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본주의의 이념적 실재인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는 돈과 권력을 거머쥐는 성공주의가 신앙 혹은 종교성과 교묘하게 엮어져 우상화 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대형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성장주의에 예속된 절대 다수의 중소형교회 역시 이런 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들 교회들이 신앙과 결부되어 목을 매는 성공지상주의에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가르침과는 상반 된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주장은 파격에 가깝게 들릴 것이다.
본지는 구정 연휴를 맞아 신자유주의와 교회의 관계를 묻는 두 번째 특집기획 인터뷰를 마련했다. 재야 연구 활동가이면서 목회자로서 특히, 대형교회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을 18일 그의 연구소가 소재한 망원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인터뷰 중 김진호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미친 성장주의에 빠졌다”고 일갈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가르침인 성육신 신앙, 즉 신이 낮은 데로, 낮은 존재로 임한 사건이 “퇴색되고 있다”고 크게 우려했다. 특히 대형교회의 유형 분석에서 신귀족주의 신앙으로 분류되는 ‘웰빙신앙’의 등장에 주목하며 천박한 자본주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신앙패턴도 문제이나, 은폐된 야만을 내포하고 있는 ‘웰빙신앙’이라는 새롭게 등장한 신앙패턴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 일답 전문.
- 이 시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존재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시나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 ⓒ베리타스 DB |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있죠. 신자유주의는 내용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의 이념적인 비전으로 실재했던 것이니까요. 현대 자본주의라고 얘기하면, 현대 자본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양상은 부가가치 증식, 자산 증식에 대한 무한 경쟁 사회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과거보다도 더 강한, 과거와 다른 것은 과거에는 국가와 자본이 서로 견제하는 정도의 관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서로 견제 공존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국가의 통제력을 상당히 벗어난 자본의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죠. 예컨대, 금융자본은 국경을 넘나들고 있잖아요. 그런 현대 자본주의의 양상은 무한 경쟁이고, 그러면서 그동안 국가 단위로 형성되었던 공공적인 것을 무수히 많이 해체시키면서 삶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공공적인 것이 점점 부재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죠.
“미친 성장주의에 빠진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강박증까지 보여”
한국교회는 사실 오래전부터 미친 성장주의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성장에 몰두를 했어요. 그러나 근자에 들어서 마이너스 성장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교회 시스템이나 사람들의 정신적, 영적 관성은 모두 성장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성장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굉장한 강박증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교회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더욱 내몰리고 있는 것 같아요. 공공적인 것이 붕괴된 상황에서 교회가 어떤 포지션을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뒷전이고 말이지요. 이것이 아마 오늘날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적 주제들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공공적인 것이 위축되고 있는 현대사회를 돌아볼 영적 자원 자체가 고갈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서 말이지요. 큰 틀로 보자면 그런 상황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특히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형교회들이 최근에는 안타깝게도 기독교계에서 가장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문제 집단으로 그려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S교회 목사의 성추행 사건, J교회 목사의 공금 횡령 사건, 또 다른 S교회 목사 폭행 사건 등 이외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건들이 이들 대형교회 집단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건의 밑바닥에는 신자유주의가 불러낸 허상인 맘몬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맘몬주의가 과거의 자본주의 초기나 중기 자본주의 사회, 즉 20세기 후반 이전까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공장노동자로 불러냈잖아요.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주체의식이 생겼죠.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노동자로서의 자아의식을 갖게 한 역사적 단계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후기 자본주의는 그런 노동현장으로 불러내어 노동자로서 자의식을 갖게 했었던 사람들을 다른 방식으로 호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비자로 변환시켰다는 것이죠.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자본주의로 옮겨가면서 사람들은 소비자로서의 주체가 더 중요해졌어요. 노동자로서의 주체보다는 말이죠. 노동자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 자산을 벌어들이는 수단이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 주체는 무의미해진 상황이 된 것 같아요.
소비자본주의는 우리를 소비자로 불러내어 우리를 욕망하는 주체로 만듭니다. 욕망하는 주체는 먼저 우리가 욕망하는 자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즉 우리는 일터에서 뿐 아니라 집터에서조차 욕망하는 주체가 되어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죠. 결국 현대 자본주의는 일상 구석구석까지 우리를 통제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우리의 몸, 영혼, 종교성까지 통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기술적 능력들이 갖춰진 것 같아요. 노동과 쉼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기술적 발전이 가능해진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본이 사람을 통제하는 능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어서 거의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자본이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을 기독교에서 배워와”
“친밀성의 삶의 공간 해체되고, 업적 공간으로 전환돼”
그렇다면 자본이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을 어디에서 배워왔을까. 저는 그 상당부분이 기독교와 관계된다고 보고 있어요. 가령, 기독교는 아주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가 있었던 고대 사회에서조차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응용되면서 자본주의 기술이 되고 있고. 교회와 자본주의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게도 갈등하는 게 아니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다단계와 관련이 있는 상업행위 같은 것이 있죠. 아시다시피 다단계는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시작한 선교방식에 의존, 기원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본주의 마케팅 방법으로 활용되었던 것이죠. 둘 사이가 그런 점에서 가깝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 마케팅 차원에서 보면 내가 가게에 가서 무엇인가를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나의 삶의 현장이 가게가 된 것이라고 할까요. 다단계라는 것은 사적인 인간관계 영역조차도 마케팅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적인 영역들이 다 나의 영업의 장이 되는 것이죠. 삶의 사적 공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사적 공간을 전도의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기독교 전도도 마찬가지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역작용을 말하자면 예컨대, 다단계로 말할 것 같으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친분관계로 교분을 나눠야 하는 사이가 서로 경계하고, 나의 이윤을 위해 이웃을 활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가까운 친구를 전도하거나 가족을 전도하는 것이 나의 전도 업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죠. 친밀성의 삶의 공간이 해체되고, 업적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조작해 냄으로써 기독교는 매우 활발한 전도 비전을 만들어 냈고, 또 효과를 만들어 냈죠. 자본 역시 이를 바탕으로 경영 혁명을 일으켰어요. 이 같이 우리는 자본주의와 교회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많은 기술적인 테크놀로지들이 교회에 비판적 반성 없이 곧 바로 수용되고 활용되는 것도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기술문명과 신앙이 밀착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빠르게 효과를 내야하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성찰조차 생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친 성장주의가 만들어 낸 역작용이죠. 결국 맘몬주의는 우리가 맘몬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맘몬하고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공간조차 맘몬화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영조차도 말이죠.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한 있는 위기라고 보거든요.”
- 대개 대형교회 설교 강단에서 들려지는 목소리가 믿으면 축복 받고, 부자가 되는 것임은 초등학생들조차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반복적인 설교에도 이 시대 배웠다는 지성인들 역시 쉽게 매료되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칼한데 이를 분석해 보신다면요.
“어떻게 보면 중소형 교회들이 더 축복에 경도되어 있는 경향이 있어요. 대형교회는 축복을 잘 활용해서 성공을 했죠. 그런데 (그 축복신앙을)잘 활용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으나 더 노골적으로 물질적 풍요와 하나님의 축복을 동일시하는 형식은 중소형교회에서 더 흔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교회 사이즈와 관계없이 일반화 된 신앙이 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대형교회와 더불어 상당수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전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대형교회의 유형 ‘웰빙신앙’ 등장해”
그런데 최근에 일부 대형교회에서는 다른 양상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른바 나는 그것을 ‘웰빙신앙’이라고 표현을 해봤는데 ‘웰빈신앙’이 활성화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빠름에 대해서는 느림, 성장에 대해선 안정, 노골적인 물질주의에 대해서는 양보다 질, 영성주의를 강조하는 그런 흐름들이 일부 대형교회나 엘리트 중심의 중대형교회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런 교회들에서 우리는 어떤 특징을 볼 수 있냐하면 굉장히 교인들의 구성이 우리 사회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성공한다는 것은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 광속으로 움직이는 속도성의 사회에 매우 잘 적응한 사람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자기의 자산을 증식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늘날에서는 속도에 대한 능력과 밀접하거든요. 굉장히 빠르거든요. 오늘날 많은 기업들은 거의 모든 것들을 양화시켰어요. 정신적 가치마저요. 수학이나 통계가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도 모든 것을 양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죠. 빠르고 굉장히 속도적이고, 양 중심의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한 이들이 성공한 사람들인데 그런 이들이 포진되어 있는 일부 중대형교회들이 오히려 그런 것과는 다르게 신앙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냐 하면, 양보다는 질, 성공보다는 안정, 속도보다는 느림을 추구한다고 보이는 것이죠. 이런 종교성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나는 그런 신앙을 ‘웰빙신앙’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미국 사회에서는 이런 웰빙적 삶의 취향을 지칭할 때 보보스(bobos)라는 용어를 사용했거든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을 같이 합성한 것으로, 보보스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적합할지는 모르겠으나)신귀족주의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헤미안들은 중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적 가치를 이탈하는, 이탈하는 사람들, 유랑자들을 말합니다. 과거에 보헤미안들은 박탈자들이었거든요. 서유럽 사회에서 동유럽인들은 유랑민들이죠. 밑바닥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요.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동시에 쓰레기가 되는 사람들, 이들 수많은 이주민들, 이게 보보스입니다. 그 보보스의 또 다른 유형은 부르주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산 증식에는 매우 빠르고, 매우 양적인데 신앙을 소비할 때는 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종교패턴이 한국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중적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예컨대, 미국의 우디 알렌(Woody Allen)이 가끔 영화에서 유대 커뮤니티를 조롱할 때, 거대한 기부금 행사를 하고 기부금을 모아서 좋은 일을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제3세계에서 1달러도 안 되는 저임금 노동에 어린아이들을 착취하는 유대 커뮤니티를 고발하잖아요. 이런 이중적인 행태가 공존하는 것이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세탁하는 삶의 양식이 종교와 더불어 발전해”
“노골적인 야만주의 못지 않게 ‘은폐된 야만’ 경계해야”
자기 자신을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세탁하는 삶의 양식들이 종교와 더불어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제 속죄할 자유조차 없어진 것이죠. 자신이 깨끗한 삶에 매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속죄할 자유조차 없어져 버린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형식의 종교양식이 중상위층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서양의 보보스형 양상에 대해 유럽에서는 '은폐된 야만'이라거나 '부드러운 야만'이란 표현을 썼어요. 야만은 야만인데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야만이란 것이죠.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형식의 그리스도교 대형교회 존재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천박한 야만, 노골적인 야만주의를 너무 닮은 성장주의 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은폐된, 부드러운 야만의 얼굴을 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다 경계해야 하는데 특히 후자에 대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후자가 더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것이거든요.”
- 종교성을 가진 대다수 교인들은 이른바 교회가 자신들에게 ‘구원’이란 이름의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에 교회출석을 자신의 멤버쉽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보수교회에서는 주로 방주 비유를 드는데 교회라는 방주에 올라 타 있으면 개개인의 구원이 보장된다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때문에 방주가 크고, 믿음직스러울수록 개개인들은 ‘구원’이란 이름의 ‘안정’ 추구 욕구가 더욱 확실히 채워지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신앙과 직결되는 ‘구원’의 문제에까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방증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