룬 것 속에 존재한다.
5. 개교회주의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에 기초하여 놀라운 성장을 해 왔다. 그러나 하나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라는 사도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오직 유형적인 교회로서 자신의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개교회주의는 지금 도리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네비우스적인 방법은 분명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는 것으로 그 방법을 해석하고 사용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역사적으로 심각하다.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교회는 교파의 벽이 너무 높아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은 이러한 개교회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상호 협력의 정신을 배우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그것도 무한 경쟁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첫째,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변의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아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시킨다. 둘째, 지나친 개 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 이단으로 되기 쉽다. 개교회주의에 근거하여 성장 발전한 교회는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단들이 형성된다. 셋째,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공헌하지 못하고 기복주의에 빠진다. 개교회주의적 사고는 신앙을 사적으로(private)으로 만들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공적인(public) 측면을 간과하게 된다. 복음의 공적인 측면의 간과는 일제 시대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었던 역사적 전통을 모조리 없애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들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고치는 것이다. 현상에는 분명히 그러한 현상을 일으킨 ‘구조’와 ‘제도’가 있기 마련이다. 구조와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 없는 개인적인 해결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 갈수록 ‘법’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적으로,’ 즉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필자가 보기에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효율성 중심의 비즈니스화 된 목회, 지나친 외형적 성장의 집착, 물량주의를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개교회주의’에 있다. 윤리적 타락이나 지나친 외형에 집착하는 비즈니스화 된 목회를 목회자 스스로가 자성하여 고쳐 갈 수 있지만, ‘개교회주의’라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무력하기 일쑤이다. 왜 많은 목회자들이 물량주의로 비즈니스화 된 목회를 하겠는가? 왜 많은 목회자들이 처음 받은 소명을 망각한 채 윤리적으로 타락해 갔겠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개교회주의로 인해 발생한 목회자들 간의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이 불러일으킨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의 장 속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결과나 효율성이지 그 무슨 고상한 윤리적 원리는 아닐 것이다. 결과만 좋다면, 교인들의 숫자만 늘어난다면, 그 결과를 발생시킨 수단은 그것이 아무리 악할 지라도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 되는데, 그 어떤 목회자가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데, 결과와는 별 관련이 없는 ‘고상한’ 도덕적 원리의 탐색에 몰두하고 있겠는가?
개교회주의를 벗어나서 연합과 일치를 이루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어 왔으나 ‘실질적으로는’ 많은 성과를 보지 못하고 무슨 선언서 형태로 ‘말로만’ 많은 성과를 보고 있다. 즉, 개교회주의의 해결에 관련해서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그래서 현실적인 파급력이 거의 없는 ‘말잔치만’ 풍성한 느낌이다. 말잔치만으로 끝나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현실적인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합의 사항이 나아와 하고, 그 합의 사항에 기초하여 전교회가 움직여야 한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긴 달아야 한다. 누가 달 것인가? 이미 개교회화 된 한국 기독교 현실 속에서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고, 또 달아야만 하는가? 이미 우리나라 기독교가 뿌리 깊게 개교회화 되어 있기 때문에 답은 여기 참석하신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간단하다. 바로 ‘대형교회’다. 교단 내에서 많은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대형교회가 예수의 성육신을 본받아 자신의 헤게모니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개교회주의에 관한 모든 논의는 다시 한 번 선언서로만 남아 창고에 버려져 먼지만 쌓일 것이다. 대형교회가 책임을 자각하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데, 그 방울을 달려면 지금까지 자신의 교회를 대형교회로 만들어 준 그 모든 성장의 원리와 결과를 다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울을 달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대형교회가 “예, 하겠습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에 맞게 하나 된 교회를 위해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나오게 될 것이다.
완전한 교회를 찾는 한 청년이 한 교회의 목사를 만나 완전한 교회가 무엇인지를 질문하자 그 목사는 “한 교회가 있기는 한데 자네가 그 교회에 등록을 하는 순간 그 교회는 더 이상 완전한 교회가 아니 될 걸세”라고 대답했다. 현실의 교회는 그 어떠한 교회라도 완전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교회를 구하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교만일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한 교회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애정이 없이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판만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랑으로 그 문제를 끌어안아 현실적으로 조금씩 완전한 교회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처럼 현실의 교회를 완전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개혁하고 개혁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