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죽어가는 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 땅으로 추방되고 만다. '여인이 없으면 갓난아이인 두 딸은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걱정이었다.
몇 년 후 미하일은 여인의 딸들이 한 부인의 손에 애지중지 길러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이의 친엄마가 아닌 그 부인은 "다행히 젖이 나와 아이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비록 내 자식은 아니지만 내 자식 마냥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미하일은 드디어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깨닫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멘토' 이효정씨와 '멘티' 새롬(가명) 양. 새롬 양은 서울 상도동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직장인 이효정씨는 매월 1~2회 새롬 양의 집을 찾아가 새롬 양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씨의 바람은 "언젠가 새롬 양이 힘들어질 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게임하고 TV 보며 깔깔거리는 게 3시간 동안 그들이 하는 일이다. ⓒ이지수 기자 |
이효정씨(29)는 서울 강남의 한 여행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8시 20분에 출근해 6시 30분에 퇴근하고 7시가 넘어서야 불꺼진 자취방에 도착한다. 일요일에는 빠짐 없이 교회에 간다.
그런 그가 한 달에 한 번, '아주 특별한 외출'을 한다. 휴일인 토요일 오후, 그는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상도동으로 향한다. 이곳 대로변에서 골목을 들어가야 보이는 빈촌에 위치한 한 주택이 최종 행선지다.
허술하기 그지 없는 현관문을 열자,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새롬(가명, 15세) 양과 그녀의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이 두 명이 전부. 아이의 부모는 부재 상태다.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3시간 동안 '멘토' 이씨와 '멘티' 새롬 양이 한 거라곤, '부루마블' 게임, 체스 게임, TV 보면서 수다 떨기, 군고구마 먹기가 전부다. 이런 선생님을, 고맙게도, 새롬 양은 목이 빠져라 기다려준단다. "왜 선생님 안 오시는고, 안 오시는고 하면서 기다려요. 오신다고 연락오면 좋아가꼬 (웃음). 그렇게 선생님을 귀찮게 해요." 할머니가 말했다. 요즘 아이들답게 아이돌을 좋아하는 새롬 양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연신 가리키며 "선생님, 쟤는요~" 설명하기 바쁘다. 작은 방이 이 둘이 깔깔거리는 소리로 떠들썩하다.
새롬 양은 엄마, 아빠가 있지만 연락이 안된다. 아기였을 때 할머니에게 맡겨진 뒤로는 한 번 만난 적도 없다. 이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 아빠가 이혼을 했다. 이혼한 지 100일도 안 되어 아빠는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씨는 스무 살 무렵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어렸을 적 외롭게 자라 자신과 마음을 나눌 '한 사람'이 간절했던 이씨는, 그 체험을 통해 "내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새롬 양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였다.
19일, 상도동의 새롬 양 집과 근처 카페에서 이씨를 만났다. 안 그래도 키가 큰데 롱부츠를 신어서 더 커 보이는 이씨는, 작은 얼굴에 낭랑한 목소리였다. 거기에 감정과 생각을 분명히 실어 보였다.
상처입은 치유자
-직장에 다니신다고요. 직장에서는 어떤 일을 하세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사에 다니고 있어요. 제안서 만들고 여행 갈 때 동행하기도 하고요.
-아직 결혼은 안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부모님과 같이 사시나요?
자취하고 있어요. 저도 새롬이랑 비슷한 환경에서 살았어요. 가정사에 안 좋은 일들이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고모네서 살다가 대학 졸업하고 돈 벌면서 독립했어요.
▲기독교 사회봉사단체 '러빙핸즈'(대표 박현홍)의 멘토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반인들. 이들은 불우한 가정환경에 있는 아이들의 '멘토'가 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육에 참가했다. 자비로 수강료를 내고 총 16시간 동안 교육을 받아야 멘토가 될 수 있다. ⓒ러빙핸즈 |
-어떻게 하다 '멘토링' 사역을 하게 되셨나요?
교회에서 '세이비어교회'(미국 워싱턴DC에 소재한 교회로, 사회 구호에의 헌신을 강조한다)라는 책을 가지고 모임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일회성 봉사가 아니라, 한 불우한 가정에 내가 가서 그 가정의 구성원처럼 되는 것은 어떨까'. 멘토링이 어떤 건지 잘 몰랐지만 머릿속에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어요. 그러다 멘토링 사역을 하는 '러빙핸즈'(Loving Hands)라는 단체를 알게 되어 시작하게 됐습니다.
-멘토링이라는 게 어떤 건가요?
다양한 멘토링이 있지만 러빙핸즈의 멘토링은 '아이의 기댈 친구'가 되어주는 거예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방황하기가 더 쉽잖아요.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한 사람'입니다. 아이가 여러 사람에게 손을 내밀겠죠… 그 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손을 잡아주고 아이 곁을 지켜줄 수 있다면, 아이는 비뚤어지지 않아요.
-이 일을 하는 데 영향을 준 어렸을 적 경험같은 게 있나요?
성경에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제가 그런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사랑을 그리워했지만 받을 수 없었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요. 양육권이 아버지에게 갔는데, 몇 달도 안 돼 출장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됐어요. 친척들이 회의를 통해 저를 고모댁에 맡겼는데, 고모댁에서는 딸처럼 키운다고 키우셨겠지만 아무래도 제 입장에서는 친부모처럼 느끼기 힘들죠. 많이 힘들었고, 울기도 하고…. 사람들이 상처를 숨기고 살잖아요, 주위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였어요. 기댈 데가 없었어요.
어렴풋이 나는 누군가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아직도 생각만 하고 있었을텐데, 기회를 잡아서 아주 조금이나마 실천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정말 밝으시네요. '힐링'의 경험 같은 게 있었나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예요. 스무 살 땐가… 기도회였어요. 목사님이 갑자기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목사님이 던져주는 말을 따라 상상'해 보라는 거예요. '산길을 혼자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고 있습니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저는 그 때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 품에 안겼어요. 그리고 펑펑 울었어요. 또 한 번은 기도하는데 과거가 다 떠오릅니다. 그런데 내 과거의 뒤로 예수님이 늘 서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넘어질 것 같으면 '쟤 넘어지면 안되는데' 하면서 불안하게 보시고…. 내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가 된 것 같아요.
새롬이와의 이야기
-새롬이 처음 만났을 때 어떠셨나요.
기도하면서 첫 만남을 준비했어요. '내가 만나고 싶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어느 날 기도의 응답처럼 '네가 만날 아이는 네가 도움을 주기만 하는 아이가 아니라 너도 언젠가 그 아이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바로 다음 날, 아이와 연결이 됐으니 만나러 가자는 연락이 왔어요. 의외로 새롬이가 구김이 하나 없이 밝아서 놀랐어요.
▲'러빙핸즈'의 멘토들-멘티들이 함께 하는 친목 모임 ⓒ러빙핸즈 |
-만난지 3년이 넘었는데, 힘든 적은 없었나요.
거의 없는데, 굳이 있다면… 아주 가끔 감정이 상할 때가 있어요. 한 번은 같이 캠프에 가서 멘토-멘티가 한 조를 이뤄 게임을 했는데 1등이 외식상품권이고 2등이 문화상품권이었어요. 새롬이가 자기는 꼭 문화상품권 타서 '싸이월드 도토리'를 사야 된다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1등 해서 선생님이랑 맛있는 거 먹어야지'하는데.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나는 얘를 정말 많이 생각하는데 얘는 내가 보이지도 않네?' (웃음). 멘토도 멘티도 사람이다보니 모든 순간들이 좋지만은 않은 거겠죠.
작년에도 조금 힘든 시간이 있었어요. 아이는 모르겠는데 저는 그랬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맺어주신 건데 내 마음대로 포기하면 안 되지' 그런 마음이 들었거든요.
-만나면 보통 뭐 하나요?
-부루마블, 체스, 공기놀이? 거의 게임만 했어요. 아이가 5학년일 때 처음 만났는데 나는 저 나이 때 뭐 좋아했나 생각하니, 게임하는 게 최고다 싶어 부루마블을 사갔어요. 보호자이신 할머니와도 대화하고요.
-또 어떤 일 하시나요.
얼마 전 할머니가 심장 쪽이 아프다셔서 같이 대학병원에 갔어요. 위암 판정을 받으셨는데 병원 측에서 무료로 수술해주겠다는 것을 거부하셨어요. 연세도 많고 하시다 보니 그러신 것 같은데, 병이 더 진행되지는 않고 있어 다행이예요. 재작년에는 보일러를 못 때시는 것 같아 러빙핸즈에 요청해 가스비 지원을 받기도 하고. 그때그때 봐서요, 많이는 아니고요.
-다른 멘토는 어떤 분들인가요.
스무 살 갓 넘은 학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계세요. 나이 많은 멘토가 아이와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지만 젊은 멘토들보다 더 잘하세요. 이번에 한 멘토는 멘티 졸업식에 갔는데 참 다행이었던 게, 졸업식에 가족이 못 와서 혼자 지낼 뻔 했거든요. 멘티랑 단 둘이 여행 가는 멘토도 있고요.
멘토들에게 기도가 큰 힘이 돼요. 보호자가 아프면 보호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집을 비워줘야 하면 다음 거처를 정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요. 우리 힘으로는 해결이 안될 일들도 기도하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결되곤 하잖아요. 사실 멘토들도 멘토링에 은근한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기도하면 다시 힘이 생기죠. 한 달에 한 번 멘토들만의 기도모임이 있어요.
이제 시작,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시는 인생 됐으면"…
이씨는 '여행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이지만 그의 꿈은 직업과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기의 사람을 세워가시잖아요. 그런 하나님이 인간이 무엇을 할 때 가장 기뻐하실까를 늘 생각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인간에게도 보람될 것 같아요." 그는 멘토링 사역이 '작은 시작'일 뿐이라며, 앞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찾아서, 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교회와 멘토링 사역 중 뭐가 더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 같냐"고 묻자 "둘 다"라며 "교회에서 '믿음'을 배우고, 밖에서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게 신앙인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롬이와는 앞으로 새롬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멘토-멘티로 만날 예정이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새롬이는 교실에도 잘 못 들어갈 만큼 수줍음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구들 사이에 '리더'로 통한다고 한다. "선생님 만나서 달라진 점이요? 음… 더 시끄러워졌어요. 선생님이 말을 많이 하잖아요!" "내가 언제!" 새롬 양과 이씨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선생님한테 바라는 건… 그냥 친하게 지내면서 장난도 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더 자주 와서 놀아줬으면 좋겠고요. 내가 토요일마다 얼마나 심심한데요, 할머니가 못 나가게 해서!"
할머니는 "고마울 뿐이죠. 가족 같고, 딸 같아요"라며 "선생님이 빨리 좋은 신랑 만나서 알뜰히 재밌게 사는 게 제 소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