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김명혁]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요1:14,17:18, 막10:45)

설교: 김명혁 목사(KWMA 정기총회 개회예배 서울남교회 2011년 1월 24일 오전 10시 30분)  
출처: 김명혁 목사 홈페이지( http://www.kbpc.kr/pastor/04b.php
  
저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인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한 평생을 목회의 길과 신학의 길과 선교의 길로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의 길로 걸어가도록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분들은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 등이었습니다. 제가 신학의 길로 걸어가도록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분들은 한경직 목사님과 한철하 박사님과 울리 교수님과 펠리칸 박사님 등이었습니다. 제가 선교의 길로 걸어가도록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분들은 조동진 목사님과 랄프 윈터 박사님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존 스토트 박사님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그리고 스승님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세계스포츠선교협의회 등을 만드는 일에 심부름의 역할을 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KWMA 정기총회 개회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도 많고 신학도 많고 선교도 많은데, 완전한 교회도 없고 완전한 신학도 없고 완전한 선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와 신학과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죄인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신학과 한국선교의 공통적인 문제는 너무 세속화 되었고 너무 인간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비지네스화 되었고 신학은 이론화 되었고 선교는 인간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동진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현지인들을 무시한 채 한국인끼리 모여 한국식 교회를 세우고 한국식 선교를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현지인이 원하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우리가 전하고 싶은 복음만 전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상황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선교가 자기 중심적인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참회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신학과 선교의 변화와 성숙을 바라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선교의 변화와 성숙을 추구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변화와 성숙은 주님 바라봄과 주님 생각함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떠남’과 ‘찾아감’의 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셨습니다. 베들레헴으로 애굽으로 나사렛으로 갈릴리로 사마리아로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찾아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세상 끝으로 찾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28:19).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행1:8). 주님께서 친히 걸으시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선교의 길은 ‘떠남’과 ‘찾아감’의 길이었습니다. 선교의 길은 고향과 고국을 포기하고 타향과 타국으로 그리고 땅끝으로 달려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경상도를 떠나고 전라도를 떠나고 평안도를 떠나고 대한민국을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땅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됨’의 길 즉 ‘becoming’의 길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이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기와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시고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고 약한 일이고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의 길은 ‘되는’ 길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변화와 존재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선교의 길은 백인이 백인 됨을 포기하고 흑인이 되는 길이고, 미국 사람이 미국 사람 됨을 포기하고 한국 사람이 되는 길이고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됨을 포기하고 태국 사람이나 브라질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요와 건강을 포기하고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병든 환자가 되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 즉 ‘dwelling together’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과 함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선교의 길은 ‘함께 사는’ 길입니다. 독일의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식사도 함께 하고 대화도 함께 하고 잠도 함께 자는 삶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변화와 관계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상황화를 의미합니다. 선교의 길은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쳐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길이고, 언더우드 4대 손들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이고, 신홍식 선교사 강성철 선교사 강성일 선교사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이나 브라질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신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져주시면서 긍휼과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주시면서 긍휼과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마5:44).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은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신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그런 선교의 길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걸어가셨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전도나 기도나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 행사를 하는 중에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때 그런 노래를 하면 테러를 당할 것입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전도나 강의를 하는 길이 아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은 대속의 제물이 되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 보내시면서 제자들도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9). 베드로가 그 길을 걸었고 사도 바울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너희 믿음의 제물 위에 내가 나를 관제(피 제물)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사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참회하면서 선교의 변화와 성숙을 바라고 사모하고 추구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떠남’과 ‘찾아감’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됨’의 길 즉 ‘becoming’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 즉 ‘dwelling together’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신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대속의 제물이 되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들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주님께서 지니셨던 선교의 흔적을 우리 몸에 지니게 하시고 주님께서 죽으셨던 선교적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달려간 땅끝이 로마였다면 오늘 우리들이 달려가야 할 땅끝은 북한이나 모슬렘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북한 선교와 모슬렘선교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또는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혹 저를 제물로 드릴 수는 없습니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 수가 있고 선교적인 죽음도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국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선교적인 죽음까지 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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