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
일시 : 2011년 1월 14일
발표 :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 원로)
출처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오늘 21세기 지구촌에서 큰 강도를 만나 귀중한 것을 모두 빼앗겼을 뿐 아니라 죽게 된 이웃은 바로 북한 동포이다.
죽어가는 북한동포 에게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사마리아人에 관한 말씀이 유일의 복음이다. (눅 10;30-37)
1, 북한동포를 대하는 한국교회의 철학과 자세.
본문에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 强盜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세 사람을 그길로 지나가게 하셨다. 이 세 사람은 강도만난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 들 이다.
마찬가지로 북한동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강도만나 죽게 된 북한동포의 이웃은 한국교회로 택하셨다.
그리고 이일을 감당하게하기 위해 한국교회에 신앙도, 자유도, 풍부도, 번영도, 기회도, 사명도 다 주셨다. 오늘날 한국교회 입장에서 가장 눈앞에 닥친 불쌍히 여겨야 할 이웃은 북한동포 이다.
그런데 북한동포를 대하는 한국교회는 본문이 암시하는 3종 철학과 교회로 나눌 수 있다.
1), 강도 철학이다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다, 그러므로 빼앗는다.” 는 철학의 교회와 신자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면 “모두 다 빼앗아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만 강조한다, 하나님의뜻대로 나누어주는 것은 생각지 않고 “나와 우리 교회만 잘되도록 쓴다.” 로만 살게 된다.
이런 교인들과 교회는 강도 피해를 받아 죽게 된 북한동포를 마치 강도와 같은 무리로 보고 대하여 적대시 한다, 죽어가는 북한 동포에게는 도리어 절망만을 안겨준다.
오늘날 교회 중에는 없어져도 좋을 교회가 있다.
2) 제사장 레위人 철학이다. “내 것은 내 것이다, 그러므로 잘 지킨다,”는 철학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면, 이웃이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그냥 피하여 지나가자”로 살게 된다.
이런 신자들과 교회는 죽어가는 북한동포를 마치 타인으로만 보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지나간다.
이 땅위에는 있으나 마나한 교회도 많다.
3) 선한 사마리아人 철학이다. “내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누어 준다”는 철학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붙들어 주자” “일으켜 주자” “구해 주자” “살려 주자” “도와주자”로 살게 된다.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자와 교회이다.
이런 성도들과 교회는 북한동포의 상태를 마치 내가 당한 것으로 여기고, 혹은 내 가족(부모나 처 자녀)으로 여겨, 구체적으로 돕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人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은 선한 사마리아人같은 철학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주신 것이다.
2, 교회는 대북관계에서 우선순위의 첫째를 북한동포의 영육 구원에 두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눈여겨 봐야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강도가 누구냐?” “강도를 잡으라.” 는 말씀이 없다. 지나가던 제사장도 레위人도 사마리아人도 강도를 찾거나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主님도 그 방면에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강도만난 사람을 어떻게 대 하느냐.?를 보시며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만약 사마리아人이 강도잡겠다고 시간을 보냈다면 강도만난 사람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관심과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북한에 강도 만나 죽게 된 동포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강도에만 신경 쓰면서 강도만나 죽게 된 동포는 계속 죽고 있는데 관심도 책임도 지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크게 잘못 된 것이다.
그러면 主님께서는 왜? 강도에 관 하여서 언급을 하지 않으셨을까? 강도는 主님이 책임을 지시고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미 독일의 Nazi 당이나, 일본 제국주의나, 전 세계 공산주의라는 강도는 심판하셨다.
한국교회는 강도를 잡아 없앨 만 한 능력은 없다. 그런 책임을 주셔도 감당이 안 된다.
다만 한국 교회는 강도를 심판하시는 主님께 속히 북한 동포에게 신앙의 자유와 살길을 주십사고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그 심판은 主님께 맡기고,
오직 한국교회는 강도만나 죽게 된 동포의 영육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급선무요 책임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지금 제사장, 레위人처럼 피하여 지나가고 있다. 이제라도 온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人이 되어야한다.
한국교회가 선한 사마리아人이되면 죽어가는 북한동포의 영육구원이 이루어진다. 한국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人이 되어 구원하여주면 강도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되게 되어 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Plan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선한 사마리아人이 되지 못했을 때는 강도문제가 해결 되어도, 죽어가는 동포의 영육구원은 영원히 기회를 놋치고 만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북한동포가 강도만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 극도의 불행이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된다면 천만다행한 일이 된다.
본문의 강도만난 상인이 선한 사마리아人을 만나 살아났듯이 바로 한국교회가 북한동포를 돕는 것을 우선순위의 첫째로 하는 이웃이 된다면 북한 동포는 구원을 받는다.
옛날 모르드개 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14b)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우리에게 주신 온갖 은혜를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로 생각해야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선한사마리아人 되기를 포기한다면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에스더 4;14a) 는 말씀대로 강도만난 북한 동포는 다른 기독교인을 통하여 구원 얻게 하실 것이나, (근간 북한이 유-럽 교회와 교류 설, 혹 미국 신자에 의해)
기회와 책임을 회피한 한국교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로 책망하시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30) 고 엄벌을 내리실 것이다.
만약 남북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할 기회를 놓치면 적대시로 인해 피차의 앙화가 될 뿐만 아니라 자손만대 저주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순수한 복음 적이고 신앙적 참 사랑이어야 한다.
한 가지 명확해야하는 것은 한국교회는 한국정부나 북한 정부와 같은 입장에서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문의 경우 가령 강도가 다시 나타나 강도당한 사람을 인질 로 하여 대치(大熾)가 되었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면 많이 어려워진다. 방법은
① 협상,(지금까지의 방법)
② 인질범 만 돕는다.(최 악행, 동범자)
③ 인질범은 무시하고 인질만 돕는다.(最難)
④ 장시간 대치로 지치게 한다.(무책임)
⑤ 무력공격으로 인질 범 생포나 사살.(위험 많음)
⑥ 인질이 인질 범 제압.(가장 바람직하나 難望)
⑦ 인질범의 이상변동(급병. 사고 등)
이상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정부나 군부의 몫이다.
남북한 정부나 군부 당국자는 정치적 군사적 책임을 다해야한다. 그것을 잘못하면 책임을 져야 하고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정부가하는 해 볕 정책도, 북한 정부의 무력통일이 그 일환이다.
교회는 물론 양 정부의 협의나 협조는 필요하나, 정부에 관여하거나 역행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하는 것은 “해 볕 정책”도 “흡수통일”도 아니고, 북한 정부의 “무력통일”도 “심리교란작전”의 심부름도 아니다. 물론 반정부 운동도 아니다.
그렇다고 조국을 버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Martin Luther가 “그리스도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人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하며 “죽기까지 복음주의, 죽기까지 독일주의” 라고 하였다.
남한의 어떤 이가 성직자 이름을 가지고 자기가 속한 남한 정부를 비난공격하고 북한 정부를 지지하는 행위를 하면서 마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것처럼 운운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은 아니고 북한 정부의 종이다.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고 정치적 행위이다. 마땅히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런 행위는 교회와 그리스도人들의 본질적 사명을 훼손하고 방해하는 것으로 단호히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와는 무관함을 밝혀야한다.
교회는 정치적이 되도 안 되고, 군사적이 되도 안 된다. 그런 것 들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여야한다.
교회는 남북한 정부나 군사 책임자들까지도 영육구원을 얻어야할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로마 정부의 군부 책임자 백부장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人은 민족감정도, 원수관계도, 이해타산도 초월하여 오로지 사랑으로 강도만난 사람을 살려 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순수하게 지킬 때 구원이 온다. 이것이 교회의 자세요, 사명이다.
4, 구체적으로 도와야한다.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人은
⑴ “불쌍히 여겼다.”(33) 즉 복음 적인 속죄 애이다.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다 물론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부터 일어나야한다. 참 사랑 있으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⑵ “가까이 갔다.”(34) 즉 시간과 건강을 썼다.
⑶ “기름”(치료제)과 “포도주”(마취제)(34)를 발랐다. 즉 지식과 기술을 썼다.
⑷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다.”(34) 즉 교회로 인도 하여 지속적인 구원과 회복을 하게하여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쏘련. Stalin이 독일군에 막대한 타격을 받아 위기에 직면해 미국 Roosevelt대통령에게 지원요청을 하였다. “Moscow 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자유를 주면 돕겠다.” 라는 조건으로 도왔다. 한국교회도 북한에 “교회세우고 신앙자유주면 돕는다.”가 올바른 자세라고 본다.
⑸ “비용을 지불했다.”(35) 즉 물질 재산을 썼다. 모든 교회가 솔선(남한 사회 모두에 앞서)하여 예산의 1%라도 세워 공동노력으로 힘써야한다.
5, 가장 큰 선물은 복음 적 통일이다.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人은
① 죽을 생명을 살렸다,
② 원수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③ 영생을 얻게(25) 하였다.
정치적 통일도, 경제적 통일도, 문화적 통일도 이념적 통일도 힘써야 하지만 복음적 통일에서만 이런 결과가 온다. 복음적 통일은 신자와 교회만이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