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홍정수 칼럼] 노르웨이 총기난사 테러와 기독교

LA한아름교회 홍정수 목사

2001년 9월 뉴욕에서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과 최근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동족살상 사건은 그 뿌리로 보건 현상으로 보건, 또는 사건을 덮어버리는 기득권 세력의 자세로 보건 양태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범인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당국은 그 말이 일반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재빨리 덮고 관심의 초점을 교묘히 이동시켰다.

한국인들도 이번 사건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다가서고 있다. 아직 그 폭력 사건의 불똥이 우리 집 안방에까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문제요,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소행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콜롬바인에서 일어난 학우폭력 사건 때도 그랬다. 특정 개인의 우울증이 원인이었다는 전문가의 진단을 빌어 사건이 마무리 되었고, 그 사건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전혀 전달되지 않은 채 우리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LA한아름교회 홍정수 목사.ⓒ베리타스 DB
그래서일까?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어찌 간파하지 못하느냐는 예수의 탄식이 일찍이 있었다. 칼 바르트 역시 모든 설교자는 성경과 함께 세상(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우리 설교자들은 성경을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로 읽으려고 본능적으로 애쓰는데, 세상 소식을 접할 때 역시 그것을 강 건너 화재가 아닌 ‘우리 동네’, ‘우리 집안’ 일로 읽어야 한다. 무덤덤하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길 것이 아니라,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얻고 그것을 익힘으로 후손들에게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

노르웨이 사건이 터지자 매스컴들은 범인의 정체성을 ‘극우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밝혔다. ‘극우’라는 수식어를 앞에다 달아두는 것은 일종의 ‘외교적 예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대다수의 당신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 중에 일당이 있다고 넌지시 지목하는 어법이다. 안데르스의 테러 행위는 기독교의 ‘집안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슬림들만 테러를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테러를 저지를 수 있고, 역사적으로 봐도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테러(살상, 무고한 피해자 고문)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안데르스에게 있어서 테러행위는 분명 ‘언어 행위’였다. 즉 실수로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충분히 심사숙고 하고, 의도(메시지)를 가득 담아 행동했다. 하지만 테러행위는 일반적인 폭력행위와 달리 제3자를 공격하여 공포감을 줌으로써 우회적으로 말하는 행위이기에, 당사자가 말하고자 하는 간곡한 메시지는 전혀 전달되지 않으며, 이 미숙하고도 야만적인 언어행위는 그 피해자와 그들 편에 서 있는 연약한 사람들로부터 극심한 반감을 살 뿐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러한 개인적·집단적 우울, 억울, 분노에서 출발한 행위의 배경이다. 즉 많은 테러행위가 ‘소통 부재’의 현실 속에서 폭력 외에는 적절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없는 현실이 첨가된 후, 종교가 주는 화려한 명분을 도화선으로 분출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기독교 역시 이러한 배경을 형성하는 데 한 몫 하고 있는 듯 하다. 기독교의 사상, 제도, 관행이 심각한 ‘소통 장애’ 지역을 만들고 있으며, 폭력을 정당화해줄 ‘화려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소통장애의 첫 대목은 천지창조 신앙이다. 히브리 성경이라는 옛 책-곧 인권, 지구촌, 생태계 등의 개념 탄생 이전의 옛 책-은 여성, 타국인, 타종교인, 하층민, 그리고 환경 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시대의 산물인 연고로 각종 무자비한 폭력행위가 신의 이름으로 조장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 같은 낡은 잔재와 치열하게 싸워 많이 청산했으나, 아직도 절대다수의 교회가 그 폭력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대로 선전하고 있으니, 그 첫 단추가 천지창조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우주와 그 안의 생물체들을 처음부터 완제품(성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과학적 상식을 알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성에 대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이성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왜 믿는다 말하겠는가?’ ‘검증된 것은 이미 하느님이 아니다’ 등의 그럴듯한 이성 압제 장치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시간과 공간 속의 ‘순간 창조’ 신앙은 과학적 지식 및 이성과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인데, 이를 신앙의 첫 관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 가르침이야 말로 소통장애의 첫 지역이다.

필자가 믿는 바로는 천지창조 신앙이란,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세상의 주인공을 하느님 되게 하라는 정치적 선언 사건이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희망의 언어이다. 즉 옛날에 일어난, 지금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 일어날 필요도 없는 ‘죽은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건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에 대한 희망이요 고백이다.

예수의 대속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참혹한 폭력의 발단이 될 수 있다. ‘피 흘림 없이 죄 사함은 없다’는 것보다 강력한 테러 미화의 명제가 있을까? 이를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 삼으려 했던 사건의 유서 깊은 연장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식이 내 소유물도 아닌데 자식을 담보로 큰 복을 얻으려는 검은 욕심이 신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정당화 될 수 없다. 또 자비롭고 전능하신 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방식이 그런 잔인한 길밖에 없었다는 말인가? 신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그런 신을 경배까지 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명분만 화려하게 주어지면 사람, 특히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죽인다는 이해는 위험하다. 예수의 보혈 공로로 인한 인간 대속의 개념은 그 시대적 관용어요 상징적 언어일 뿐이다. 이에 대한 문자적, 실재론적 이해는 자칫 ‘테러리스트인 신’을 경배하는 셈이 될 수도 있다. 예수의 대속은 옛날에 단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며, 지금은 일어날 수도 일어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니다. 내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고, 또한 날마다 예수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사는 일이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며 실로 ‘엄청난 능력’ (고린도전서 15:31, 13:1-7, 고린도후서 4:6-7)이다.

덧붙여, ‘최후 심판’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멋진 테러의 명분인가. 하느님께서 싸우실 싸움을, 내가 미리 지옥의 자식들을 대항하여 싸운다는 논리가 될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폭력사건이 기독교 신앙인의 한 사람에 의하여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반성할 때가 왔다. 소 잃고도(중세교회 300년 동안의 잔혹한 살상행위) 외양간 고치지 않는다면, 하늘인들 어찌 우리를 도울 수 있으랴. 일체의 소통장애를 철저히 재검증해야 한다. 종교적 신념이 소통장애의 온상이 되게 놔둘 수는 없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의 철저한 비판정신을 구현하여, 자성과 발전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글/LA한아름교회 홍정수 목사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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