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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물에서(5)] 공공의 적들과 계급의 발생

이충범·협성대 교수(역사신학)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직장에 나가지 않는 기러기 아빠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규칙적인 일상의 일환으로 매일 동네 뒷산에 올랐습니다. 늘 다니던 길을 다니다가 조금 지루해지면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그렇게 또 다니다가 지루해지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이런 식으로 산책을 다니자 동네 뒷산은 제게 매일 새로운 얼굴을 선보여 주었습니다. 자주 만나는 화사(花蛇)나 가끔 보는 살모사는 친한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때론 거대한 고라니 수컷도 만났습니다. 어떤 때는 누구에겐가 살해당한 고라니 새끼의 사체도 보고, 작고 귀여운 쇠딱따구리, 물총새 등도 쉽게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산을 즐기며 동네 뒷산을 다니는 시간이 1시간에서 2시간, 2시간에서 3시간으로 계속해서 늘어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린 시절, 과도로 잘라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팔던 두부처럼 이리 썽둥, 저리 썽둥 잘려진 우리 동네 뒷산엔 동쪽에 하나, 남쪽에 하나, 서쪽에 하나, 작은 실개천이 흘렀습니다. 매일 집 뒷산 이리저리를 헤매면서 하릴없이 하천을 내려다만 보던 어느 날 콘크리트에 갇혀 있는 동/서쪽의 개천에 비해 내딛기가 수월한 남쪽의 개천으로 내려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저분한 하천 구석에서 작은 양파망 하나를 주웠습니다. 양파망을 보자 갑자기 이것이 그물로 보였고 그 참에 양파망을 펴들고 물고기를 잡는답시고 다 늙은 게 하천을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 사냥을 하다 허리가 아프면 양파망을 실개천 구석에 숨겨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런 유치한 놀이는 연일 계속되었지만 저는 매일 빈손이었습니다. 당연한 것이, 양파망을 휘두를 때를 기다리기는커녕 제 몸이 노출되는 순간 물속의 고기들은 이미 다 내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길 일주일가량 되던 어느 날 ...   
일주일가량 헤매다보니 슬쩍 요령이 생겼습니다. 양파망을 물속에 깔고 그 위에 돌을 쌓은 후 물고기들이 있을만한 곳을 쑤셔대니 겁먹은 물고기들이 양파망 위에 쌓아둔 돌 밑으로 피했습니다. 그 순간 조심스레 양파망을 돌과 함께 들어 올리니 돌 아래로 숨어들은 녀석들이 꼼짝 없이 잡힌 거지요. 똑같이 생긴 물고기 6마리, 평생 수없이 봐 왔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녀석들 6마리를 생수병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럼에도 100 퍼센트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에 놓쳐버린 알록달록한 작은 녀석 한 마리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입니다. 거의 다 잡았다 놓친 그 녀석... 이렇게 잡아서 제 어항의 새 식구가 된 녀석들은, 사실 그 땐 몰랐지만, 알고 보니 버들치, 바로 공포의 버들치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 전역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의 민물고기를 꼽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녀석이 아마 버들치가 아닐까 합니다. 대한민국의 동, 서, 남, 북 어느 쪽으로 흐르든지, 그 어떤 수계의 하천이든지, 수질이 좀 떨어지고 오염도가 높은 하천이라도, 물만 좀 차다 싶으면 어디든지 꼭 있는, 그것도 가장 개체수가 많은 물고기가 바로 이 버들치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개체수가 많은 이유는 명백하지요. 이들은 엄청난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는 물고기입니다. 이들의 생태적 특성은커녕 이름도 몰랐던 저는 신나라하며 이 버들치들을 제가 키우던 물고기 어항 속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어항 속은 또 새로운 질서의 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어항 속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이넘(?)들, 눈치보고 적응이고 뭐 이런 것 전혀 없었습니다. 대부분 환경이 바뀌면 물고기들은 2-3일 간 먹이를 전혀 먹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민한 육식어종의 경우 먹이에 대한 반응이 더욱 더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이 버들치들은 그런게 전혀 없었습니다. 새 환경에 들어가자마자 이 녀석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빠른 속도로 어항을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물에 꼬이는 똥파리처럼 사료에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면에 사료를 뿌리면 물 위로 솟구쳐 올라와 물보라를 만들면서 먹이에 달려드는 먹보들이었습니다. 먹는 양은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대는 버들치들은 사실 너무 많은 먹이를 주거나 큰 먹이를 줘서 배가 터져 죽는 경우까지 있다고 합니다. 여하튼 버들치 6마리가 들어가자 어항 속의 질서는 다시 무질서,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버들치는 엄청난 먹성과 빠른 성장속도로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했고 다른 어종들은 먹이경쟁에서 밀려 비실비실 야위어만 갔습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명하시기를, 너희는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하셨다.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하니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 (출애굽기 16:16-18 [표준새번역])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누리는 데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먹을 만큼만 줍되 남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백성이 먹을 수 있는 양 이상을 거두어 저장한 만나는 여지없이 썩고 말았습니다. 만나의 법칙은 축적된 재화로 인한 계급발생을 억제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불평등을 원초적으로 불허하는 하나님의 멋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버들치 군단이 이 법칙을 완벽하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속에는 물 위쪽에 사는 녀석, 중간에 사는 녀석, 바닥을 헤집고 사는 녀석들이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저의 어항 속의 녀석들은 대부분 물 중간에서 유영하며 사는 녀석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뿌려주는 만나는 수면에서 버들치 군단에 의해 독식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코드1이건 2이건 간에 아래쪽의 물고기들은 하늘에서 내리지 않는 만나를 기다리며 다이어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하튼 어항 속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버들치들을 괘씸한 눈으로 바라보던 제게 이상한 녀석이 하나 포착되었습니다. 
▲무자비한 먹성과 최고의 적응력을 가진 버들치들 중에 꼬리가 썽둥 잘려나간 녀석이 어항 속을 힘차게 유영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충범 교수

한 녀석의 꼬리가 마치 면도칼이나 손톱깎이로 잘라낸 듯이 썽둥 잘라져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렇게 깔끔하게 꼬리를 잘라냈을까?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이 커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출장 가는 친구들이 가끔 전화를 합니다. 제가 고속도로 휴게소 근방에 살다보니 하행길이나 상행길에 저와 휴게소에서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한잔하고 가려는 친구들이지요. 그날도 아침 일찍 친구전화를 받고 휴게소에서 친구를 만나 점심과 커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얼마 전에 놓쳤던 그 알록달록한 녀석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가던 길을 바꾸어 실개천에 도착한 후 그 녀석을 놓친 바로 그 돌을 살짝 들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녀석은 여전히 그 돌 아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부랴부랴 숨겨두었던 빨간 양파망을 찾았습니다.   
버들치 사냥에 했던 것처럼 양파망과 돌을 설치하고 다시 그 돌을 들어 올리자 녀석은 곧바로 저의 양파망 위 돌 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이미 이 방식에 익숙해진 저는 얼른 양파망을 들었고 드디어 망 위에서 팔딱이는 녀석을 잡았습니다. 거짓부렁 전혀 보태지 않고 발견 후 단 2-3분 만에 포획이 완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놈, 잡고 보니 그 인상이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납작한 몸, 쩍 벌어져서 큰 입, 심술궂게 보이는 표정, 신경질적인 반응, 아무래도 이 녀석은 다루기에 그리 녹록하지 않는 녀석임이 분명하였습니다.  
▲한참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 밀어 수컷, 인상이 더럽고, 성질도 더럽지만 노는 모습은 엄청 귀엽다. 거의 1년을 함께한 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 녀석, 지금도 그립고 아쉽다. ⓒ사진제공= 이충범 교수

거의 잊혀져가던 녀석을 채집한 저는 의기양양, 집으로 뛰어와 녀석을 어항 속에 넣었습니다. 어항의 조명 빛에 드러낸 녀석의 얼굴은 더욱 더 우스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입수하자마자 바로 돌 밑에 숨으며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다 보고, 또 지나가다 보고, 보고 또 보고, 이렇게 해도 녀석의 완벽한 모습을 오랫동안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저는 숨죽여 어항 속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들킬까 봐 숨죽여....   
녀석의 이름은 밀어, 그 역시 우리나라 민물고기 중 가장 흔한 망둥어과 민물고기 중 하나입니다. 신기하게도 밀어는 동해, 서해, 남해로 흐르는 하천에 사는 녀석들의 색과 모습이 같은 종이라고 보기에도 힘들 정도로 다 다릅니다. 녀석들 중에 가장 개체가 많은 녀석들은 서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에 사는 녀석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중 한 녀석이 제 어항 속에서 해괴한 일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쫓고, 나머지 녀석들은 쫓기고 있습니다. 그는 찢고 나머지 녀석들은 찢기고 있습니다. 그는 파고 또 파고 있고, 바위(실은 어른 주먹 두 개만한 돌) 위에 올라 포효하고 있는 중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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