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목사는 동성애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교회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무엇보다 "동성결혼 법제화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해 이목을 끌었다. 이런 입장이 기사화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목사님께서는 현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진화론이나 동성애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의 입장을 갖고 계십니까?
이: 그런 문제들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에 대한 대답이거든요. 동성애 논쟁만 해도 여러 논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보수적인 목사님을 만났더니 동성애자들이 축제한다고 하니 기도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란 문명의 소외 현상이에요. 명백히 창조 질서에는 어긋나는 것이고 우리의 죄성이 드러난 현상이지만, 동성애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병자나 장애우를 억압하면 안 되듯이 DNA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동성애자들을 따뜻한 눈으로 살피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결혼을 했는데, 법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이혼을 당해도 아무런 보장이나 위자료도 못 받고 버림을 당하게 되겠지요. 그와 같은 인권유린 사태가 실제로 많이 일어납니다. 버림받고 이혼당하면서 돈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나서는 자살하는 등의 일들이 비일비재해요. 이런 일들을 법적으로 보호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동성 결혼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함께 살다가 헤어질 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 여성보호법입니다.
문: 이런 입장을 기사화해도 되겠습니까? 보수진영으로부터 공격이 있을텐데요.
이: 괜찮습니다. 그게 저의 입장입니다. 특히, 여성동성애자들은 법적으로 보호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이 너무 교만하게 공개대회를 연다든가 퍼레이드를 한다든가 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인권을 찾으려는 시도이고 동성애를 마귀적인 일로 매도하는 보수진영에 대해 저항하는 노력일 수 있지만, 가능하면 겸손하고 조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동성애자들 중에서 부자들이나 연예인들 등의 세력을 활용해서 캠페인을 심하게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성애 반대 진영에서는 그러한 공개적인 활동을 도전으로 여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통합을 위해서도 조용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법률적으로 세계적인 서구법도 참조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이런 일들을 선진적으로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성애 문제 말고도 이슈들이 많은데,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매우 오픈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셨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최근에도 제가 쓴 칼럼 때문에 공격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지역 신문에다 칼럼을 한 편 썼는데, 보수적인 목사님들이 굉장히 비난하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보수적인 목사님들이 성경을 너무 교리적으로만 해석하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문에다 쓴 글은 엘샤따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용어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소개했었지요. 예를 들면, “W.F. 올브라이트라는 신학자는 엘샤따이에 ‘전능하신’의 뜻이 없고, 원래 의미는 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엘샤따이는 산의 하나님이라 번역해야 한다.” 우리말로 하면 산신령인 셈이지요. 그가 80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의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한 겁니다. “둘째로 해리엇 러츠키 교수가 샤따이는 여성의 유방을 가리킨다. 여성의 두 젖가슴의 하나님이다. 그 젖가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기를 키우고 양육하는 하나님의 여성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긍휼의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엘샤따이’에는 여성의 생명성이 하나님에 빗대어져서 표현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소개했더니 난리가 난 겁니다. 저를 두고 이단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었지요. 제가 보기에 이것을 문제 삼는 목회자들은 공부를 안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학술적인 연구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설교는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아지고 성도들은 성경을 아주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영재 목사는 우리나라 보수교단들의 "지나치게 배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며 이런 입장을 계속 취해 나갈시 "개신교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문: 목사님께서는 소위 진보적인 해석의 관점으로 설교를 준비하시는데, 성도들과의 세계관의 차이라든가 여타의 문제로 설교의 위기를 느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이: 이런 사례는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다른 교회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보수적인 교회에서 목사님에게 상처를 받아 교회를 옮기는 과정에 우리 교회를 소개받았다든지 인터넷에 있는 저의 이야기를 봤다든지 해서 우리 교회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제가 WCC에 대해서 설교하거나 교회연합운동의 중요성 등을 이야기하면 혼란스러워합니다. 한번은 제가 부처님오신날에 송광사에서 축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그런 성도들에게 말하면 100% 반대합니다. 불교를 사탄 마귀 앞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오죽하겠어요? 이런 사람들은 교육이 잘 되지 않습니다. 워낙 보수적인데다 고집도 세고 세계관마저 닫혀 있지요. 그래서 그런 분들이 교회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제가 행동을 자제합니다. 그 분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요. 설교에서도 그런 생각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바뀌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좌절감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교단들은 너무 배타적입니다. 타종교에 대해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대응하려고도 하지 않죠. 그저 멸망 받을 자식들이라느니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라느니 정도로만 치부해버리니까요.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의 입지가 좁아지게 됩니다. 가톨릭은 이미 담을 허물고 팔을 벌려서 많은 신도들을 품에 안았어요. 최근에 가톨릭교도가 많이 늘었잖아요? 그들 대부분이 개신교에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개신교 교인이 많이 줄었어요. 그런데도 점점 배타적이고 다른 세계와 대화하지도 않은 채로 자기중심적으로 굴면 개신교의 신도수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철야기도하면서 동성애법 반대에 투쟁적으로 나서는 등의 행동에 목숨을 건 듯이 배타적으로 활동하면 교회는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런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품으며 이해하려고 해야잖아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지 않습니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문: 설교자로서의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러면, 바람직한 설교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요즘 같은 설교의 홍수 시대에 바람직한 설교의 사례는 많이 있겠지요. 저는 바람직한 설교의 양태보다는 설교의 마지노선 같은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에 살아있도록 만드는 해석활동이기 때문에 성경을 자기의 선입견이나 사상, 이념에 의해 전단하려는 자세에 대해 경각해야 합니다. 편협한 자기주관을 성경에다 주입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문: 마지막 질문입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 권하고 싶으신 설교자로서의 자세를 알려주시겠습니까?
▲후배 목회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얘기가 없냐고 묻자 이영재 목사는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말고, "말씀 자체가 말하게 하라"고 했으며, 덧붙여 "전도 많이 하려고 상업 전술을 구사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이: 주석을 참조할 때 성경이 들려주는 말씀을 받도록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혹은, 주석의 정보대로 성경말씀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 자체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주제를 포착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성경 구절을 자의적으로 구분해서는 안 되겠죠. 성경말씀 자체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읽고 그것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를 성경말씀으로부터 받았다면 과감하게 선포하는 것이 그 다음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듯이 모든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랑을 선포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본문으로 설교하더라도 항상 신약을 참조해서 설교를 준비하고 예수를 증언해야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만 증언하면 유대교 설교가 되어 버리는 거죠. 다윗을 본 받아라는 식의 설교도 있는데, 그런 설교는 유대교 설교입니다. 모든 설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을 성도들에게 질문하고, 또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줘야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메시지를 통해 성도들은 다시 힘을 얻고 절망에 빠졌더라도 다시 한 번 격려를 받게 되거든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이것이 설교의 초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성도가 있더라도 말씀을 가지고 그 성도를 비판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벗어난 것은 모두 도덕적 교훈에 지나지 않죠.
주일 대예배 설교에는 도덕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담배를 피지마라, 도둑질하지마라, 간음하지마라 등의 도덕적 설교는 성경공부 시간이나 소그룹 모임이나 수요 예배 때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소위 주일대예배 때는 설교가 성만찬이 되도록,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의식이 되도록,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합니다.
또 하나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성도들을 많이 전도하려고 상업적인 전술을 구사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했듯이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모두 예정해 놓았으니까, 너무 애써서 교회를 키우려고 아무나 교회로 받아들이는 일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서비스를 지나치게 제공해서 나중에는 부교역자들, 목사님들과 전도사들까지 서비스맨으로 전락해버리는 결과가 초래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오면 성도가 봉사하고 훈련하고 자기를 더 낮추며 수행하도록 인도해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소위 기독교적인 영성이 신선하게 살아있게 되는 거죠. 부목사들까지도 철저하게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만 영적으로 성도들을 엄격하게 지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래야 하는 겁니다. 교회가 일반회사처럼 서비스를 제공하고 헌금하게 하는 등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설교에서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만족하고 기쁘게 생활하면서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꿈을 꾸지 말았으면 합니다. 말씀을 연구하면서 그냥 그 자체를 보배로 느끼고 행복해 하며 가난한 생활에 자족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 장시간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