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성경이 말하는 방언(7)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입력 May 22, 2020 08:38 AM KST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IV. 성경에서 사용된 "방언"이라는 단어 개관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전서,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방언이라는 낱말들을 모두 합치면 신약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단어(glossa, glossai)와 그와 유사한 낱말(dialekto)이 모두 약 설흔일곱 번 정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 성경>을 비롯한 한글성경에서는 희랍어원어성경의 문장에서 사용된 전치사들이나 접속사들이 생략되거나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은 경우들이 있어서 해석 상 논란을 야기하곤 합니다. 더욱이 "방언" 혹은 "방언들"이라는 단어가 단수형(glossa)으로 쓰인 경우도 있고 복수형(glossai)으로 쓰인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성경에서는 단·복수의 구별이 없이 거의 단수형으로만 번역되어 있어서, 그것들을 분별하지 않고 낱말을 해석하면 그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도행전 2장 4절을 <개역 성경>(1961년)에서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로 번역되어 있던 것을, 1998년에 출판된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희랍어원어성경에 비교적 충실하게 수정되었다는 점입니다.

희랍어원어성경에서 마가복음과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장-13장 모두 복수형 단어(방언들, 언어들, glossai, glossais, glosson, glossois)가 사용되었는데, 한글성경에서는 거의 모두 단수형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단지 <개역개정 성경>에서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다른 언어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번역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12장 10절 하반절에서 "방언들 통역함"이라고 제대로 복수형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단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glossa) 혹은 "방언들"(glossai)이라는 단어를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차별화 하여 쓰고 있는데, 우리 개역개정 한글성경에서는 그것들을 치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모두 단수형으로만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언과 예언 두 은사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린서전서 14장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놓고 적지 않은 논란과 그리고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동사의 복잡한 시제(時制)들, 명사의 다양한 격변화(格變化)들, 그리고 같은 단어에 대한 단수형과 복수형의 사용은 정교한 문법체계를 가진 희랍어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를 낳게 됩니다. 교회사 영역에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325년에 개최된 최초의 범세계적 종교회의(Ecumenical Council)였던 제1차 니케아공의회에서는 기독론(Christology),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두 위격은 동등하시고(coequal) 동등하게 영원하시고(co-eternal) 동등한 본질(con-substance)이시다"라는 주장은 homo-ousios(호모-우시오스, same substance, 같은 본질, "동일본질론")라고 했고, "두 위격은 유사한 본질이시다"라는 주장은 homoi-ousios(호모이-우시오스, similar substance, 유사한 본질, "유사본질론")라고 했습니다.

이 공의회의 주제를 "이오타(i) 논쟁"이라고 합니다. 이오타(i)라는 알파벳이 없는 경우와 있는 경우에 따라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성(被造性)을 강조했던 아리우스(Arius) 장로는 이단적 가르침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죄되었고, "유사본질론"(homoi-ousios)을 주장하며 양 극단의 견해를 조화시켜 타협하려 했던 유세비우스(Eusebius) 감독의 의견은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Alexander of Alexandria) 감독과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집사가 주장했던 "동일본질론"(homo-ousios)이 니케아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최종결정이 되어 서방교회 정통 기독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희랍어 알파벳 하나(이오타 i)의 있고 없음과 단어의 단수형(glossa)과 복수형(glossai)에 따라 그 의미가 현저하게 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특히 고린도전서 14장을 쓰면서 "방언"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떤 문장에서는 단수형(glossa)으로, 어떤 문장에서는 복수형(glossai)으로 썼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렇게 구별하여 쓴 데에는 바울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에 큰 차이가 있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그것을 모두 단수형으로만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많은 성경해석자들과 설교자들이 사도 바울의 숨은 의도를 충분히 잘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UT방언(단수형)과 LT방언(복수형)을 구별하지 않거나 혼용하면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사도 바울이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표현 가운데 "행간을 읽으라"(read between the line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장만을 문자적으로 읽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그리고 전체의 문맥 속에서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여 읽으라는 뜻입니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방언"이라는 단어를 어떤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그리고 또 다른 절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또한 글로 표현하는 문장과 구두(口頭)로 표현하는 문장에도 의미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구두로 말할 때에는 억양과 표정과 제스처를 써서 의사전달을 하는데 비해, 글로 표현을 할 때에는 필자의 감정과 속뜻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우기 독자들이 글을 쓴 사람의 그러한 감정과 속뜻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오늘 성적 참 잘 받았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합시다.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별 감정 없이 읽으면, 아버지가 아들이 받아온 좋은 점수에 만족해 하며 아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 공부 많이 했구나, 잘 했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버지의 억양과 표정과 제스처에 따라서는 비꼬는 투로 아들에게 실망을 토로하며 책망을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 왔느냐?"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글로 표현된 문장을 별 감정 없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읽는 경우와 제스처와 표정과 어투에 비꼬는 투의 감정이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여 읽는 경우, 이 두 가지 경우에 결과적으로 정반대의 해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신종국 목사는 이러한 비꼼(satire)의 예를 열왕기상 22장 1-36절에 나오는 구약성서의 일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신종국, "방언기도 성서적인가 (3),"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 /watch?v=6VXClKJXuyM&app=desktop, 2019년 4월 20일 접속.].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남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요새였던 길르앗 라못이 아람 군대에 의해 탈취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남왕국의 힘을 빌어 아람을 쳐서 길르앗 라못을 되찾아 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이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때 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선지자들이 있을 텐데, 전쟁 개시 여부에 대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아합 왕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아합 왕이 불러온 400여명의 선지자들은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왕상 22:6)라고 말하면서 승리를 장담하며 왕의 계획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또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내게 대하여 길(吉)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凶)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왕상 22:8).

여호사밧 왕은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도 들어봐야 한다고 하면서 그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신하가 그에게 용건을 말하면서 400여명의 선지자들이 이미 전투 개시 여부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변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며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 22:14)고 다짐하며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을 알현(謁見)했습니다. 아합 왕이 미가야에게 물었습니다: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왕상 22:15)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이 대답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400여 선지자들의 긍정적인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람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하면서 길르앗 라못을 되찾아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묘사된 16-17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미가야 선지자의 대답은 비꼬는 투로 한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의 예언은 전투에 패배를 할 것이니 군대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이 미가야에게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왕상 22:16)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미가야는 자신이 여호와로부터 받은 진실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왕상 22:17). 아람 왕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병사들을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조언을 듣지 않고 출병을 감행했다가 아람 군대에 의해 크게 패하였고, 결국 아합 왕은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15절에서 미가야 선지자가 했던 대답은 "비꼬는 투"(sarcastic expression, satire, 풍자적인 어투)로 한 말이었고,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받았던 진실된 예언과는 정반대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 속에서 화자(話者)가 의미하고자 하는 말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 전체의 주제와 전후 문맥은 물론 문장 속 대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4장을 읽거나 해석할 때에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1세기 당시의 코이네희랍어 문장에서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쓰고 있는 인용문 부호(따옴표, " ")나 물음표(?)나 심지어 마침표(.)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에 기록된 오래된 성경사본들에서는 희랍어알파벳들이 모두 대문자(Capital Letter)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장과 절의 구분이나 번호도 매겨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소문자 알파벳이 사용된 것과, 장과 절을 구분하고 번호를 붙여서 독자들이 찾기 쉽도록 편집이 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기 시대의 일입니다[동의선교회, "성경의 장·절 구분," [온라인자료] http://cafe.daum.net/pulse0310/FXNx/11?q=%EC%84%B1%EA%B2%BD%EC%9D%98%20%EC%9E%A5%EC%A0%88%20%EA%B5%AC%EB%B6%84, 2019년 6월 25일 접속. 성경의 장·절(章·節: chapters and verses of Bible)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장 구분을 한 이는 대체로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추기경 스테판 랭튼(Stephen Langton, c.1150-1228)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편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Robertus Stephanus, 1503-1559)는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마상(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구·신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입니다.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UT방언을 하는 자들의 주장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인지 사도 바울 자신의 주장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를 올바르게 구분해 내기 위해서는 고린도전·후서 전체의 흐름이나, 은사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2-14장의 문맥이나, 적어도 14장의 문맥 속에서 각 절의 문장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그 당시 고린도교회 일부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인지 바울 자신의 주장인지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단수형인 UT방언과 복수형인 LT방언을 구별하며 읽고 문장을 해석해야만,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자 의도했던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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